새벽설교 240719 금 [에스겔 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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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240719 금 [에스겔 16장]

본문: 에스겔 16:44-63절

오늘 본문이 상당히 분량이 길어서 뒷부분의 일부만 함께 읽게 되었습니다. 에스겔 16장은 일종의 ‘비유’입니다. 어제 15장 예언에서도 ‘포도나무’로 예루살렘을 비유하셨는데, 오늘 16장의 말씀에서도 ‘한 여인’에다 비유하고 계시지요. 흔히 이런 것을 ‘알레고리’라고도 합니다.
1절, 그 시작에서 이 이야기는 한 여인의 어린시절, 핏덩이적 부터 이야기합니다. 바로 예루살렘이 그 여인으로 비유되는데, 3-5절은 예루살렘의 뿌리, 그가 과연 어떤 존재였는지를 이야기하지요. 하나님의 집, 이스라엘 백성의 영광스러운 언약의 집이라는 기억에 대비될 정도로, 예루살렘의 기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정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근본은 가나안,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 어머니는 헷 사람이었다. 심지어 아무도 돌보지 않던 땅,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던 땅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 누구도 탯줄을 잘라주지 않고, 소금 뿌려 정결하게 하지 않고, 강보에 싸지도 않은 채 돌보아 주는 이 없이 들에 버려진 존재, 그것이 예루살렘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런 예루살렘을 주님은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있으라.’ 문자 그대로 ‘은혜’로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거두십니다. 아무도 보살피지 않고 부정한채 내버려진 존재를 하나님이 그 품에 품으신 것이지요. 마치 신명기 7장의 선포를 떠올리는 듯 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속량하셨나니”(신 7:6-7)
따지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그렇게 찾아오셨습니다. 전적인 은혜, 전적인 긍휼, 전적인 사랑으로 말이지요. 우리는 그렇게 십자가 위에서 손을 내미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요. ‘피투성이라도 살아있으라’ 누가 우리를 귀히 여겼습니까, 누가 우리를 보살펴주었습니까, 누가 우리의 영혼의 신음에 귀를 기울였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그 자비와 긍휼과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문자 그대로 완전한 은혜로 말이지요. 그 은혜가 성도 여러분의 오늘 하루 영혼을 새롭게 하시길 축복합니다.
에스겔 16장은 바로 그 여인의 일대기를 전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거두시고, 품으시고, 보살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라나 누구라도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지요. 그때 그가 신의를 저버립니다. 어제 15장에서 우리가 읽었던 ‘범법했다’는 그 표현처럼, 헌신된 관계를 저버린 것입니다.
16장은 한 여인의 비유를 통해 유다 예루살렘, 이스라엘 언약 백성의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그가 얼마나 범법하였는지, 그리고 그 범법함이 얼마나 비틀린 것이었는지, 그 죄악이 사마리아성과 소돔성과 비교됩니다. 우리도 그렇듯이 예수님 시대에도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할 성읍, 죄악의 대명사로 쓰였습니다. 에스겔 당시에도 그랬던 것으로 보이지요. ‘사마리아성’은 어떨까요?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두 눈으로 보았던 남유다 백성들에게 그 성은 그들의 심판을 자초한 원인이었습니다. 온갖 우상숭배와 배교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헌신짝처럼 버린 성이었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47, 51절과 52절을 보면 예루살렘은 그보다 더 심하다, 소돔과 사마리아보다 더 죄악을 저질렀다,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제 본문과 더불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선택하시고 기대하신 것, 포도나무를 옮겨 심고 정성스럽게 가꾸고 돌보셨던 것, 오늘 이야기에서처럼 피투성이인채 버려진 한 아이를 주어다가 긍휼과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폈던 것, 그 모든 은혜 속에 하나님 기대하신 것 무엇입니까? 그 구체적인 내용을 소돔과 사마리아, 그리고 예루살렘을 비교하는 말씀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고 기대하신 것,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신실하게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온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가 강 같이 흐르고, 공의가 꽃피우도록 하는 것입니다. 온전하게 예배함으로써 합당한 사랑을 올려드리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고 정의를 행하여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궁핍한 자들을 돕는 것, 그렇게 하나님의 다스림을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대하셨던 한 가지이지요. 그러나 결론은 무엇입니까? 소돔과 사마리아의 죄악보다도 더 악한 성 예루살렘이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사마리아나 소돔보다 더 나은 열매를 맺고 있을까요? 우리는 충분히 하나님을 사랑하며, 충분히 주변의 이웃들을 살피며, 핏덩어리째 버려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주님처럼, 긍휼히 여기고 있을까요? 다시금 주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의 죄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여기에 죄 용서 외에 다른 것을 넣더라도 주님의 말씀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준 것 같이, 우리의 필요를 돌보아 주시고’, ‘우리가 궁핍한 자들을 긍휼히 여긴 것 같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어쩌면 우리도 그 피투성이었던 예루살렘과 같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사마리아와 소돔보다 더 나을 것 없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다시 은혜의 해를 비추어주십니다. 60절 이하 말씀입니다.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 내가 여호와인줄 네가 알게 하리니’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연약함보다 더 크십니다. 그러나 그 은혜와 신실하심을 아는 사람들에게 구하시는 것은 참된 충성, 참된 헌신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지요. 피투성이인채 내버려진 우리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다 알기를 소원합니다. 그 은혜에 합당하게 응답하는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 답게 오늘 하루 승리하시는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제목/마침기도

말씀을 생각하며
하나님, 우리를 택하시고 긍휼하게 여기시는 그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사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신실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 신실할 수 있는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으시는 열매가 사랑과 공의의, 정의의 열매임을 알고서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과 정의를 행하는 용기를 주옵소서.
교회를 위하여
금요예배를 위하여 - 성령의 충만한 은혜와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 마음을 깨닫고, 함께 주님의 뜻에 응답할 수 있도록
주일예배를 위하여 - 모든 예배에서 온전히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모든 성도들이 말씀을 통해 새롭게 변화되고 빚어지는 성령의 역사가 있도록
내일 영유아 유치부, 좋은 일기를 주시고, 다음주 아동부 ‘구원구원 여호와 라파’, 청소년부 -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는 은혜, 주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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