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6 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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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16–23 NKRV
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날마다 변론하니(16-21)] 바울은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하던 중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어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 아덴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베뢰아에서 아덴까지는 약 320km 거리였습니다.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계속 남아 복음을 전하고 있었고 바울은 베뢰아의 교우들과 함께 아덴으로 향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는 핍박으로 인해 바울의 선교팀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나뉘게 된 것처럼 보이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으신 주님께서는 고대 그리스의 수도이며 헬라 문화의 중심지이자 세계의 철학과 지성을 선도했던 아덴에 복음을 상륙시키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그리스 신들의 도시 아덴에서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선포하시고 모든 우상 숭배를 경고하셨으며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탐험가나 여행자들이 처음 방문한 장소에서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올 수 있도록 표식을 해둔 것을 랜드마크(Landmark)라고 불렀습니다. 랜드마크는 오늘날 그 의미가 확장되어 어떤 장소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나 조형물을 뜻하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는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아크로폴리스(Acropolis)라는 공간을 마련하여 그 도시의 신을 예배하는 신전을 건축하였습니다. 아덴의 랜드마크는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일 것입니다. 오늘날 기둥만 남아 있는 파르테논 신전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제1호인 동시에 유네스코의 심벌마크이기도 합니다. 현대의 사람들 눈에도 감탄과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아덴의 신전과 각종 건축물들은 당시 아덴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도시의 위용을 뽐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는 동안 파르테논 신전을 포함한 도시 곳곳을 보며 아덴의 문화와 지혜에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덴에 만연한 우상 숭배를 보며 마음에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바울 속에 있는 그의 영이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보는이로 하여금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그 건축물을 보며 바울이 느꼈던 감정이 감동이 아니라 분노였던 것은 그의 미적 가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워졌으며,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영적인 의미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석학이었을 뿐 아니라 행동하는 지성으로 유대인이면서 로마의 시민권까지 가지고 있었지만,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가 영적 소경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주님의 은혜로 다시 눈을 뜨게 되었을 때 육체적인 시력만 회복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과 같이 직접적으로 이교(異敎)의 예배가 있는 곳뿐만 아니라 마땅히 하나님께서 계셔야 하는 자리에 다른 무언가가 있는 모든 문화는 우상 숭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여러 감정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우상 숭배를 하는 모습을 대할 때마다 분노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하였을 때, 북 왕국이 사마리아에서 예배 드리기 위해 또 다른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하나님은 진노하셨다고 성경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덴에서 바울이 분노했던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共感)했기 때문입니다. 교우님들께서는 최근에 언제, 무슨 일로 화가 나셨는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은 얼마나 주님과 공명(共鳴)하고 있습니까. [(17-18)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바울은 그의 마음에 일었던 분노를 파괴적으로 표출하지 않고 오히려 전도의 현장으로 지체하지 않고 나가게 하는 동력으로 삼았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분노라는 명분을 내세워 교회 밖의 사람들이 전혀 공감하지 못할 뿐 아니라 기독교를 오해하게 만들 정도로 다른 종교에 폭력과 무례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죄와 허물로 마땅히 파괴되었어야 할 우리 인생은 영벌(永罰) 대신에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힘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이 아닌 욕망을 따라 살았던 우리가 진멸되었어야 마땅한데 하나님은 독생자를 기꺼이 내어 주셨을 뿐 아니라 주님께서는 아무런 저항 없이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 바울은 복음의 내용 뿐 아니라 복음의 성격과 능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크게 공감하는 만큼 회당과 장터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당시 아덴은 세계 철학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세계를 주도하는 새로운 사상의 발상지였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고대의 이신론자들로서 우주를 창조하거나 다스리는 인격체로서의 신이 아니라 자연이나 인생에 개입이 없는 신의 존재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의 평정을 통한 행복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스토아 학파는 고대의 범신론자들로서 자연의 모든 요소들은 물론 신적 존재들까지도 불과 공기를 재료로 한 물질적 조합의 산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불은 공기가 되고 공기는 물이 되며 물은 다시 불로 돌아오는 물질의 영원한 순환이 세계 변화의 본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의미가 확장되고 재해석 되며 이어지고 있습니다. [(19-21)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두 학파의 사상은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고하는 전제와 합의를 이루었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새로운 것이었기에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으나 이내 외면받고 조롱받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말쟁이라고 일축하기도 했습니다. 말쟁이로 번역된 헬라어는  ‘지식의 파편들을 주워 모아 떠드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덴의 회당과 장터에서 복음을 전하였던 바울은 사람들에게 붙들려 아레오바고로 가게 되었습니다. 아레오바고는 ‘화성에 속한 언덕’이라는 뜻으로 화성의 신 마르스(Mars)가 그의 딸 알키페(Alcippe)를 능욕한 자를 죽인 후 살인 죄에 대해 열 두 신들을 불러 이 언덕에서 재판을 받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으로 중죄자들에 대한 재판이 이 언덕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고대의 신들이 재판하던 그곳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모든 고대의 신들과 차별되시며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아레오바고에서(22-31)] [(22-23)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신들 외에도 아덴 사람들은 혹시 그들이 알지 못해 소외되는 신들이 없도록 알지 못하는 신들을 위한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종교심이라고 번역된 원어는 ‘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종교심이 많다는 번역에 이견은 없지만, 특정 신앙을 고백하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은 종교심을 가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토속신만 800만이 넘는다고 알려진 일본이나, 전 국민 설문 조사에 스스로 무교(無敎)라고 응답한 인구가 전체 인구의 0.24%에 불과한 인도뿐 아니라 돈과 섹스와 권력 등은 의식하지 못하는 신들이 되어 사람들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힘이 되기도 하고 사람들의 목적이 되기도 합니다. 교우님들의 오랜 소원은 무엇입니까. 교우님들은 어떤 경우에 감정이 폭발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하십니까. 교우님들이 안정을 추구하는 토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No”라는 기도 응답을 주셨을 때 순종하기 힘든 부분은 무엇입니까. 특정 교회에 등록 교인 되었어도 우리 안에 숨은 우상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점검하고 우리가 평생에 예배하고 즐거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한 분 우리 주님 밖에 없음을 날마다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안에 숨은 우상이 있는지 점검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질문을 드린 것처럼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들을 위한 제단을 쌓은 것을 지나친 종교심의 차원에서만 접근했던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진리에 대한 무지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복음을 제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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