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240721 주일오후 [누가복음 24: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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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께서 빵을 건내셨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24:29-34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엠마오로 가는 길 - 절망과 낙심

오늘도 함께 말씀을 나누는 모든 분들께 우리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시길 축복합니다.
좋은 운동선수 옆에는 좋은 코치와 감독이 있지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선수라도 제3자의 자리에서 지도하고 교정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좋은 선수가 되기 어렵습니다. 아마 세상의 많은 일이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타인의 피드백을 통해서 사람들은 한층 성장할 수 있게 되지요.
그런데 목사는 예외인듯 싶습니다. 다른 사람의 피드백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피드백이 무척 드물다는 것이지요. 처음 교육전도사로 장년을 대상으로 설교를 했던 날에 당시 선임 목사님께서 두번 다시 이런 이야기할 일 없을테니 잘 들으라고 하시면서 제 설교에 대해서 피드백을 해주셨습니다. 그 이후로는 실제 다른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들어보질 못했지요.
그러다 보니 주로 가까이 있는 사람, 가족들에게나 그런 피드백을 들어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분은 목사의 가장 까다로운 선생이 가족이란 말씀도 하십니다. 지난 주 오전 설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역시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피드백을 해주었습니다. 그날 하루가 마칠 때까지 반복되었던 피드백은 ‘설교가 너무어려웠다.’ ‘말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한 주였지요. 너무 말씀으로 힘들게 해드린 것 같아서 오늘은 조금 편안하게 나누고자 그림 한 장을 가져 왔습니다.
[그림1]오늘 그림은 우리가 함께 나눈 본문을 주제로 그린 작품입니다. 이탈리아의 카라바조라는 화가가 그린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라는 작품으로 1601년에 완성되었다고 알려져 있지요. 화가의 이름은 낯설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의 다른 작품을 한번쯤은 보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림2]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 비슷한 시기에 완성된 작품으로 ‘의심하는 도마’입니다. 이 외에 ‘골리앗과 다윗’, 그리고 ‘세례 요한과 헤로디아’를 주제로 그린 작품이 유명하지요.
오늘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를 카라바조만 그린 것은 아닙니다. 중세 유럽의 많은 화가들이 성경 속 이야기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카라바조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에 주목했지요. [그림3] 카라바조보다 70년정도 전에 ‘티티안’이라는 사람도 ‘엠마오에서의 저녁 식사’를 그렸는데,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지요. 여기서 오른쪽 제자는 손을 모아 기도하는 모습을 하고 있고, 등장인물의 표정은 하나같이 감정의 변화 없이 무겁고 근엄한 느낌을 줍니다. 많은 성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예수님의 표정도 거룩한 인상을 주지요. 상당히 ‘종교적’인 느낌이 짙게 드러납니다.
[그림4]반면에 카라바조의 그림 속에서 제자들은 마치 살아있는 듯 보입니다. 역동적이고 감정이 흘러 넘치지요. [그림5] 특히나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 모습입니다. 보통의 성화에서 볼 수 있는 근엄함은 덜하고, 얼굴은 어느정도 살이 올라서 어려보이기까지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묘사한 그림들은 하나같이 주님을 앙상하고 매마르게 표현하는데 이 식탁에서의 예수님은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지요. 아마 카라바조가 부활하신 주님의 변화, 온전하게 되신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성경에서는 이 엠마오에서의 식사 장면이 짧게 묘사됩니다. 대략 29-31절 정도이지요. 이 식탁보다 성경이 길게 보여주는 것은 ‘엠마오로 가는 길’입니다. 그 길 위에서 두 제자와 예수님의 만남, 그리고 대화를 길게 보여주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왜 엠마오를 향하고 있었을까요? 지도를 보니까요, [지도1] 엠마오라는 동네가 예루살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지요. 아마 산과 산 사이의 좁은 협곡을 지나서 갈 수 있던 동네였던 것 같습니다. 왜 하필이면 ‘엠마오’로 향했을까, 하는 물음이 중요할 수 있겠지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난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지요.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왔습니다. 어째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났을까요? 누가복음 24장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여인들은 그 길로 달려가 예루살렘의 남은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전해주지만, 제자들은 이렇게 반응하지요. 11절 말씀입니다. [자막]‘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여인들의 증언을 헛소리로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아마 그들 중에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도 포함되어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두 제자의 마음을 17절과 21절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건져줄 사람이라고 바랐는데, 이미 죽은지 사흘이나 되었다.’
여인들의 부활 증언을 들은 예루살렘의 제자들, 그리고 그들과 헤어져 엠마오로 향하는 두 제자들은 실의에 빠진 것이지요. 낙심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그 메시아라고 믿었는데 죽임을 당하셨으니, 허탈하고 허무합니다. 사랑하는 선생님을 잃은 슬픔보다도 먼저 절망감이 휘감습니다. 낙심과 절망과 체념이 묻어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난 것 아닐까요?

예수: 절망과 낙심으로 눈 가려진 이들에게 내리는 은혜 - 그가 베푸는 식탁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현실이 버겁습니다. 그 버거움에 못이겨 낙심하고 체념하고 절망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눈을 가려버렸지요. 예수님은 분명히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죽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기억 깊은 곳에 파묻혀서 들려오지 않습니다.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현실에 낙심하고 절망하고 체념해 주저앉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두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낙심하고 절망하고 체념한 현실에 갇혀서 그것만 바라봅니다. 그러다보니 자신들이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지요. 아니면 카라바조가 묘사하는 것처럼, 부활하신 몸을 입으신 예수께서 전혀 다른 존재로서 등장하셨기 때문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이 책을 쓴 누가는 왜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채지 못하였는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깨닫지 못함’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어두워진 눈이 밝아지는 때가 옵니다. 깨닫지 못하는 그들이 깨닫게 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누가는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에 침묵함으로써 그 은혜를 더욱 부각시킵니다. 오늘 이 그림이 묘사하듯 30-311절은 이렇게 쓰고 있지요. [자막]“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가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았다.”(31)
여기에 믿음의 신비가 있습니다. 제가 청년때 지도해주시던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현수 형제, 믿는 것이 기적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나사렛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는 것, 그것이 기적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베푸실 수 있는 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사람 예수를 보고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면, 이미 그 믿음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향하는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낸 시간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말이지요. 그들이 자신의 현실에 스스로를 가두어두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형편, 중대한 사건과 위기, 낙심과 절망과 체념에 빠져서, 이미 주어진 말씀을 잊어버리고, 믿음으로 십자가 너머를 소망하기를 그친 이 사람들, 그래서 자기 연민으로 가득차서 예루살렘을 떠나온 이들. 그러나 주님은 그들 가운데 찾아가셔서 떡을 나누어주십니다. 그제서야 주님을 볼 수 있게 되고, 주님을 보게 된 후에야 부활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지요. 주님만이 우리에게 이 믿음과 소망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믿음은 기적’인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의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심지어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지고 실패하고 깨지고 상하더라도, 내 삶에서 빠진 구렁텅이가 너무나 깊고 넓어서, 안간힘을 쓰고 발악을 해도 그 빠진 수렁에서 건져질 길이 없어 보인다 하더라도 만일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주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심을 증언합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들께 있어 넉넉히 이기는 믿음 되시길 축복합니다.

이 식탁의 주인이 누구인가: 참여자와 방관자

이제 이렇게 보니 [그림 6]카라바조의 그림에서 두 제자의 모습이 이해가 됩니다. 어째서 카라바조가 두 제자를 이토록 역동적이고 격동적으로 그렸는지 말이지요. [그림 7] 양 팔을 쭉 뻗는 오른쪽의 제자의 모습에서 어떤 사람들은 대문자 T를 떠올리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십자가’를 표상하는 것이라고 보지요.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떡을 먹고 눈이 밝아져,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됩니다.
[그림 8] 왼쪽에 있는 제자는 어떻습니까? 그의 표정을 다 읽을 수는 없지만 자세히 보면 마치 예수님께 빨려들어갈 것처럼 몰입해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그의 행동이지요. 의자를 힘있게 붙잡은 그는 과연 예수님께 몸을 바짝 붙이기 위해 의자를 끌어당기는 것일까요, 아니면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나려고 하는 것일까요?
아마 두 가지 다 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주님이 나누어주신 떡을 먹고 눈이 밝아져 주님을 알아보고서 주님을 더 갈망하게 되는 것이지요. 바울이 ‘어떻게 해서든지 그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려고 푯대를 향하여 끝까지 달려나간’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엠마오로 가는 ‘길’에 관해서 이야기해볼까요?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나왔습니다. 그럼 엠마오가 목적지였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성경 안에서도, 또 당시 다른 문헌에서도 엠마오라는 동네가 그다지 대단할 것 없는 동네로 보입니다. [지도]아마 두 제자에게 엠마오는 목적지가 아니라 경유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만일 엠마오가 목적지가 아니라 경유지였다면 그들은 어디로 가려했던 것일까?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도망쳐 배를 타기 위해 항구도시 욥바로 가려고 했던 것처럼, 이 두 사람도 예루살렘을 등지고 배를 타기 위해 엠마오를 지나치고 있던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등지고 나선 것은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기대가 꺾여 낙심했기 때문이지요. 그런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누어주신 은혜가 그들의 눈을 뜨게 만들었지요. 그리고 두 사람은 변화됩니다. 자신들의 실패와 체념을 딛고, 자기 연민을 벗어버리고 일어서서 그 부르심을 향해 달려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들은 이제 가야할 곳으로 가게 됩니다. 33절에 이렇게 쓰고 있지요.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33)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 그 부활의 증인으로서 예루살렘을 향해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새로운 소명을 맞이하게 되겠지요. 사도행전 1장 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며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서 우리가 변화된 존재로 사는 것 역시 은혜이지요. 그 부활을 마주함으로써 우리는 절망과 낙심과 체념에서 소망을 얻습니다. 소망을 얻을 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여 우리 자신을 끌어당기고 움직이도록 하는 힘, 하나님의 부르심, 곧 소명을 얻게 되지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생명을 나누어 갖고, 그 부르심에 사로잡힙니다. [그림9]마치 두 제자들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이 그림에서 눈에 띄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선포되는 이 놀라운 역사의 현장에서 아무런 동요도, 감흥도 없이 무표정하게 서있는 사람입니다. [그림10]이 사람은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있지 않은 사람이지요. 그 자리에 있지만 그 자리에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식탁에서 소외시키고 있습니다. 두 제자의 얼굴과 그의 표정은 완전히 대비되지요. 꾹 다문 입술, 어떤 감정의 변화도 없는 무표정함, 어떻게 보면 식당을 소란스럽게 하는 한 무리의 손님들에게 화가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표정.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그는 양 손으로 허리띠를 부여잡고 위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그의 표정과 몸짓으로 보여주는 이 모든 것은 그가 이 식탁에서 일어나는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아무런 감흥없이, 아무일도 아닌 듯히 무감하게 지나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이루어가시는데 그 일에 참여하지 않고, 무관심하면서 스스로를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라도 걸릴 수 있는 영혼의 병이지요. 어느 것에도 관심하지 않고, 어느 것에도 동요하지 않고, 어느 것에도 참여하지 않는 것, 그렇게 당신 앞에 나타난 하나님께 자신을 소외시키고 오로지 자신만을 아는 것,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찾아올 수 있는 영혼의 감기와 같은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 분명히 믿음은 기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은혜 없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부활하신 분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전적인 은혜이지요. 그러나 반대쪽에서도 사건은 일어납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해 은혜의 손길을 내미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관계시키는 것, 우리도 손을 내밀어 붙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마지막에서 주님이 말씀하시지요. ‘나는 문 밖에 서서 두드린다. 누구든지 그 문을 열기만 하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서 나는 그와, 그는 나와 더불어 먹을 것이다.’ 주님이 문을 두드리실 때, 그 문을 열어 맞이하는 것은 우리의 일입니다. 카라바조가 그린 이 식탁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초월적인 은혜와, 그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참여와 응답, 그리고 결단 사이에서 일어나는 어떤 역동적인 사건을 이 그림은 보여주고 있지요. 그 만남 안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생명이 움틉니다. 소망에 닻을 내린 소명이 주어집니다. [그림 11] 그래서 오늘 주님은 손을 내미십니다. 액자 바깥에 있는 우리에게 거기 가만히 서있지 말고 이 손을 붙잡으라는 듯이 말이지요. 거기 멀찍이 서있지 말고, 와서 이 식탁에 참여해 나의 빵을 먹으라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만일 우리 삶의 문제들에 천착해서 우리 삶 가운데 이루어지는 기적의 사건을 무관심하게 지나간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엠마오를 향해 가던 제자들처럼 그 길로 갈 것입니다. 절망과 낙심과 체념에 사로잡힌채로, 본래 부르신 그 자리를 벗어나고 떠난채 말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 기적으로 찾아오십니다. 믿음이라는 기적으로 말이지요. 그리고 손을 내미십니다. 그 손을 잡고 그분이 베푸시는 식탁에 참여한다면 우리도 밝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시선으로 우리의 절망과 낙심과 체념 가운데서 새로운 소망과 소명을 얻을 수 있겠지요.
그 손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에 믿음이란 기적으로 찾아오시는 주님께 응답하실 수 있기를 권면합니다. 그리하여 이제 다시 일어나 우리가 가야할 곳, 우리의 소명이 주어진 곳에서 하나님의 충만하신 신비 속에 살아가시는 복된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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