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31-38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3 viewsNotes
Transcript
계명의 의미 / 다른 시각을 가지라
계명의 의미 / 다른 시각을 가지라
오늘 본문은 기독교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본문입니다. 사실 본문이 알려졌다기 보다는 교리로 체계화 되었고 기독교의 정수라고 말하는 부분이죠.
34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사랑하라’입니다. 모두가 잘 알지만 이어지는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는 말씀까지 잘 연결해서 아는 경우가 드물고 또한 새 계명의 위치가 어떤 상황에서 말씀하신 것까지 아시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요한복음을 계속해서 살폈기 때문에 지금 유월절 즉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께서 제자의 발을 씻기시고 그런 중에 배신을 결심한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기 위해 나간 후라는 시간입니다.
‘내가 사랑한 것 같이’라는 말씀에는 요한복음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부터 이 땅에 오시고 어떻게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것이 들어가 있는 것이죠. 이런 맥락을 두고 본문을 살펴보고 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새 계명이자 기독교인의 삶에 정수가 되는지 살피고자 합니다.
가룟 유다는 배신했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떠난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팔고자 지도자들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그 후에라는 시간적 표현은 먼저는 순서적 의미를 설명하겠지만 내가 있는 자리와 없는 자리로 구분되는 한계적 시간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내가 없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매우 불안해 하지 않습니까? 내가 없을 때 나를 욕하는 정도가 아니라 어떤 일이 결정된다면 특히 배신감은 더 할 것입니다. 공무원들 사회가 그런면이 강하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식사를 잘 하지 않고 함께 식사를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없는 사이에 자기 이야기 또는 어떤 결정이나 중요한 일이 공유되기에 그로 인해 승진에서 누락될까 두려워 해서라고 합니다. 비록 가룟 유다가 배신의 길로 갔다고해서 남은 제자들이야 말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베드로는 곧 이어서 예수를 부인할 사람으로 지목되고, 나중에 등장하는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아 제자들이 모인 곳에 참석하지도 않았고 어떤 제자들은 떠나 엠마오로 가던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무대의 조명은 목숨까지 내어주시는 예수님께 더 집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제거 된 자리에서 예수께서는 뜻밖에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 그리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받았다는 두 단어 모두 ‘수동형’입니다. 예수를 팔러 간 유다 그리고 그들이 찾아와 예수를 체포하는 한편의 시간이 흐르는 시점은 마치 정해진 역사의 수레 바퀴가 교차해 다른 시간을 흐르게 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 시간은 제자들과 함께 계신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실 시간’이자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시간’이라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영광은 창세전 하나님께서 가지셨던 영광이며 마지막 모든 피조세계가 다시 돌려드려야 할 영광입니다. 지음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배신을 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통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뜻을 따라 예수께서는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신 시점을 맞이한 것입니다. 지난 주 수요일에 경기예고 정기 연주회에서 합창곡을 바흐의 교향곡으로 했는데 바흐는 25년에 걸쳐 미사곡인 비단조 BWV 232를 만들었고 마태수난곡과 더불어 최고의 교향곡으로 대표되고 있습니다. 교향곡 시작을 키리에 즉 자비를 구하는 간구로 시작해 두번째 파트에서 글로리아 즉 대영광송이라는 표제를 달고 시작할 때 첫 번째가 Gloria in excelsis Deo (글로리아 인 엑셀시스 데오/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제목인데 이는 누가복음 2:14 “14 지극히 높은 곳에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는 말씀을 배경에 두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생각을 해보면 예수께서 ‘지금이 영광을 받는 시간’이라는 선포는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는 가룟 유다의 시간은 사단의 시간입니다. 앞서 12장까지 등장한 인물은 1장부터 개인을 부르시고 군중들 속에서도 개인들을 불러 내셨습니다. 그럼에도 세례 요한의 증언으로 믿었다는 사람이 많았다고 10장 말미에 기록했고 그 사이 계속해서 예수는 유대인이라 불리는 무리들과 치열한 논쟁을 펼치고 그들은 계속해서 예수께서 메시아이신가를 궁금해 했고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을 통해 많은 유대인들도 믿었다고 기록하며 이제 무리는 예수를 열광적으로 맞이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시간에 머무를 뿐 예수께서 알려주신 ‘때’를 넘어오지 못했습니다. 이런 모든 시간은 한 점을 향해 왔다는 것을 요한 저자는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앞선 ‘글로리아 인 엑셀시스 데오’가 누가에게 예수께서 태어나는 순간 천사들의 선포가 영광의 순간이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영광 그 자체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순간보다 더 큰 영광의 순간은 창세 전부터 구속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 역사의 사건이 ‘지금’ 가룟 유다의 배신과 예수를 팔아 넘기는 현실의 기계적 시간과 이를 아시는 예수님의 ‘지금’이라는 말씀을 통해 교차되는 찰나의 시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 예수께서는 자기를 일컫는 고유적 표현인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는 ‘신적 고지’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두고 봅시다’ 정도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지금’을 정의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지금’을 정의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저자 요한은 사람의 증언, 천사의 고지도 예수의 직접적인 말씀 앞에서는 후순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요한이 우리에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이를 믿는다는 의미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로 바꿔주는 것입니다. 믿게 되는 동인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이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모든 것을 통해 깨닫게 해주셔서 우리는 두려움 없이 믿음의 길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향해 기다리십니다. 때론 제자의 배신도 괴롭게 받으시는 분이시며,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지금’을 정의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구할 때 ‘올려 드림’이 되는 이유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정의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관공서에서 신분증을 만들거나 필요한 일을 볼 때 거기에 맞는 서식를 기록함으로 요구를 합니다. 즉 공적인 업무로써의 효력이 발생하듯 예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한 시점 뿐만 아니라 전체를 정의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행함으로 인해서 비록 인간의 시간을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시간을 사는 것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두 번째가 이러한 영광 받으심이 ‘하나님과 예수님’사이에서 상호적으로 일어나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앞서 설명드린 구원의 계획자 이신 성부 하나님 그리고 계획의 집행자이신 성자 예수님의 사건입니다. 비록 얼마 후 있을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은 인간의 시간에서는 로마를 반역한 유대인의 왕이라 불린 자의 처참한 죽으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개국을 선포하는 신호탄이자 그 문이 활짝 열리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살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앞길이 활짝 열리는 시간을 경험했다’는 어색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럼에도 그말을 들으면 무슨 말인지 이해합니다. 그런 경험으로 삶의 방향이 바뀐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짜릿한 경험이 전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바뀐 길로 걸어 인내의 시간을 견디며 훈련하고 노력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죠.
제자들에게 선언된 ‘지금’의 순간을 선언해 주시는 것은 말 그대로 이제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은 세상의 길이 아닌 하나님의 길이자 영광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눈에는 여전히 현실의 길만 보입니다. 33절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떠나지만 떠나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헤어짐은 3일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40일을 그후에는 성령께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원래 사랑하는 사이는 그렇습니다. 하루의 헤어짐도 마음 한 구석에서 보고싶음이 깃들어 나 자신을 모두 적셔 버립니다. 그래서 인생의 길에서 만나는 어쩔 수 없는 이별 앞에서 자신을 모두 적셔 버리는 고통의 늪에서 유일하게 예수께서 정의하신 시간의 길을 따라 다시 만날 약속을 의지하며 고통의 늪에서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제자들은 예수께서 가신 곳은 제자들은 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아직은’입니다. ‘아직은’ 우리가 견뎌야 할 길이자 시간입니다. 새 계명이 필요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구약은 오랜 시간 하나님께서 백성과 왕의 관계에서 율법을 주셨음을 기록하고 있고 이스라엘 백성은 지켜야할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했지만 토라의 삶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럴 때 마다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약속을 갱신하셔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습니다. 몇 번이라도 약속을 바꿔 진노를 물러 주셨습니다. 기회를 주신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제 영원히 변치 않을 약속을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세우신 것이죠. 이것을 바울은 로마서 1:17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라고 했고 계속해서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고백합니다. 꼭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왕과 백성의 관계에서 율법을 지킬 때 ‘의롭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실패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관계로 바꿔 주시고 돌판에 새겨 주신 율법은 이제 우리 마음 판에 새겨 변하지 않도록 해주시는 불변하고 영원한 약속으로 완전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죠. 세상은 늘 업그레이드 되지 않으면 바이러스에 뚫리고 구버전이 되면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새 계명’은 여전히 우리의 모든 것을 담아도 부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그래서 위대한 명령인 것이죠.
그렇다면 계명은 무엇일까요? 계명은 약속된 자들의 특권입니다.
물론 약속은 그 자체로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약속된 내용의 의미가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부모가 아이에게 선물을 주기로 약속을 했다면 선물을 기대하는 마음과 약속에 대한 기대가 함께 있겠죠. 그러나 아이들은 선물에 대한 기대가 더 클 것입니다. 아이니까요? 그렇게 성장해서 약속을 하다보면 누구와 약속을 했는가 하는 신뢰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지 않습니까? 부모는 자녀이기 때문에 약속을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녀이기 때문에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신 새 계명이 ‘서로 사랑하라’는 아주 짧은 말씀이지만 세상의 방식이 아닌 예수께서 보여주신 방식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입니다. 새 계명은 15:9절부터 16절까지 본문보다 자세하게 나옵니다. 9절부터 ’아버지게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시작하는 말씀은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이라는 예를 들고 14절에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라고 이어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명한대로’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랑하라고 명하셨다는 의도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이죠. (나중에)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의 죽으심에 대해 깨닫지 못한 상태입니다. 오랜 시간 예수님 안에 있다고 자청하는 우리도 복음의 깊이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있는지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하는 것이죠. 제자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예수의 부재로 인해 일어날 공허의 두려움에 빠져 바로 이어지는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부인과 같은 일들이 실제적으로 일어날 것에 대한 확실한 가르침이 필요했습니다. 어느 영화에서 보면 죽음을 앞든 이들이 ‘남겨질 가족을 부탁하네’, ‘나라를 위해 싸웠다고 전해주게’ 처럼 대사를 남깁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많은 사람들의 통화와 메시지를 분석했더니 대다수의 내용이 ‘사랑한다’,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전해달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본문은 그럼에도 ‘새 계명’ 발표와 함께 베드로의 부인도 예수께서 직접 경고하는 장면은 의외입니다. 저자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실제 우리의 시간에는 이런 일이 허다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길을 따라 가려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갈 수 없다’라고 했던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자신을 먼저 드러내는 성정을 가진 인물입니다.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다’고 까지 말합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사람을 모으고 로마군과 싸움을 벌이는 현장에 나갔더라면 베드로는 누구보다 앞장서 싸움에 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38절에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는 표현은 ‘아니다’라는 전제를 의미하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진실로 진실로’ 는 무엇을 의미지하는지 이제는 감을 잡으셨을 것입니다. 반드시 일어나는 신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이죠.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처럼 말이죠. 예언된 내용은 불과 몇 시간 후면 일어날 일이며 성취가 됩니다. 그만큼 급박합니다. 예수에 대한 하늘의 시간은 창세전부터 시작해 ‘지금’ 일어난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시간을 담고 있다면 베드로를 향한 ‘진실로 진실로’는 얼마 후 바로 일어날 예언이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시간을 정의하신다는 말씀은 이렇게 증명되고 있습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게 될 것이이다.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현재의 정의를 말씀과 함께 하시는 분의 권위를 우리는 의식해야 합니다. 예수를 팔기 위해 자리를 떠나 지금 유대 지도자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가룟 유다처럼 베드로도 주님의 길과 다른 길을 가려고 하지만 자신도 모르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고’, 예수께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베드로의 시간을 이미 알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할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을 부정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를 불쌓이 여기시고 주님을 부인하지 않게 도와 주세요’ 여야 합니다. 새 계명과 베드로의 부인은 이렇게 연결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부터 예수께서 오셨던 2천년 전 팔레스타인으로 부터 2024년을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 여전히 역사하시는 말씀이자 말씀을 듣고 가룟 유다의 길, 베드로의 길, 예수께서 명하신 사랑의 길로 우리 앞에 놓여져 있고 성경은 분명하게 사랑의 길로 안내합니다. 우리는 어느 길로 가야 할까요?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하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약속하지만 약속을 실행할 능력이 없는 한계에 갇혀 사는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지금을 정의하고 규정하실 뿐만 아니라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미래를 규정하시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제가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주님을 의지해 기도하고 사랑의 길로 걸어 가야 합니다.
이땅을 오고 간 인류 역사의 유명한 사람을 현인으로 부르고 그들의 사상을 오늘의 삶에서 살아 보려고 합니다. ‘오십에 읽는 장자’ 등/ 그럼에도 유일하게 안되는 것이 바로 ‘믿음의 대상’입니다. 이웃 종교인 불교가 부처를 믿는다라고 말해도 부처가 말한 내용의 깨달음을 통해 자신이 부처 세계에 있음을 아는 것이지 부처를 믿음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을 담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예수’는 말씀을 통해 예수를 알고 앎이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 안에서 경험되어 알게 되고 생명의 지식으로 도약됩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결정적 순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의 힘이 순간 다른 힘으로 변화되어 나타나는 것을 도약한다라고 말하죠.
말씀을 정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