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721 청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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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빛

열왕기하 14:1–16 (NKRV)
1 이스라엘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 제이년에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니
2 그가 왕이 된 때에 나이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호앗단이요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3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
4 오직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5 나라가 그의 손에 굳게 서매 그의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죽였으나
6 왕을 죽인 자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버지로 말미암아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사람마다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
7 아마샤가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명을 죽이고 또 전쟁을 하여 셀라를 취하고 이름을 욕드엘이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러하니라
8 아마샤가 예후의 손자 여호아하스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오라 우리가 서로 대면하자 한지라
9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유다의 왕 아마샤에게 사람을 보내 이르되 레바논 가시나무가 레바논 백향목에게 전갈을 보내어 이르기를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라 하였더니 레바논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
10 네가 에돔을 쳐서 파하였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니 스스로 영광을 삼아 왕궁에나 네 집으로 돌아가라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 하나
11 아마샤가 듣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올라와서 그와 유다의 왕 아마샤가 유다의 벧세메스에서 대면하였더니
12 유다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한지라
13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벧세메스에서 아하시야의 손자 요아스의 아들 유다 왕 아마샤를 사로잡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을 헐고
14 또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 은과 모든 기명을 탈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고서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15 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그의 업적과 또 유다의 왕 아마샤와 싸운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6 요아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이스라엘 왕들과 사마리아에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로보암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마샤도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도의 삶은 아니었다.
우리는 언제나 적당히가 문제이다. 내가 생각했을 때 내가 판단 했을 때가 아니라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왕들을 판단하실 때 기준이 되는 사람이 바로 다윗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아마샤가 다윗과 같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산당을 파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당은 가나안 종교의 숭배 장소이다. 그래서 산당은 산위에 있다. 이유는 높은 곳에 있어야 자신이 섬기는 신과 가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에 사무엘도 솔로몬도 산당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그것은 성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이 계신곳이 거룩한 곳이 되기에 산당에서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이 받으신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고 약속한 장소인 성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당을 간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교회가 있는데 하나님은 아무곳이나 있지… 하면서 법당에 가서 예배를 드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당시에도 그들이 성전이 아닌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약속하신 장소는 성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교회라는 장소는 중요하지 않지만 중요하다. 우리가 매주 시간을 정해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나의 삶속에서 그무엇보다도 주님을 존귀히 여긴다는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매주 시간을 정해 이자리에 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시간을 정해 무슨일이 있어도 교회로 발걸음을 옮긴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내 마음대로 내 편의대로 예배의 시간을 바꾸는 것을 우리는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간관계 가운데서도 이미 나와 잡은 약속을 깨고 다른 모임을 가는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서운하겠는가?
아마샤가 이처럼 산당은 없애지 않은 이유는 이것을 없애면 자신의 왕권이 흔들릴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에게 유익이 되기 위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산당을 없애지 않은 것이다. 아마샤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샤는 잘 살아간다. 우리는 이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자신이 계획한대로 왕이 되어 나라가 안정이 되고, 자신이 계획한대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신복들을 잡아 죽인다. 그런데 또 율법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 원수를 당사자들에게만 갚는다. 그래서 신복의 자녀들은 살려둔다.
그리고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둔다.
하나님 보시기에 왕들의 기준이 누구라고 하였는가? 다윗이다.
그런데 하나님만 그렇겠는가? 아니다. 당시의 왕들도 다윗왕과 자신을 수없이 비교 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도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다윗왕은 위대한 왕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국기에도 다윗의 별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아마샤가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둔다. 이것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 할지 모르겠지만, 과거에 다윗도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에 대해 큰 승리를 거둔 적이 있다. 그러기에 아마샤는 이렇게 생각 했을 수 있다.
내가 그래도 선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아버지를 죽인 신복들만 죽이고 자녀들을 살려두었으니깐, 그리고 나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으니깐 지금 에돔과의 전쟁까지 승리하게 하셨지!! 라고 생각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마치 다윗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승승장구 하는 아마샤가 가만히 있는 북 이스라엘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편인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신이 마치 다윗왕이라도 되는 것 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산당도 없애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랬더니 당시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이렇게 말한다. 본문 10절이다.
열왕기하 14:10 (NKRV)
10 네가 에돔을 쳐서 파하였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니 스스로 영광을 삼아 왕궁에나 네 집으로 돌아가라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 하나
에돔을 쳐서 이긴것으로 마음이 교만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니깐 아마샤는 교만한 것이다. 자신의 뜻대로 다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편인것 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지금 나의 상황이 다시말해 내가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고, 내 계획대로 일이 술술 풀린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축복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가 기도 열심히 했더니, 내가 찬양 열심히 했더니 내게 좋은 일이 생겼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순간순간을 감사해야 한다. 하지만 그럴때 조심해야 할 것은 “내가 했어”, “우리가 했어” 라는 마음이다.
내가 기도했더니, 우리가 기도했더니… 여러분 이런 믿음은 위험하다. 이런 믿음이 어떻게 변질 되는지 아는가?
저 목사님한테 기도 받으면 다 된다. 저 권사님 한테 기도받으면 다 낫는다. 위험한 믿음이다. 옳지 않는 믿음이다.
내 삶이 세상적으로 술술 잘 풀린다고 하나님이 나에게 축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늘 나의 삶을 점검하고 우리의 연약함까지도 사랑하시는 우리가 죄가운데 허우적 거리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보고 더럽다고 우리를 밀치시는 분이 아니라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끝까지 기다리고 기회를 주시는 분임이 깨달아져 그져 감사 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든 그저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죄덩어리인 나를 꼭 끌어안으시며 사랑하신다 말씀하시는 그 사랑을 모르는 이들에게 전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인 것이다.
우리는 빛이 될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날빛이다.
날빛 : 햇빛을 받아서 나는 오 세상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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