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5-긍휼자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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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자복의
긍휼자복의
마태복음 5:7 “7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개역개정에서는, 긍휼히 여기는자는 긍휼히여김받는다.
메세지에서는 남을 돌보는 너희는..너희도 돌봄을 받는다.
새한글성경에서는 불쌍히 여기는 사람..불쌍히 여김을 바든다.
한국초대교회사에 인천에서 선교사역하던 존스선교사가 미국으로 보낸 선교편지에 담긴 이야기다.
강화읍에 살던 팔십이 넘은 김씨 부인이 복섬이라는 여종을 데리고 살았다.
김씨 부인이 예수를 믿고 한글을 배워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성경이 깨달아지기 시작하는데
자신의 죄를 깨닫고 큰 결심을 한다. 복섬이 여종을 불러서 마태복음을 펼쳐놓고 18장 15절 22절(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말씀)을 같이 읽고는 종 계약문서를 가지고 와서 태워버리고 “이제부터는 종이 아니라 너는 내 딸이다”
복섬이는 그날부터 김씨부인을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자비, 긍휼, 불쌍히여기는 것, 남을 돌보는것이라는 말로 일맥상통한다.
자비는 하나님아버지의 대표적인 속성이다.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성품이다.
출애굽기 34:6–7 (NKSV)
6 주님께서 모세의 앞으로 지나가시면서 선포하셨다.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7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나는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한다.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느헤미야 9:17 (우리말성경)
17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고 주께서 그들 가운데 일으키신 기적을 곧 잊었습니다. 그들은 목이 곧아져 거역하고 우두머리를 세워 종살이하던 곳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요, 은혜와 긍휼이 많으시며 더디 화내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에 그들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비, 긍휼, 인자하심이 많은 분이다. 우리가 잘아는 언어가 헤세드라고도 말을 한다.
출애굽기의 말씀으로 보면 자비를 말씀하면서
출애굽기 34:7 “7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나는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한다.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죄를 지으면 삼사대 자손까지 벌을 내린다고 경고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까지 가는가 수천대까지 간다. 아무리 우리가 죄를 지어도 벌을 받아도 하나님의 사랑이 훨씬더 압도적이어서 이것을 덮어버린다.
출애굽한 후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배반한다. 하나님을 실망시킨다. 하나님의 그의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신다. 그들이 회개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다시 그들을 안아주신다.
호세아 11:8 (NKSV)
8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원수의 손에 넘기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버리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너를 버리려고 하여도, 나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구나.
하나님은 긍휼이 흘러넘쳐서 주체하시지 못해서 연약한 우리를 향하신다.
하나님이 죄악을 미워하시고 심판하신다는 약속아래 이 죄악으로 물들어버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핵심 성품인 긍휼, 자비, 인자하심을 베풀기로 결정하시고 실행에 옮기셨다.
그 일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긍휼을 증거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실천하게 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가장 핵심 성품을 발휘하도록 하셨다.
예수님은 가장 천대받는 사람들의 몸을 고치고 마음을 고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런 자비를 불편하고 싫어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구약에서는 요나(김동일목사님) 신약에서는 바리새인들이다. 제자들이 안식일날 배가고파서 벼 이삭을 잘라 먹었더니정죄를 한다.
그러자 예수님이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12:1–8 (NKSV)
1 그 무렵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서 먹기 시작하였다.
2 바리새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굶주렸을 때에, 다윗이 어떻게 했는지를, 너희는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4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단에 차려 놓은 빵을 먹지 않았느냐? 그것은 오직 제사장들 밖에는, 자기도 그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5 또 안식일에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안식일을 범해도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책에서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너희가 죄 없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어떻게 죽일지 의논하기 시작했다.
마태복음 12:14 (NKSV)
14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서,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자비의 반댓말이 무엇일까. 예수님의 대답에 의하면 제사가 된다. 자비를 구한다는 것은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비가 필요한 자들, 가장 천대받고 손가락질하는 세리, 문둥병자, 죄인들과 같은 급이 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자비를 구하는 것 보다 제사를 지내는 것이 훨씬 더 편했다. 예수님은 자비한 삶을 살지 않고 제사, 예배, 자신의 외적인 경건에만 몰두하는 그들에게 제사보다 자비를 원한다고 한 것이다.
예수님의 달란트비유를 보자. 주인에게 만달란트의 빚을 졌는데 탕감을 받는다. 그런데 자신에게 백데라니온 빚진자들을 감옥에 쳐 넣는다. 자신이 탕감받은 금액의 0.00017퍼센트밖에 안되는데 무자비하게 행한다.
자신 받은 자비와 용서에 비해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다른 이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예수님은 마18:33
마태복음 18:33 (NKSV)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자비하길 바라는 하나님의 기대를 채우기위해 우리를 예배에 몰두한다. 긍휼과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 주변에 즐비한데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기 보다 동정만 한다. 하나님을 몰라서 그래. … 그리고는 예배를 드리면서 이렇게하면 하나님 기뻐할까 저렇게하면 하나님 기뻐할까…그러니까 건물을 높이 쌓아올리고 예배당 안을 화려하게 꾸미고 예배 분위기를 좋게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서도 오로지 자신의 앞날만을 위해서 통크게 준비하는데 베푸는 것의 대해서는 얼마나 인색하고 계산이 많은지… 교회만 오면 이 천원짜리가 너무 커보인다고 하잖아요. 아주 약간의 헌금이나 봉사면 하나님께 해야 될 의무를 다 하는 것처럼…
그러나 주님은 이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미가 6:6–8 (NKSV)
6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7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8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몇주전에 한국초대교회사에서 종순일목사의 이야기를 전했었다.
1900년 대한그리스도인회보 신문에 종순일이라는 사람이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서 나의 천만냥 빚을 탕감하여 주셨으니 나도 남이 내게 빚진 것을 탕감애 주겠다며 빌려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불러모아서 빚증서를 모두 태워버렸다. 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다음 이야기가 있다.
종순일씨가 목사가 되고 영종도에 있는 교회에서 시무를 하게 되었다. 그 교회에 부유하고 벼슬을 지냈던 박두병권사라는 사람에게 어떤 교인이 2천원을 빌려갔다가 못갚고 죽게 되었다. 지금시세는1억정도
이 죽은 아버지의 빚을 아들이 갚아야 된다. 갚기위해 8년정도 열심히 일해 모았지만 16원 모았다. 이런식이면 1000년이 걸린다.. 그러다가 박두병권사 집에서 구역예배가 열렸다. 빌려준 박두병과 갚아야될 교인아들이 함께 방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그러다가 아들이 기도제목을 꺼내 놓았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제가 박권사님의 빚을 갚기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16원밖에 못모았습니다. 언제 다 갚을 수 있을지 마음이 괴롭습니다.”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이 일이 1917년 5월 기독신보신문에 기록되기를
종순일목사가 마태복음 18:20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를 읽고 설교한 후에 받아야 된다는 마음과 탕감해달라는 마음이 서로 있는데 어떻게하면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 없겠는가. 마음에 거리낌없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말하자. 박권사가 2000원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자 그자리에서 다른 사람도 빚을 탕감해 주었다.
긍휼은 긍휼로 돌아온다. 자비는 자비로 돌아온다. 하나님이 오늘 여기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있다는 말이고 하나님의 자비로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며칠전 인근의 목사님이 나이 많은 노인들과 목회를 하는데 휴대폰으로 설교를 보내야 되는데 어려워한다고 글을 썼다. 마음이 계속 걸린다. 여기서 멀지 않은데, 내가 가지고 있는것 이거 하나면 되는데…. 어려운일이 아닌데… 가겠다고 썼다가 지웠다가…괜한 오지랖인가…. 그런데 마음에 계속 걸린다. 그래서 가겠다고 말하고 가지고 있던 것들을 챙기고, 십원빵을 굽고, 가는길에 젤큰 수박한덩이를 사서 갔다.
어렵게 어렵게 지내오시면서 목회스트레스로 사모님은 40후반부터 파킨슨까지 앓고 계셨다.
그분의 삶의 이야기를 쭉 듣고 있는데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이 얼마나 느껴지는지
내가 그분을 아주 작은 것 도우러 갔다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위로를 얻고 돌아왔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는 복이 있다.
“남을 돌보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렇게 정성 들여 돌보는 순간에 너희도 돌봄을 받는다. 메세지 성경
내 힘으로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하면 다 될 것 같죠. 천만에 그동안 순간 순간 누군가의 돌봄때문에 그 자리로 엉금엉금 겨우 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돌아보자 다른 사람들의 돌봄과 긍휼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런데 자기 성공인양 까맣게 잊고 산다. 예수님은 제대로 해결하지 않으면 예배보다 그것을 더 우선하라하셨다.
그렇다면 내가 더 많은 돌봄과 자비를 받길 원한다면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비를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비로 갚아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