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726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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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에서 벗어나
율법에서 벗어나
여러분 반갑습니다. 다들 한주간 잘 지내셨나요? 바로 지난 주일에 보고서 또 이렇게 만나니 더욱 반가운 것 같네요.
지난 주일 우리 모두 하나되어 29차 하임캠프를 은혜로 마무리하였습니다. 아마 각자에게 많은 기억들과 은혜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여러가지 것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다시금 저의 믿음에 부족함을 느끼도록 하셨던 것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바로 날씨였는데요, 제가 지난 준비팀 기도회 설교를 하면서도, 하나님께 맡기라,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함께하신다. 여러번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은 저조차도 부정적인 예보 탓에 여러모로 걱정이 되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저의 부족한 믿음을 꾸짖기라도 하시는 것처럼 정말 우리의 캠프 가운데 일하셔서 날씨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일이 전혀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죠.
그것을 통해 저는 다시금 나의 믿음이 부족했다는 것을, 아직도 우리 안에 세상적인 시선과 생각들이 많다는 것을 돌아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어떠셨나요. 받았던 은혜, 느꼈던 감정들 잘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아직까지 잘 가지고 있다면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만, 사실 우리는 한번 자고 일어나면 다시 또 돌아가는 부족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씀을 읽을 때마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다시금 반복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부족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죠. 주님, 저는 왜 이렇게 변화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저는 이렇게 부족한 사람일까요.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가진 우리의 모습 가운데 바울 사도가 다시금 말씀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어떤 것을 알려주시냐? 말씀이라는 것, 율법이라는 것이 원래 우리에게 그런 찔림과 죄책감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이죠.
자. 그럼 이게 대체 어떤 이야기인지를 함께 살펴보면서, 말씀 가운데 반복되는 부족한 우리의 모습을 향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야기하시는지를 확인해봅시다.
오늘 말씀 첫구절 23절에서는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하나요?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였고, 갇혀있었다고 말합니다.
시작부터 바울은 율법을 우리를 구속하는 존재로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실제로 율법이 가진 능력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율법의 말씀이란 것은 어디를 말하죠? 크게는 구약의 말씀, 좀더 좁히면 모세오경에 나타나는 여러 법조문의 말씀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한번쯤은 그 말씀들을 접해보았을거에요.
그렇다면 그 말씀들을 읽으실때마다 어떠셨나요? 읽으면서 나는 잘 지키니까 라는 자부심을 느끼셨나요? 아니면 오 뭐 이런것까지 있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셨나요?
아마도 대부분 후자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죠. 율법의 조문 하나하나를 다 살펴서 지키려고 하면 거의 삶이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유명한 율법 조문 중 하나가 바로 피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는 생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죠.
자 이 율법을 지키려면 여러분들은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순대 포기해야 하구요, 선지국 포기해야 합니다.
실제로 예전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은 순대를 먹지 말라고도 하시기도 했죠.
근데 이 중에서 그렇게 율법 지키려고 먹는 사람들은 없잖아요? 그렇습니다. 당장 이것부터도 우린 못지켜요. 그럼 어떡해요? 나의 부족함이 느껴지는거죠.
뭐 요런 것들은 우스갯소리처럼 넘길 수도 있겠지만, 사실 아주 단순하게 십계명만 보아도 우리는 다 지키지 못합니다. 이웃에게 거짓말 하지 말라고 했는데, 우리는 거짓말 다하구요, 탐내지 말라 했는데 탐심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이 율법이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절대로 좋은 마음을 주지 못하고, 반대로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마음만을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이 말하는 우리가 율법에 매이고 갇혔다라는 표현이 와닿을 수 있겠죠.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들겠죠. 율법이 그럼 나쁜 것이 아닌가. 우리가 주 안에서 자유하려면 율법이 없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우리 앞에 두 가지 말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이 두 말씀은 차례대로 예수님과 바울 사도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에서는 뭘 말하고 있나요? 율법이 없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가 않다라는 거죠.
예수님도 율법을 완전하기 위해 자신이 오셨다고 말씀하시고, 바울도 율법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깨달을 수 있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죠.
그렇습니다. 사실 율법이라는 것이 뭐에요? 사람이 만든건가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것입니다. 절대로 악하거나 우리가 벗어나야할 것일 수가 없겠죠.
그런데 우리에게 율법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율법이라는 것이 가진 능력, 즉 우리가 율법을 보면 볼 수록 스스로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면 볼수록 죄인임을 느끼고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율법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그 이유가 바로 이어지는 24절에 나타납니다.
율법이 뭐래요?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래요.
자. 초등교사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 공동체 안에도 임용 바라보시는 분들도 많이 있기는 한데, 초등 교사가 하는 역할이 뭔가요?
처음 학교라는 곳을 와서 진짜 사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한명의 사회인으로 거듭나도록 만드는 것이 초등교사의 역할이죠.
어떻게 보면 그런 역할을 율법이 해준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초등교사의 가르침이 마치 율법과 같이 진리를 보여주고 알려줘서 완벽하게 갖추지는 못하지만, 그것으로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오늘 본문에 사용된 초등교사라는 단어, 원문으로는 파이다고고스라는 단어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초등학교 선생님과는 조금 느낌이 다르다고 합니다.
말씀이 기록될 당시의 파이다고고스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부유층 가정에서 아이들의 감독과 훈육을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부드럽고 유연한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 맡은 아이들을 물리적인 힘과 체벌로 다스렸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지금의 초등교사보다는, 우리 예전에 체벌이 있던 시절 선생님들을 생각하는 것이 더 맞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도 학창시절에 체벌이 있었기 때문에 특정 선생님들을 되게 무서워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선생님이 기분이 안좋고 하면 다들 눈치보면서 안걸릴려고 하고 이런 것들이 있었죠.
율법이 바로 우리에게 이런 선생님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저 여기로 와야해~ 이쪽이 길이야! 하고 알려주시는 좋은 선생님이 아니라, 너 정말 그따구로 할래? 일로 안오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같은 느낌의 선생님이었다라는 거에요.
그렇기에 우리에게 율법이 바로 이전 구절에 나온 것처럼 우리에게 매임이 되고 갇힘이 되는 것이겠죠.
그러면 우리는 또 여기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율법이 그래야 할까요? 왜 그 선생님이 우리 반 담임이어야 하나요?
그 이유는 바로 그래야지만 나의 모습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강력한 선생님이 있어야 ‘아 내가 대단하지가 않구나,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구나’라고 하면서 선생님께 손을 내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을 보고 그것을 지켜 행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죄된 모습일 뿐이니 우리는 행위로써 아무것도 못하는구나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누굴 찾게 되는거에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본질, 믿음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25절의 말씀이 나오는 겁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이후로는, 우리가 그 엄하고 무지막지한 율법이라는 교사 아래에 있지 않을 수 있다는거에요.
왜요? 율법의 역할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유일한 길이 그리스도임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수님도 자신이 율법을 없애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다면, 지킬 수 없는 율법이라는 존재가 그저 엄한 선생님으로밖에 남을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 믿음으로 엄한 초등교사로부터 벗어난거면, 이제 우리는 더이상 죄를 느끼고 고통스러워하면 안되는 것 아닌가요? 왜 아직도 우리는 고통스럽죠?
그것은 우리가 아직 완전한 모습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아직 죄성이 남아있으니, 그 죄성이라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고통스럽게 느끼게 하는 것이죠.
하지만 믿음 이전의 그것과 지금의 우리는 다릅니다. 왜죠? 이제 우리는 자격을 얻었기 때문이죠.
바로 지난 캠프때 이야기한 하나님 나라 시민권, 오늘 말씀에서는 26절 하반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는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고, 그것을 통해 의로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연합의 증거가 바로 27절에 나타난 세례인 것이죠.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작정한 자들, 주님께서 택하셔서 아들로 삼으신 이들에게는 성령께서 그 가운데 함께하시고, 우리는 그것을 물 세례로써 확인시켜줍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거친 이들은 이전의 죄된 모든 옷을 벗고 그리스도라는 아주 새하얀 옷을 입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분명 지금은 말씀이 고통스럽게 느껴지고 그것이 참 어렵고 힘들게 여겨질 수 있겠지만, 우리는 절대 그것으로 인해 실패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29절에 나온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입고 하나가 되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또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이전 말씀에서도 나누었지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 언약하셨던 그 언약, 나와 언제나 함께하시고, 나의 자손이 별과 같이 많게 할 것이라는 그 크신 언약이 바로 우리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그 약속대로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고, 우리를 지키실 것이고, 우리를 들어 주님의 뜻에 크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계획을 따라갈 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잠시 지나쳤던 28절의 말씀이죠.
한번 읽어볼까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죠? 믿음이 있다면, 국가도, 인종도, 성별도 다 상관없이 주님 안에 우리는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죠. 바로 이 말씀이 주님이 세우신 교회를 뜻하는 것이며, 우리가 선교를 해야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절대로 어떤 특정한 조직이나 단체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의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그러한 만민의 주님을 그리 원치 않는지도 모르겠어요.
왜요? 나만의 주님, 내가 좋아하는 것만의 주님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죠.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요나이죠. 요나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만의 하나님이시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니느웨의 하나님이시기도 했죠.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도 요나와 같이 어쩌면, 나의 조직과 나의 나라와 나의 민족을 위한 하나님을 외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를 믿는 모두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음 쟤네는 굳이 구원 안하셔도 되지 않을까요?’라며 선을 긋고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자신의 맘대로, 그것도 자신의 욕심대로 재단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사랑하시지만,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나의 옆사람도 사랑하시고, 앞사람과 뒷사람도 사랑하십니다. 절대로 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근 저희 집에 누나와 조카 둘이 와있습니다. 큰애는 4살이고, 둘째는 이제 돌을 앞두고 있는데, 참 어린아이의 모습이 솔직하게 보이는 때가 많더라구요.
특히 그것이 사랑일 때에는 더 그렇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부모님이, 엄마가, 할머니가 나만 바라봐줬으면 하는거에요.
그러니 엄마나 할머니가 자기 말고 동생을 데리고 있으면, 동생 그만 보고 자기한테 오라고 합니다. 그러고 동생은 덜좋아하는 삼촌한테 가라고 하죠.
하지만 부모님은, 할머니는 자기만의 할머니가 아니죠. 둘 모두의 부모님이고 할머니에요. 그 존재는 혼자 소유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에요. 하나님도 우리가 소유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랑은 우리 존재보다 몇배나 크기에 감히 소유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를 비롯하여 이전의 많은 인간들은 그것을 소유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타난 것들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성전’이었죠.
특히 세계를 뒤흔들었던 양차대전만 해도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서양 유럽국가들은 기독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서로 이게 하나님의 뜻이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하면서 싸웠던 것이죠.
하지만 그러한 생각의 끝은 어디죠? 바로 수많은 생명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 일들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현재도 정말 이렇게 쪼갤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우리 사회는 나뉘어있습니다. 성별로, 국가로, 민족으로, 이념으로, 세대로 엄청나게 나뉘어져있죠.
그리고 우리는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 나뉘어진 그룹을 위해, 나뉘어짐을 가속화하기 위해 사용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오늘 28절과 29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하나님께 바른 믿음을 가진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자녀이고, 모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라는 이삭의 후손과 이스마엘의 후손이 서로 죽일듯이 싸우고 있죠. 심지어는 예수님의 출생지인 예루살렘은 3대 종교의 성지가 되어 그들이 서로 갈라먹고 있는 상황입니다.
주님은 과연 그것을 보고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또 우리는 그것을 보고 어떤 것들을 생각해야 할까요.
우리부터가 다시금 말씀대로 돌아와야 합니다. 세상의 갈라짐을 옹호하고 가속화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씀 아래, 믿음 아래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지금 나 자신의 삶에서 어떤 하나의 주장과 생각들에 지배되어 살아가는 모습들이 있었나요? 그것들을 다 집어치우고 그 자리에 오로지 주님과 그 말씀만을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그것들이 바로바로 바뀔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아직도 말씀을 보면 죄책감을 느끼는 것처럼요.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반드시 그리스도로 옷 입히실 것이고, 또한 우리를 통해 갈라져 싸우는 이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새하얀 옷을 선물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앞으로의 삶이 그러한 하나됨,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 우리 나라와 사회의 하나됨, 더 나아가 온 세계 열방이 주님 안에 하나되기를 희망하며 나아가는 그러한 삶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찬양 : 주 안에 우린 하나 (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