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침묵하실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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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침묵하실때
[서론]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계속 충고를 했는데도 듣지 않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가족도 친구도 잂고, 건강도 돈도 다 잃어 버렸습니다.
잘나가던 시절은 지나가고 이제는 쫓겨다니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조롱과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고서야 이럴수 없다고 하소연합니다.
누구 이야기일까요?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시드기야왕과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갑니다.
[본론]
오늘 말씀은 이들의 비참한 운명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진을 잠깐 보시겠습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예레미야의 모습입니다.
예레미야가 팔을 성경책 위에 괴고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왼쪽 옆에 보시면 뭐가 있습니까?
잘 안보이지만 예루살렘이 불타고 있고, 그 앞쪽에 작게 사람 하나가 보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시드기야 입니다.
잘 안 보이시죠?
다음 사진 보시면 알수 있습니다.
불타는 예루살렘 앞에서 시드기야가 무릎을 꿇고 두 눈을 부여 잡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뒤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이제 성경으로 돌아와서 1년 6개월 동안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에워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저주 3종 세트인 전쟁, 기근, 전염병 모두 일어났습니다.
성 안의 백성들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자식까지 잡아 먹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결국 철통같았던 예루살렘 성벽은 뚫렸고, 바벨론 군사들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바벨론 장수들은 예루살렘 중앙 대문을 차지했습니다.
마치 점령한 곳에 국기를 꽂듯 자신들이 예루살렘을 완전히 점령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거기에 앉아 군사들에게 지시를 내려 성안에 불을 지릅니다.
이 순간 시드기야 왕과 그의 신하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들은 도망가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나라가 망했는데 자기 한 목숨 살겠다고 밤중에 정신없이 도망갑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합니다.
바벨론 군사들이 뒤쫓아와 시드기야를 붙잡습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 앞으로 끌려가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그의 눈 앞에 자신의 아들들을 끌고 옵니다.
느부갓네살은 그의 눈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처참하게 죽여 버립니다.
일가친척, 귀족들도 죽음을 피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왕자들과 귀족들을 죽인 장면을 지켜본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고 그를 바벨론으로 끌고 갑니다.
그래서 처음 보셨던 그림에서 시드기야가 두 눈을 부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죽는 장면이 그가 두 눈으로 본 마지막 장면입니다.
자기 눈으로 자식들이 끔찍하게 죽는 것을 본 부모의 마음은 가히 상상할수 없습니다.
바베론 왕은 자신을 배신한 시드기야에게 최악의 고통을 안겨준 것입니다.
평생 트라우마로 남게 하려는 것입니다.
자신을 배신하고 이집트에 빌붙은 댓가를 치루게 한 것입니다.
유다와 시드기야가 이런 비극적이고 처참한 결말을 맞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유다가 약하고 바벨론이 강해서 일까요?
이 전쟁은 강대국의 침략전쟁이 아닙니다.
이 전쟁의 본질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유다가 약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이런 비극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많은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상징행위들을 통해 충격을 줘도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시드기야의 두 눈이 뽑혀 어둠에 갇히게 된 것도 불순종 때문입니다.
진리를 보아도 깨닫지 못하니 영원한 어둠 속에 들어가는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니 결국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럼 그는 왜 순종하지 않았을까요?
38장에 보면 그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를 불러 다시 한번더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때 예레미야는 지금 항복하면 나라도 왕도 살수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머뭇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항복을 반대하는 신하들과 백성들의 반응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예루살렘 성전이 결코 망하진 않을거라는 잘못된 믿음 때문입니다.
‘설마 하나님이 계신 곳을 스스로 망가뜨리실까’ 여긴 것입니다.
결국 이런 이유들로 그는 우물쭈물하다 결단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우물쭈물하는 것은 불신앙의 증거입니다.
우물쭈물하는 사람은 안 믿는 자들이 아니라 믿는 자들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평생 우물쭈물하는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살아갑니다.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게 미지근한 신앙으로 머물며 살아갑니다.
세상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회색지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들은 시드기야처럼 평안할 때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어려워 질때만 하나님을 찾습니다.
또한 자신의 성공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깁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도 도구로 사용합니다.
신앙생활을 안하는게 아닙니다.
내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의 모습과 가정, 회사에서의 모습이 다릅니다.
실제 모습은 교회가 아닌 가정과 회사에서 드러납니다.
마치 하나님의 성전 안에 우상도 함께 모시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롯의 아내를 보십시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했을때 그녀는 그 곳을 떠나며 속으로 아쉬워 합니다.
그 도시에서 누리던 풍요와 안락함에 미련이 남은 것입니다.
옆집 여자와 즐기던 파티, 창고에 넘쳐나던 곡식들이 아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다가 결국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우물쭈물한 것입니다.
신약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나오는 젊은 부자관원을 보십시오.
그는 젊어서 높은 지위에 올랐고, 부유했으며, 스스로 율법도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자부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하나님의 큰 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춰진 그의 마음의 민낯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시험하셨습니다.
그에게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망설이며 근심하다가 결국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우물쭈물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것처럼 우물쭈물하는 것은 불신앙의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뜻에 삶의 최우선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믿음은 있거나 없거나 둘중 하나입니다.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수 없는 그런 믿음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남에게 영향을 주기는 커녕 나를 변화시킬 능력도 없습니다.
‘계속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다’고 후회하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물쭈물하다가 멸망을 자초한 시드기야와 달리 운명이 역전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저 가난한 자들입니다.
10절에 보시면 바벨론은 왠만한 사람들은 다 포로로 잡아갑니다.
그런데 가진 것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남겨두고 그들에게 포도원과 농토를 나눠줍니다.
땅을 황무지로 만들지 않고 조공을 받으며 경제적 이득도 얻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바벨론에 반역할 가능성이 매우 낮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힘있고 빽있는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착취당하던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소작농들, 고아와 과부, 나그네들 입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죄를 언급하실때 우상숭배뿐만 아니라 그들의 저지른 불의한 일도 지적하셨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돌봐줘야 할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핍박하고 착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되면 운명은 역전됩니다.
핍박하고 착취한 자들은 모두 빼앗기고 포로로 끌려갑니다.
반면 그들에게 핍박받고 착취당한 자들은 땅을 분배받습니다.
하나님은 이방나라 바벨론을 통해 하나님의 정의를 회복하십니다.
다음은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를 죽이려던 자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갑니다.
반면 예레미야는 바벨론 왕의 지시로 감옥에서 해방됩니다.
심지어 예레미야의 요구사항이 무엇이든 잘 들어주라고 명령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집으로 돌아갈수 있었고, 백성들과 함께 살수 있게 됩니다.
바벨론 왕은 왜 느헤미야를 이토록 잘 대해줬을까요?
예레미야가 어떤 인물인지 바벨론에도 소문이 났던 것입니다.
바벨론에 먼저 끌려간 사람들, 미리 항복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통해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들을 통해 예레미야가 참 예언자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온갖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 속에서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예레미야의 손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물론 예레미야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기 나라 왕에게 항복하는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게 어찌 쉽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싸우라고 말하는게 더 쉬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지켜주신다고 철석같이 믿고있던 백성들에게 힝복하라는 말은 첩자의 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말고도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에티오피아 사람, 왕의 내시인 에벳멜렉입니다.
그는 38장 7-13절에서 등장한 인물입니다.
예레미야가 왕의 신하들에 의해 물웅덩이에 빠져 죽을 위험에 처하자 그가 나섭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시드기야 왕에게 예레미야를 살려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때 그가 예레미야를 살리려고 나서지 않았다면 예레미야는 죽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런 용감한 행동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에벳멜렉의 도움으로 예레미야가 물웅덩이에서 근위대 뜰로 옮겨졌을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유다가 멸망해도 그는 반드시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그를 구원해주시는 이유가 단지 그가 예레미야를 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18절에서 하나님은 그가 나를 의지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믿었다는 말입니까?
예레미야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예레미야가 참 예언자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목숨걸고 예레미야를 위해 왕 앞에 나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기던 유대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 이티오피아 내시는 구원을 얻습니다.
이 둘의 운명을 가른 것은 바로 믿음과 순종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한 자는 죽고 죽고자 한 자는 사는 역전이 일어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8장 35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여기서 자기 목숨이란 단순히 육체적 생명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겨우 소수의 사람만이 이 말씀에 순종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 목숨이란 다양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먼저 나의 시간과 물질을 의미합니다.
나의 유익과 안락함을 의미합니다.
근본적으로는 나의 욕망과 나 중심의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그것들을 기꺼이 포기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것을 얻기 위해 썩어 없어질 나의 것들을 포기하는 삶은 결코 어리석은 삶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점이 있습니다.
유다가 멸망하고, 예루살렘이 불타고 있는데 하나님이 사라지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15-18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아직 예루살렘 성벽이 뚫리기 전입니다.
현재 시점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현재 하나님은 철저히 침묵하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자식을 때리는 부모의 마음을 보면 조금이나마 짐작할수 있습니다.
부모가 잘못한 자식을 작심하고 호되게 때릴 때 어떻습니까?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게 진짜 무서운 것입니다.
제가 어릴때 크게 잘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엄마가 대나무를 들고 집 앞에 서 계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저를 방으로 데려가셔서 호되게 때리셨습니다.
그 때 우리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너 한번 죽도록 맞아봐라’ 하면서 좋아하셨을까요?
밤에 잘때쯤 엄마는 제가 맞아서 퉁퉁부은 자리에 약을 발라 주셨습니다.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의 마음은 아마 부모의 마음과 다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던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왕과 백성들이 비참한 모습으로 포로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분명 찢어지셨을 것입니다.
고개를 돌려 눈물을 흘리고 계셨을 것입니다.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은 유다가 지은 죄를 반드시 심판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심판의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심판하십니다.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실수 밖에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 대상이 하나님의 아들일지라도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때도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침묵은 버림과 방관이 아닙니다.
회개와 회복을 간절히 원하시며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뜨거운 침묵입니다.
심판을 통해 백성들을 깨끗하게 하시고 그들을 회복시키시려는 준비의 시간입니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반전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바닥을 칠때가 있습니다.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예외가 아닙니다.
불순종이 일상인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언제든지 징계의 매를 대실수 있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기회를 줘도 우리가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번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우물쭈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매는 우리의 구원과 회복을 위한 매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그 뒤에는 반드시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고,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담대히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