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3:13-17, 너는 내 사랑하는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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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3:13-17
제목: 너는 내 사랑하는 자라 2024-7-24, 천광교회 수요기도회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질문이 있다면, ‘나는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론,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내가 하는 일이 곧 나”라고 말합니다. 나는 어떤 일을 해. 어떤 회사에 다니고, 어떤 중요한 직책을 가지고 있어. 좋은 일들을 하고 큰 프로젝트를 수행해서 제법 성공하면 나 자신에 대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그 사업이 실패하면 어떻습니까? 우울해지곤 합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이제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면, “내 평생에 한 일을 봐라, 나 때는 말이야.. 내가 왕년에...내가 뭔가 위대한 일을 했다.” 라며 과거를 회상하곤 합니다.
또 우리는 “남들이 나에 대해 하는 말이 곧 나”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하는 말, 평판, 이미지가 좋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것이 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군가 우리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면, 슬퍼하거나 섭섭해집니다. 누군가 우리를 비방하면 마음 속에 큰 상처가 됩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이 곧 나”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한국 사람이고, 자상한 부모가 있고, 좋은 교육을 받았고, 건강이 좋은 편이다. 자산이 얼마만큼 있어. 그러나, 여러분 그 중에 하나라도 잃은 순간, 가족이 아프거나 재산을 잃게 되면 우린 내적 어두움에 빠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가 하는 일이 곧 나’라든지 ‘남들이 나에 대해 하는 말이 곧 나’라든지 ‘내가 가진 것이 곧 나’라는 식으로 나 자신을 정의하려고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습니까? 만약 이런 것들이 나의 나됨, 즉 우리의 존재와 정체성을 정의한다고 하면, 만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이며, 만족한다고 해도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우리의 삶의 기복은 계속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좋게 말하고, 좋은 일들을 하면, 내가 많은 것이 있으면 아주 기분이 수직 상승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하나 둘 씩 잃게 되면, 어떤 업무를 내가 더 이상할 수 없거나, 사람들이 나를 비방하거나, 친구들을 잃게 되면 나는 구덩이에 빠지는 것같은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최근에 저에게 꿈으로 하는 분석상담을 케이스를 접수 받았습니다. 그 분은 크리스챤이시고 다른 교회에 다니십니다. 이 분은 27세에 취직을 하셔서, 올해 초에 만으로 64세가 되셔서, 37년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은퇴하셨습니다. 대기업 근무하셨는데, 원래는 55세에 은퇴해야 하는데, 마침 그 해에 회사에서 은퇴 연령을 60세로 연장하면서, 5년 근무를 더 하셨습니다. 또는 60세에 은퇴할 즈음에 다행히 계열사로 취직을 해서 4년을 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한 직장에서 37년을 근무한다는 것은 큰 축복이며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시는 말이, 은퇴 후에 두 어달은 자연인이 되어서 자유롭고 좋았다고 합니다. 나런데 3,4 달이 지나니까 내가 계속 이렇게 생활할 것인가? 뭔가 해야 하지 않은가? 그런 불안감이 올라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음악을 통해 미술을 통해 상담을 하기도 하는데, 분석상담은 꿈을 통해 무의식을 다루는 것입니다. 그 분이 가져온 첫 꿈의 내용은 이미지가 아니었습니다. 소리였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꿈 속에 아무도 없는데, 이런 소리를 꿈속에서 들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말씀은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에 있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하늘에서 들은 소리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그러니까 이분이 은퇴하고 새로운 삶, 새로운 출발을 하시는데, 이 분은 이제 자신의 페르소나, 즉 과거에 내가 어느 학교를 다녔고, 어느 회사에서 몇 년 근무했다는 것, 과거의 역할과 직함과 경력을 다 내려놓고, 지금 은퇴 이후의 새롭게 시작기는 시기, 즉 0점부터 시작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에 굉장한 중요한 메세지를 들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흔히 노인상담에서 은퇴 이후에 3-5년이 굉장히 중요한 시기라고 합니다. 이 분이 앞으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한데, 둘 중에 하나입니다. 과거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일이나, 소유, 평판’ 지향적인 삶을 답습하면서 정체성을 붙잡을 것인지 아니면, 이 음성,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는 음성을 붙들고 새로운 존재로서 은퇴 이후의 노년의 삶을 주안에서 건강하고 의미있는 삶의 패턴과 방식을 일구어가면서 살아것인지 중요한 갈림길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정체성을 새롭게 갱신해야 하는 새로운 시작해야 하는 모습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에 누구나 바닥체험, 0 점, 제로 포인드 일 때, 내가 소중히 여기던 것을 하루 둘씩 내려놓게 될 때, 이 ‘영적 정체성’이 삶의 질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0점, 제로 포인트는 바닥체험을 말합니다. 직장에서 은퇴한 후에, 사업에서 실패 한 후에, 사랑하던 사람이 내 곁을 떠났을 때, 내가 소중히 생각하던 건강을 잃은 후에, 우리는 새로운 출발점 앞에 서게 됩니다.
이 출발의 시점에서는 누구나 0점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숫자 0을 생각하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아무것도 없구나, 빈털터리구나, 모든 것이 다 사라졌구나, 부족하구나.’ 이런 마음이 들면, 슬프고 낙심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반대로 생각합니다. ‘아!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구나! 내가 지금까지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으니까 새롭게 도전할 수 있겠구나.’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과 같은 순간을 살고 계신 분이 있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강력한 위로와 격려가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어떻게 인생을 출발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도 0점에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분은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3년간 공생애로 살기 위해서 무려 30년 동안을 준비하시며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왔을 때에는 과감하게 도전하셨습니다. 그러한 도전의 삶에 자기의 전 실존과 생명을 걸고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옷을 훌훌 다 털어버리고, 0점 바닥인 가장 비천한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여러분, 잠시 우울감이나 불안감을 느낄 순 있지만, 너무 낙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이젠 끝이라며, 버려진 인생이네라며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신 것을 알고, 그리고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기억하며 다시 출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3:16 (NKRV) 상반절
16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오늘 말씀을 보면, 백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백성들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척만 합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부도덕하며, 악한 모습이 가득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으니 빨리 회개하라, 빨리 죄를 고백해라. 빨리 하나님의 사람으로 초청을 받으라”고 말입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친 이 소리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시던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내게도 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요한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오히려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되는데 왜 제게 세례를 베풀라고 하십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요한은 그 의미를 완벽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어렴풋하게나마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어 줍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께서 마치 죄인 된 인간의 모습으로 낮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의 영광을 다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의 자리를 내려놓고 죄인의 모습, 연약한 모습, 바닥의 모습, 비천한 모습으로 자신을 내려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사람과 사람이 관계할 때 ‘세 가지A’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Attention, 주목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난 후, 멀리서 뛰노는 모습만으로도 내 아들, 내 딸이 어디에 있는지 순식간에 알아차립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어머니는 압니다. 얼굴표정, 몸짓, 손짓, 발짓 등 자녀의 모습을 한 눈에 알아차립니다.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낮아지고, 연약해 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한 공생애는 두 가지 뿐이었습니다. 하나는 바닥으로 내려가서 죄인의 연약함에 동참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Affirmation, 인정해 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인정합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표적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는 하늘의 닫힌 문이 확 열렸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하늘이 갈라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어 성경에서는‘하늘이 찢어졌다.’고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서, 막혔던 하늘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으로부터 하늘의 계시가 이 땅에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하늘의 지혜, 하늘의 능력, 하늘의 영광이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두 번째 표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6절 하반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6절 하반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이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확증하여 주시는 인정의 표시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자기에게 비둘기같이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영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사건이 이어집니다.
마태복음 3:17 (NKRV)
17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것은 확증과 더불어 예수님을 격려해주고 싶으신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바로 세 번째A가 있습니다. 그것은Appreciation, 격려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에 가서 아들과 딸에게 “네가 내 아들이어서 참 고맙다. 네가 내 딸이라 너무 기쁘구나.”라고 이야기하면 처음에는 자녀들이 어색해하겠지만, 그 말에 진심이 담겨져 있다면 아이들은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인정과 사랑이 필요하듯이, 예수님께서도 누군가의 인정이 필요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이와 같은 인정을 받고 난 후에 기쁨과 만족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 힘으로 광야의 시험을 이기시고 복음을 전하시고 병을 고치셨습니다. 하물며 척박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인정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받는 소리에 지쳤습니다. ‘너는 쓸모 없다, 있으나마다 한 존재다’라는 소리들을 듣습니다. 그래서 쓸모 있고 사랑받는 존재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는 격려와 인정을 받으려고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 듣는 것은 주님의 은혜때문에 가능합니다? 깨진 마음 그대로, 연약함 그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복음의 힘, 음성을 듣고 교회에서 헌신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은 다 사랑스러운 아들, 딸입니다. 그런데 모든 아들과 딸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나 속 썩이는 아들과 딸이 많습니까? 아버지를 우습게 생각하고 어머니의 뜻을 저버리는 자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0점에서 시작하겠다.” 하는 마음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것을 하향성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열려져 있고, 내 고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우선으로 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상향성의 길을 추구하기만 합니다. 자꾸 높아지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거꾸로 낮아지려고 하셨습니다. 높아지는 것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높이 올라가면 떨어지기 쉽다는 것을 경고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성공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높이시고 스스로는 낮아지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예수님의 공생애 출발점이었습니다.
여러분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낮아지심으로 우리가 죄인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낮은 자리에 처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생명의 자리에 동참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각자 안에는 “너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내적인 음성이 있음을 믿습니다. 이것을 일이나, 평판이나 세속적 관계나 지위로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린 이런 것들이 없다 할지라도, 주님이 나를 낮은 자리에 처하게 하신다 하더라도, 주님은 나로 하여금 참된 내적 자유와 기쁨을 여전히 누리게 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너는 사랑받는 자라!”는 부드럽고 힘있는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존재의 구석구석에 울려펴지기길 원합니다. 진정한 파워시니어는 이 음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음성을 기초로 의미있게, 다음세대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가진 것을 베풀며 살아가는 삶이 노년의 삶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이 말씀을 매일 매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가슴에 담아두시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과 지혜가 다음세대들에게 큰 본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새벽에 일찍 일어날 때 어떻게 일어나십니까? 아이고 죽겠네. 피곤 미치겠어. 그게 아니라, 이 말씀을 제 말씀으로 벌떡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사업에 실패 할 때, 가진 것을 내려놓아 허부함, 불안감이 밀려올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그리고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 어떻게 잠드십니까? 잠시 앉아서 눈을 감고, 시편18편 1절의 말씀으로, 하나님 앞에 사랑을 고백하며 잠들 수 잇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너는 쓸모없다, 못생겼다, 무익하다, 비루하다, 너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다”라고 외치는 소리들이 가득합니다. 그럴수록, 하늘 위에서 그리고 우리 마음 깊은 속에서 우리를 주목하고 인정하시는 진리의 복된 음성 “너는 내 사랑받는 아들딸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부드럽게 속삭이는 음성에 귀기울이고 붙잡으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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