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728 주일오후예배: 사도행전 26:24-29; 누가복음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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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 26:24-29; 누가복음 19:5-8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부족한 종을 통하여 선포될 하나님의 말씀을 저와 여러분이 함께 듣게 되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배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오늘도 자신을 알려주시는 복음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고, 또 우리가 그것에 힘입어 한 주간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서론: “사람 잘 안 바뀐다.”라는 보편적인 생각 -> 그만큼 사람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바꾸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 그러나 가능하다 -> 복음만이 가능하다 -> 복음은 사람의 생각, 가치관, 자아를 바꾼다.
우리가 성격이 좋지 않은 사람을 보거나 오랫동안 나쁜 습관을 고치지 못하는 사람을 볼 때 쓰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잘 안 바뀐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말도 있고 “사람은 고쳐쓰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바꾸기란 굉장히 힘듭니다. 한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자아를 바꾸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어쩌다가 조금씩 변화하긴 하지만 완전히 바뀌진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도 이전과는 다르게 180도로 변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복음을 통해 이전의 모습에서 180도로 변한 성경에 등장하는 두 사람인 바울과 삭개오를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복음이 날마다 필요하다는 것을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는 복음을 날마다 의지하게 되면 좋겠습니다.
복음으로 변화된 바울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본문은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기 전에 있었던 일로 당시 이스라엘의 분봉왕이 었던 아그립바와 로마 총독 베스도 앞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바울은 주님께서 만나주신 이후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마 제국의 여러 곳에 전도 여행을 다녔습니다. 그의 노력 덕분에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은 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듣게 되었고, 믿는 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전도 여행은 결코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유대 지도자들과 이방인들에 의해 각종 핍박을 받았고 목숨이 위태해지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성령께서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고 말씀하셨기에 자신은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미리 말씀해주신 것이 결국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고,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유대인들에게 잡혔지만, 바울은 그 순간에도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로마의 총독 앞에서도, 분봉왕 앞에서도 바울은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마다, 특히 유대인들 앞에서 복음을 전할 때마다 사용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바로 자신이 회심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이전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히브리인 중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열심이 있던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시작으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바갷하기 위해 부단히 뛰어다니며 노력하였습니다. 박해하는 사울을 향해 성경은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모습이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얼마나 박해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그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 길에서 펼쳐지게 될 일이 자신의 모든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게 될 것을 모른채 말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중 그가 박해하는 자들이 믿는 예수라는 존재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변화하게 되고, 그의 모든 생각, 가치관, 자아, 그리고 삶이 변화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박해자에서 오히려 그가 이제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길을 걸어갑니다. 바로 이 바울의 회심 이야기를 바울은 베스도와 아그립바 앞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이야기합니다. 그는 그가 박해했던 자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이렇게 바울의 이야기를 들은 베스도와 아그립바의 반응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의 본문입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들은 베스도의 반응은 “미쳤다.”였습니다. 24절을 보시면 베스도는 “바울아 너가 미쳤도다 너의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너가 공부를 너무 많이 한 나머지 정신이 이상해졌다.”라고 말한 겁니다.
그러자 25절에서 이 베스도의 말에 대한 바울의 반응은 “각하여 저는 미치지 않았고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아그립바를 향하여 자신의 말이 미치거나 거짓된 말이 아니라 진실된 말임을 증명하는데요. 26-27절에서 그렇게 합니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의 관습과 분쟁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자신의 혈통과 출신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이토록 뼛 속부터 유대인임에도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이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임을 아그립바를 통하여 증명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아그립바가 구약을 알고 있고, 선지자를 믿고 있다면 자동적으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재판을 받고 있는 와중에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며 전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심문을 받아야 하고, 어떤 죄를 지었는지 수사를 받아야 하는 입장입니다. 심지어 자신 앞에 있는 자들은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입니다. 한 명은 이스라엘 땅을 다스리도록 임명된 분봉왕이며, 한 명은 지금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로마 제국이 보낸 총독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아무리 죄가 없다고 한들 두려워 하고 긴장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전혀 그런 기색은 없이 오히려 이들에게 보란듯이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했지만, 총독은 “미쳤구나.”라고 말하고, 왕은 “너가 이 작은 시간 동안 나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만들려는구나.”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이들이 이러한 반응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고 바울은 담대히 복음을 전합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주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은 어떻게서든지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빼앗기 위해 여러 곳으로 찾아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복음을 받아들인 후로는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그가 오히려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생명을 빼앗는 자에서 복음이라는 생명을 전하는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담대해질 수 있게 된 것은 복음의 힘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저울질하는 자들 앞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셨다는 믿음, 그리고 자신이 받은 복음이 너무나 좋고 이 복음을 받아들이니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차게 되어 누구라도 이 복음을 받아들였으면 하는 이 바울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어떻게 말합니까? 29절입니다. “제가 말을 길게 하던지 적게 하던지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제가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바울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한 명이라도 더 자신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이 바울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전에 타인의 생명을 빼앗으러 찾아다녔던 바울은 이제 타인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하나님이 이끄시는 곳에 담대히 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바뀐 바울의 모습. 누군가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바로 바울이 교회를 박해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직전에 나오는 스데반입니다. 스데반도 자신의 생명을 죽이려는 자들 앞에서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결국 스데반은 순교하고 말았고, 바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죽음을 마땅히 여겼던 그 스데반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이 박해하는 분인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 이렇게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복음의 힘은 지금도 여전히 바울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지위가 높은 자들 앞에서도 담대함을 가졌고, 높은 지위를 상관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은 과거에 어떤 한 시점에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복음의 힘입니다. 바울의 모든 가치, 생각, 자아, 그리고 삶을 복음은 변화시켰습니다. 복음이 아니면 바울을 이렇게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이렇게 변화될 줄 바울이 알았겠습니까? 전혀 몰랐을 겁니다. 더구나 그가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어 복음을 전했을 때 동료 그리스도인들도 의아해했습니다. 심지어 바울이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려고 하자 “저 사람 우리를 박해하던 사람이잖아?”하면서 두려워하고 바울이 자신들과 똑같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아마 그리스도인이라고 위장하여 자신들을 잡아가려고 하는 술수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주님을 만나고, 복음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결코 저항하지 못하는 은혜 앞에 굴복하게 되었고 그의 모든 것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생명을 빼앗던 자에서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함으로 생명을 주는 자로 말입니다. 바울은 이전에 율법에 열심을 내어 자신이 의로운 사람임을 입증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만났을 때 자신이 그렇게 얻고자 했던 그 의는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자신이 그토록 찾던 의는 자신을 만나주신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바울은 자신에게 진정한 의를 주신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버려 구원하신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의 뒤를 쫓아 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24 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조차 아끼지 않은 모습으로 변화된 것이 바로 바울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즉 복음이 바울에게 끼친 영향이며 바울을 통해 나타난 복음의 힘입니다.
2. 복음으로 변화된 삭개오
복음은 이렇게 바울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바울만을 변화시키지 않았습니다. 바울 뿐만 아니라 주님을 만나 복음을 접하게 된 후로 자신의 가치관과 자아가 송두리째 바뀐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여러분도 잘 아시다피시 세리입니다. 당시 세리는 사람들로부터 미움받던 존재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세리는 로마 제국의 영토가 워낙 넓어 정부가 다 일일히 세금을 걷지 못하니 세운 사람이 세리였습니다. 더구나 주민들이 원래 시장에서 세금을 내야 하는데, 암시장을 만들어 탈세를 하고 있어 이 세리를 세움으로 세금을 걷었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자신들이 내라고 한 양만 세리가 꼬박꼬박 가져다준다면 이 세리가 원래 걷으려는 세금보다 그 이상을 걷어도 눈감아주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사람들로부터 돈을 착취하는 사람이었고, 로마 정부를 위해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을 팔아 일하니 로마의 앞잡이로 취급당했습니다. 당시 세리를 향한 시선이 어땠냐면, 유대인들의 ‘미쉬나’라는 책에는 세리들은 너무나도 혐오스러운 존재로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동물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죄가 아니기 때문에 세리에게는 거짓말을 해도 괜찮았다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바로 세리는 짐승과 같은 취급을 당했다는 겁니다. 적어도 유대인들에게 세리는 사람이 아닌 짐승, 아니 그보다 더 못한 존재였을 수도 있습니다. 삭개오가 바로 이런 존재였습니다. 그는 심지어 그냥 세리도 아니고 세리장이었고, 그가 부자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사람들의 돈과 재물을 착취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이 축적한 부를 누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신이 살고 있는 여리고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삭개오도 들었을 겁니다. 병자들을 낫게 해주시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신다는 소문을 삭개오도 들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셨대”라며 사람들이 수군수군대자 그도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려고 찾아갔지만, 키가 작은 삭개오는 사람들에게 가려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마 성경에는 나와있진 않지만 사람들은 삭개오에게 결코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키가 작아 보이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삭개오가 앞에 갈 수 있도록 길을 터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사람들은 엉덩이를 그의 얼굴에 대고 결코 보지 못하도록 했을 겁니다. 이처럼 삭개오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던 존재였고, 조국을 배신한 로마의 앞잡이였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내어 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삭개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예수님이 삭개오를 찾아오신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들어오신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삭개오를 만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한번도 만나지 못했음에도 예수님은 삭개오를 바로 알아보시고는 그가 올라가 있는 나무로 가셔서 삭개오에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서 지내야 하겠다.”
그냥 멀리서 보기만 해도 좋을텐데, 집에서 하룻밤 지내시겠다니요. 삭개오는 자신의 집으로 오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에 너무나도 기뻤을 겁니다. 그리고 더 기쁜 것은 자신을 예수님께서 알아보셨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삭개오는 이전에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알아보시고 자신의 집에서 거하시겠다는 말씀까지 하니 삭개오는 너무나 기뻤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얼른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삭개오는 그저 예수님이 누구신지 보러 갔지만, 예수님은 그 이상, 곧 삭개오의 집에서 지내시면서 함께 교제하고자 하십니다.
성경은 삭개오의 집에서 알마 동안 계셨는지, 또 집에서 삭개오와 무엇을 하셨는지 말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한 후의 삭개오가 보여준 모습은 주님이 삭개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의 삭개오는 아까도 말했듯이 다른 사람의 재물을 착취하며 자신의 부를 쌓았던 자입니다. 그는 동족을 배신한 매국노였고, 짐승만도 못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만난 후에는 그의 모습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8절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나이다.”
주님을 만난 이후의 삭개오는 이제 가난한 자의 것까지 착취하여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악독한 세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가난한 자에게 자신의 소유를 기꺼이 내어놓게 되었으며, 만일 자신이 이때까지 해온 것처럼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는 엄청난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았습니다. 순전히 삭개오가 자발적으로 하겠다고 한 말입니다. 주님을 만나고나니 가난한 자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였고,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올린 부당한 재물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본인 스스로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여기서 삭개오는 부당한 재물에 대하여 네 배로 갚겠다고 했는데요. 이것은 구약의 율법이 요구하는 것, 그 이상의 보상입니다. 레위기에는 타인의 재물에 손해를 끼쳤을 때에 네 배로 보상하라는 그 어떤 말도 없습니다. 오히려 네 배보다 더 낮은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율법이 요구하는 그 이상으로 네 배로 보상하겠다고 자발적으로 주님께 이야기합니다. 재산의 절반을 나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 어디에도 가난한 자를 위해 재산의 절반을 나누라는 내용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을 만난 이후로 변화된 삭개오 안에서 일어난 자발성입니다.
이전의 삭개오는 돈을 사랑하였습니다. 돈과 재물에 목숨을 걸며 가난한 자를 착취해서라도 부를 축적해야 했습니다. 그가 매국노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이후로 그가 그렇게 갈망하던 것이 돈이 아니라 주님께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돈을 사랑하던 자가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토록 집착하던 돈과 재물에서 해방되어 이제는 주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자신의 것을 기꺼이 쓰고 싶어졌습니다. 어떻게서든지 돈을 축적하려고 했던 그가 이제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돈을 나눠주고 싶어서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라는 복음을 만나게 된 순간 그의 모든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자아가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다시 말해 복음이 삭개오에게 끼친 영향이며 삭개오를 통해 나타난 복음의 힘입니다.
3. 복음의 힘
이처럼 복음의 힘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이미 복음의 힘을 경험한 자들이지 않습니까? 먼저는 우리가 이 예배의 자리에 나아왔습니다. 아침에 몸을 일으켜서 예배드리러 오는 것이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지 않으면 찝찝한 마음이 생기고, 또 안 가게 되면 한 주동안 영적으로 자신이 약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배의 자리에 우리가 기꺼이 참석하게 되고 말씀을 듣고 찬송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또한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삭개오와 같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복음에 의해서 보이게 됩니다.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 보입니다. 더 나아가 이전에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했던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 것을 알게 되니 이제는 그것을 하더라도 양심에 화인 맞은 것처럼 불편해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미 경험한 복음의 힘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과거의 경험도 있지만, 앞으로도 우리에게는 복음이 필요합니다. 형제를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기까지 우리는 날마다 복음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각 교회에게 전한 서신들을 잘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오전예배 때마다 빌립보서를 살펴봤는데요. 빌립보서를 비롯한 모든 바울의 서신들에서 바울은 각 교회에게 먼저 복음을 말하였습니다. 교회가 복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복음을 알고 있음에도 복음이 교회의 잘못된 점을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먼저 전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까? 제가 저번에 설교한 것처럼 고린도교회 내에 실족한 형제들이 있습니다.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실족한 형제들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권리를 먼저 포기하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입문 단계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입문 단계가 아닙니다. 복음은 날마다 우리에게 항상 필요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자신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만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날마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장 하기 힘들어하는 것 중에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바로 용서입니다. 나는 용서받고 싶지만, 다른 사람을 용서해주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입니다. 이번 여름성경학교에서 아이들이 주기도문을 배웠는데요. 마지막 시간인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중 용서에 대한 기도를 아이들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가 자신에게 100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주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할 때조차 복음이 필요합니다. 형제에 대한 미움과 시기, 그리고 분노가 있을 때 복음을 묵상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신 하나님께 죄를 지었음에도 나를 용서해주신 주님의 용서를 묵상할 때 우리는 나에게 잘못한 형제를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준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손양원 목사님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손양원 목사님은 여순사건 때 두 아들이 총살 당해 죽어버렸습니다. 상심한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나 복음을 통하여 손양원 목사님은 엄청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두 아들의 장례 예배 때 목사님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는데, 다음과 같이 드리셨습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도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열 번째, 이렇듯 과분한 축복 누리게 되는 것을 감사합니다.
이 열 가지 기도제목 중 이 기도를 듣고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일곱번째 기도, 바로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원수를 자신의 양아들로 삼는다는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고 그 살인자는 회개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더 나나아가 그 살인자의 아들은 목사가 되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복음이 힘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손 목사님이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손 목사님의 사랑이 엄청나서였겠습니까? 아마 당장이라도 원수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자신의 아들을, 그것도 둘 씩이나 죽였는데 그 원수를 향한 분노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에게 사랑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셔서 그 원수를 사랑하고 양아들로 품게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의 힘은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것조차 하게 만듭니다.
또한 복음의 힘을 경험했을 때 바울처럼 나뿐만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복음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질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날마다 복음이 필요합니다. 복음은 과거의 어느 한 시점의 역사일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힘입니다. 형제를 용서하는 것, 원수를 용서하는 것, 그리고 오히려 사랑하는 것. 또한 누군가가 그렇게 하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삭개오처럼 자신의 것을 필요한 자들을 위해 기꺼이 나누어주는 것 등등.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날마다 자신에게 복음을 전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 복음은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여 우리가 할 수 없는 그것을 하게 만들 것입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이 시간 같이 기도하면 좋겠는데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복음으로 변화된 바울과 삭개오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접하게 된 후에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이전의 모습과는 180도로 바뀐 모습으로 말입니다. 이 두 사람을 변화시킨 것은 두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난 후, 즉 복음의 힘입니다. 이 시간 같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본 두 사람처럼 우리도 변화시키신 주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합시다. 또한 여전히 우리에게는 연약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성화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자신에게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되어 변화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이 시간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