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빛 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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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위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여 주시여 구원을 허락하시고 복된 주일을 허락하심에 감사합니다. 이 시간 특별히 맥추감사주일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감사하며 드리는 이 예배를 받아주시고 말씀과 은혜로 풍성히 채워지는 복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말씀 : 요일 1:1-10
제목 : 생명과 빛 되신 예수님
찬송가 462장 생명 진리 은혜 되신
오늘은 ‘생명과 빛 되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여러분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우리 옆에 있는 지체와 이렇게 한번 인사할까요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아멘? 우리가 이렇게 주 안에서 한 형제 자매 된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주의 권속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와 이제 십계명 말씀을 다 마쳤습니다. 열 가지의 계명의 핵심이 뭐에요? ‘사랑’이라고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십계명을 순종하는 삶은,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좋은 길임을 하나님이 알려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살펴볼 말씀은요, 요한일서 말씀입니다. 요한일서라는 서신은요, 사도 요한이라는 예수님의 제자가 쓴 서신입니다. 요한은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중 한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열두 제자 중에, 가장 마지막으로 순교한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요한은요, 요한복음을 기록했고요, 우리가 보고 있는 요한 일,이,삼서를 기록했고요,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입니다. 이 사도에게는 별명이 있었는데요,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는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이 요한일서 말씀의 핵심 키워드는요, 바로 ‘사귐’입니다. 앞에 보이십니까? 한자 ‘사귈 교’입니다. 요한일서 말씀을 생각할 때에는 이 사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사귐이라는게 무엇입니까? 이 한자의 단어로 보통 이런게 있지요. ‘교감’ ‘교류’ ‘교역’ ‘교통’ ‘교제’ 이 사귐이라는 단어는요, 기본적으로 서로 오고가는 것을 의미해요, 상대가 있고, 내가 있고, 서로 오가며 왕래하는 것이 바로 사귐입니다. 사귐이라는 사전적 의미는요 ‘서로 얼굴을 익히고 가까이 지낸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일서에서는요, 이 사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요, 이 사귐은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에 배경이 뭐냐면요, 이 편지가 쓰여질 당시에요,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거나, 잘못 가르치는 사람들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 똑같이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데요, 어떤 사람들은요, 예수님에 대해 오해를 하거나,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가르쳤어요. 당시에 잘못된 지식 중 하나는요, 예수님이 성육신 하지 않았다는거에요. 이 성육신이라는건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왔다는 건데요. 당시 철학 가운데는요,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다라는 개념을 가진 영지주의라는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그 사람들이 그 이론을 내세우면서, 예수님은 육체로 온거 아니야, 영으로만 오신거야 그렇게 가르친거에요. 그니깐 예수님을 전하면서도 잘못된 가르침을 전한거에요.
여러분 우리도 살다보면, 내가 저 사람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닐 경우가 있잖아요. 특히 가족같은 경우에, 엄마가 저를 보고, 호정이는 이 음식 안좋아할 텐데라고 말하면요, 사실은 어렸을 때 안좋아했어도, 나이 먹고 좋아진 음식도 있고요, 저 음식 좋아할텐데, 하면요, 또 싫어진 음식도 있잖아요. 아니면 애초에 맞지 않을 때도 있고요, 수십년간 같이 살아온 사람이라도요. 우리가 서로 잘 모르고 오해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요, 이건 괜찮습니다. 왜요? 조금 오해해도 풀면 되잖아요. 엄마가 저 오해하는 것 별로 큰 문제 없습니다. 그런데요, 예수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잘못 가르치는 건요, 큰 문제를 낳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거나, 잘못알고 있다면요, 우리의 믿음이 이상한 길로 향하게 됩니다. 아니 때로는 예수님에 대한 오해는요, 믿음과는 전혀 상관 없는 길로 다니게 할 수 있는거에요. 예수님에 대해 바르게 알고,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 믿음의 참된 방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까? 아니 다르게 물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싶으세요? 그분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고 싶으세요? 아니면 그냥 이정도면 다 알았지, 난 믿었으니깐 됐지, 세례 받았으니깐 됐지, 하면서,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 없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으세요? 사실 믿음이라는 것은요, 한순간에 끝나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사귐입니다.
믿는 것은요, 예수님과의 사귐이 있는거에요. 그분과 더 깊은 교제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 참된 믿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부모와 자식 관계가요, 그냥 자식이 태어났다고 해서 끝납니까? 그 뒤에 일은 자식과 부모 사이 간에, 아무런 관계 없이 살아가는게 진짜 가족 관계입니까? 아니잖아요. 오히려 아이를 낳고 나서, 본격적으로 그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가, 사귐이 시작되는거잖아요.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걸로 끝입니까? 아니잖아요. 이제 서로 시간을 보내고, 교제를 하면서,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거 아니겠습니까.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다고 해서 끝이나는거에요? 아 그럼 끝났다. 이제 내 살길 찾아 갈란다. 이게 진짜 믿는 자의 모습이라고요? 착각하지마세요.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진거 정말로 중요하고요, 거듭나는거 중요하지요. 그런데 그 이후의 삶이 훨씬 더 중요해요.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시작된거에요. 사귐이 시작된거에요.
한번 따라해보겠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오늘 더 깊어져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이러한 마음들이 살아나기를 소망합니다. 왜 오늘날 이렇게 신앙인들이 문제가 되어질까요. 지금 한국교회가 심각한 위기라는건요, 단순히 코로나 때문에 숫자가 줄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숫자가 줄고 운영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교회가 위기가 아니에요.
이 시대에 교회가 진짜 위기인 이유는요, 교회다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는요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 있고, 더 알고 싶어 사람들이 모인 곳에 교회에요. 머리 되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더 깊이 알아가는 곳이 교회인데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사귐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나타나시지 않을까봐 두려운 것이 아니라 진짜 나타나실까봐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살아계셔서 깊이 만나는 예수님보다 성경책 속에 가둔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내가 원하면 성경책을 펴서 만나고, 내가 원치 않으면 언제든지 성경책을 닫아 가둡니다. 내가 원할 때만 예수님을 만납니다.
우리의 죄의 문제, 삶의 문제가 어디서 찾아올까요? 예수님과의 사귐이 없기 때문에 찾아오는거에요. 믿는 사람들이 왜 죄를 지을까요? 왜 세상 사람들에게까지 손가락질을 받을까요? 우리가 원래 죄인이라서요? 아니에요. 예수님과의 사귐이 없기 때문이에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마음과 뜻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 인생의 문제가 찾아올까요? 대부분은요,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데 정신이 팔려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거나 다른 것에 관심이 있기에 늘 삶이 괴롭고 내 뜻대로 안되고 문제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눈에 보이는거에요.
오늘 바라기는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더 깊게 알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과 깊은 사귐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누구일까요?
첫 번째 따라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이시다.’오늘 본문에 보면요, 예수님께서 생명 되심을 말씀합니다. 1-2절 말씀인데요 한번 같이 읽어볼게요.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요한 사도는요, 요한일서를 시작하면서요,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세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되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한다,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된 이시니라
여러분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 누구세요? 예수님이시잖아요. 예수님을 요한 사도는 생명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들었고 보았고 손으로 만졌다, 그리고 이 생명되신 예수님을 우리가 이제 너희에게 전한다는거에요. 생명이 누구라고요? 예수님이세요.
여러분 생명이 무엇입니까? 살아 숨을 쉬는게 생명이에요, 생명은요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게 생명이에요. 모든 생명체가 추구하는게 생명이에요. 여러분 단순하게 물어볼게요. 살고 싶습니까? 죽고싶습니까? 다 살고 싶잖아요. 아니요. 어떻게 보면요 모든 사람들은, 다 잘 살기 위해서 아등바등살아갑니다. 다 생명을 위해서 살아가요. 자고, 먹고, 입고, 일하고, 왜하세요? 잘 살려고요, 살기 위해서 하시잖아요. 인간의 삶의 목적은 살기 위한거에요. 생명을 얻기 위한거에요.
그런데요, 아주 명확하게 요한 사도가 제시해주잖아요. 누가 생명이다? 예수님이 생명이다. 너희들이 그렇게 추구하고, 찾고, 누리고 싶어하는 그 생명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씀하는거에요. 그런데 사람들은요, 생명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모른체요 끊임없이 생명을 찾아헤메입니다. 다른 곳에 기웃, 기웃 어디에 생명이 있는지 찾아헤메요,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에요. 이 사실을 잊어버린다니깐요.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생명인데, 자꾸 다른데 정신이 팔려 있는거에요. 마치 그곳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요, 바라기는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진짜 생명되신 주님과 깊은 사귐이 있는 복된 한 주 되길 소망합니다.
두 번째는요, 우리가 알아야 하는 하나님이 누구시냐, 5-6절 말씀입니다. “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여기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해요?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빛이신거에요. 여러분 질문해보겠습니다. 빛에는 어둠이 있을까요? 없어요. 아주 캄캄한 밤에, 불을 한번 켜보세요. 빛이 있는 곳에 어둠도 같이 존재할 수가 있습니까? 없어요. 빛이 있는 곳에는요, 어둠이 물러가는거에요.
마치 이와 같다는거에요. 하나님이 빛이세요. 그리고 빛되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삶을 살면요, 어두움에 거할 수가 없다는거에요. 여러분 사람들이 왜 죄를 짓는다고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요? 천만에요. 진짜 근본적인 이유는뭐냐면요, 그 빛되신 하나님과 사귐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 안에 빛이 없으니깐 어두움에 거하게 되는 겁니다. 빛 되신 하나님과 늘 사귀면요, 어두움에 거할 수가 없는거에요. 6절에 보세요, 만일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는거다. 빛되신 하나님과 사귀는데, 어떻게 어둠에 행해요, 빛과 어둠이 같이 존재할 수가 없는데요, 그럴 수가 없는거에요.
그러니깐 왜 이 시대의 교회가, 성도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요, 세상 사람들에게까지 손가락질 받는 이 지경이 되어버렸을까요? 바로 빛되신 하나님과의 사귐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뭐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원래 그렇다고 해요, 왜요 빛 되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 하나님을 알고, 믿는 백성인데, 왜 이지경까지 와버렸는지 우리는 다시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죄를 짓지 않는 방법은 다른게 아니라요, 이 빛 되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삶이에요. 그분과 사귀게 되면요, 어두움이 아니라 빛의 자녀들처럼 살게 되는거에요.
물론 성경 역시 우리가 하나님처럼 완벽한 삶을 산다고 말하진 않습니다. 그런데요 빛되신 하나님과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빛되신 하나님과 더 깊은 사귐으로 들어가면요, 우리의 죄된 모습이 발견되게 되는거에요.
죄된 모습을 발견할 때에 어떻게 하면 되요? 9절 보세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빛 되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우리의 어두움, 죄를 자백하면 되는거에요, 빛은 언제나 어두움에 숨겨진 것들을 들춰냅니다. 들춰진 죄와 허물을 고백하면 됩니다. 그런데 늘 하나님과 사귐이 없는 사람은요, 자신의 죄와 허물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어두움은요 반드시 빛 앞에 서게 될 때에만 드러나는거에요,
기독교의 유명한 변증가였던 CS루이스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선해지면 선해질수록 자기 안에 남아있는 악을 더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악해지면 악해질수록 자신의 악을 깨닫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 악한 인간은 자기가 그리 좋은 사람은 못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악한 사람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바라기는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빛 되신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거하시는 복된 한 주 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과 깊은 사귐이 있을 때에, 우리의 죄악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죄를 하나님 앞에 자백하면요, 하나님은요, 예수님을 보시고 그 죄를 다 용서해주십니다. 다시금 기회를 주시고요, 다시 우리를 깨끗케 하세요, 이 하나님과 깊은 사귐이 있는 복된 한 주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귀한 사귐은요, 하나님과 사귐이 있게 하고요, 특별히 성도의 사귐을 허락하셨다는거에요. 본문 3절 말씀인데요,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편지의 수신자에게 전한 이유는요, 자신들과 사귐이 있게 함이라는거에요,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사귐을 주신분이세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그 빛 되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 수 있도록 허락하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세요. 그런데요 예수님은요, 우리에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전한 사귐이 있도록 하신분이세요.
이것을 보통 사도신경에서는 ‘성도의 교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요, 성도가 누릴 두 가지 사귐에 대해 말씀한거에요. 하나님과의 사귐, 성도와의 사귐, 이 모든 사귐의 기반은, 예수님이시다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참된 사귐을 누리고요, 그 안에서 한 몸으로 부름 받은 성도들과 참된 사귐을 누리게 됩니다. 이제 진짜 교회이고요, 진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우리 안에 주 안에서 성도의 교제가 회복되어야 해요.
성도의 교제는요 그냥 세상적인 사귐을 넘어섭니다. 왜냐하면 주님 안에서 우리가 한 몸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도요 많은 사람들끼리의 사귐이 있습니다. 공통 관심사를 가지고 모이는 것이지요.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축구 때문에 서로 사귐이 있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술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지고 사귑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책을 가지고 사귑니다. 그러나 성도의 사귐은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공통 분모 가운데 모여진다는거에요. 이것이 특별한 이유는요,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바뀌는 것도 아니고요, 없어질 것도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 바로 성도들간의 사귐이라는거에요.
안타까운 것은요,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이 주님께서 주신 성도간의 사귐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착각하기도 해요, 내가 하나님하고만 관계가 좋으면 되지, 하나님보고 교회다니지라는 말로요, 이 성도 간의 사귐을 가볍게 보거나 무시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요,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생각임을 우리는 아셔야 합니다.
요즘 시대 정신이 뭐냐면 개인주의입니다. 내가 제일 중요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거나, 재물을 허비하거나, 나누는 것에 인색한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26장에 보면요, 성도의 교제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성령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의 은혜와 그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과 영광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 상호 간도 사랑으로 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각기 받은 직분과 은사의 유익을 통용하게 되었으니만큼, 그들의 처지에서는 각기 받은 은사대로 공사 간에 서로 봉사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함으로 피차 영육 간 유익을 받도록 하는데 협력함이 된다.”
바빙크라는 신학자는요, 이 성도의 교제를, 성도의 나눔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에 대해 말하면서요, 하나님은요 각기 자신의 백성들에게 다른 은사들을 나누어주셔요. 그런데요, 이 은사는요 그 자신을 위해 나누어 준게 아니라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줬다는거에요, 이 은사들은 땅에 묻어두거나 경시되어서는 안되고요, 반드시 다른 성도들의 유익과 구원을 위해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사용되야 함을 말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를 주님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서로 형제요 자매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실상 육신의 가족보다도 더 끈끈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된 자들이요, 한 가족된 자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가족이 뭡니까? 때로는 마음이 맞지 않고, 서로 보기 싫을 때가 있어도요, 같이 사는 것이 가족이에요. 서로 이해하려고 하고, 끝까지 사랑하는게 가족이에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요, 형제 자매와 교제하는거에요. 사귐이 있는거에요. 서로를 위해 자신이 받은 은사를 아낌없이 나누고 누리는 모습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정산교회가 주님께서 주신 사귐을 진정으로 누리고 기뻐하는 공동체 되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귐이라는 놀라운 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게 하셨고요, 성도 간의 사귐이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깊이 사랑하시고, 성도 간에 깊은 사랑과 나눔이 있는 복된 한 주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헌금기도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리나이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에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복된 주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며 말씀 듣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 시간 은혜 받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귀중한 물질을 올려드립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로 왔음을 고백하여 드립니다. 형편에 따라 최선의 것을 주님 앞에 올려 드립니다. 이 감사의 고백이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를 위해 사용되게 하옵소서.
세계 선교와, 주의 복된 소식이 전파되는 일에,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올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우리 안에 주님을 향한 감사가 넘쳐나게 하시고, 이 시간 참석한 모든 성도님들의 가정과 일터위에 더 큰 은혜로 채워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께 더 많이 드리게 하시고, 더 감사하게 하시고,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복된 우리의 삶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모든 만물의 주인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 기도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