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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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로 시편은 시작한다. 시편은 크게 5권으로 구분되고 1권의 마지막이 41편인데 13절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으로 마무리 한다. 그런데 시작을 ‘가난한 자’이다. 의미상 ‘궁핍’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렇게 보살피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복이 정말 있게 되어 진다 약하고 궁핍한 자를 돕는 자에게 재앙의 날에서 구원하신다 여호와께서’라고 직역할 수 있다. 그러니까 먼저 ‘약한 자를 돕는 행동’이 먼저 나오고 그런 자에게는 ‘정말로 복이 있어 진다는’ 의미를 담는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재앙의 날’ – 어떤 날인지? – 구원을 받게 되는 구체적인 복의 내용을 언급한 것이다.
이런 내용이 시편 1권을 마무리하는 시작이라는데 주목해야 한다. 그러 자는 ‘살게(2)’ 된다. 그리고 그런 상태의 ‘계속’을 의미한다. 이를 신학적으로 보면 ‘여화와’를 주어로 해서 ‘구원’과 ‘살게’되는 행동의 흐름이 유지되고 있음을 함의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바라고 기도하는 신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에게 주시는 복은 1장에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인 것이고 그러니 시작과 끝은 같은 궤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은 한적한 곳에 성경을 펼쳐 놓고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편기자는 이를 ‘가난한 자를’ 돕는 행동으로 구체화하고 있음을 눈 여겨 봐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에서 드러나고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건지시고’, ‘살게 하시고’, ‘복을 받게 하시고’, ‘붙드시고’, ‘고쳐주시고’, ‘베푸시고’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신자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어 깊은 골방에 들어가지만 이미 골방에서 알려주신 내용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어나서 걸어 가야 하는 것이다. 언급된 경험의 시작이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시작에 있다. 4절에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하는 시작은 ‘내가 주께 범죄하였다’고 시작하는 것은 지난 시간 시편 기자의 기도에 늘 따라 다녔다. 그리고 우리는 ‘범죄’한다는 의미가 매우 포괄적인데 적어도 현행법을 어기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정도는 알아야 한다. 쉬운 이해는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에 ‘내가 잘못했어’라고 시작하듯 하지만 ‘네가 뭘 잘못했는데’라고 따지고 드는 말 싸움이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시편 기자는 알았고 마치 예전 아버지 세대의 묵묵한 지지와 역할을 다 하시는 정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분명하게 ‘건지심’, ‘살리심’, ‘복주심’, ‘붙드심’, ‘고치심’, ‘베푸심’은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베푸시는 사랑의 실제이다.
하나님께 이런 사랑의 구체화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셨고 바울은 이것을 ‘의로움’ 즉 ‘의가 나타났다’라고 했다. 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로 시작해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냈다’고 말한 것이다. 다시말해 ‘~심’은 예수 안에 모두 있다. 예수를 경험한 사람은 ‘~심’을 경험한다. 그럼에도 다윗은 자신의 삶에 경험된 놀라운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선 자기가 ‘범죄한 상태’임을 깨달었던 것이다. 우리가 죄를 자복 하면은 마치 엄마 지갑에서 돈을 훔쳤습니다 처럼 열거하듯 기도한다. 그리고 죄의 열거가 끝나면 기도는 힘없이 사라지는 공허함에 빠진다.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묵상하고 사랑하심에 대한 사랑받지 못함을 가진 ‘자기 부인’이 범죄한 사실을 깨닫는 자가 갖는 특징이다.
왜 기도자에게는 ‘원수’가 있었을까? 그가 가난한 자를 살피고 그들을 위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의 주변에 원수가 있는 것이다. 자기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기도자는 걸림돌인 것이다. 그래서 ‘악담’하고 ‘죽기를 바라고’,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원수는 그렇게 스스로 ‘악을 쌓’게 되고 쌓은 악의 행동으로 인해 여호와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길을 걷는 것이다. 다시 1편으로 돌아가 악인의 삶을 기억해보라. 왜? 그의 길이 악인의 길이었는지 말이다. 악인은 나와 상관없지 않고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자’를 무너뜨리고자 한다.
그렇게 여호와의 길, 토라의 길, 말씀의 길을 따라 사는 자에게 ‘복’은 10절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평안의 길은 넓은 평지에 바람을 시원하게 맞으며 유유자적 걷는 길이 아니다. 적어도 여호와의 길을 걷는 자는 원수가 도사리는 길이자 때론 원수가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이다. 바로 예수께서 그렇게 떡을 나누던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팔리셨다. 그러나 그 시간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일어나는 ‘인자가 영광을 받을 시간’이라고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시간이 되었다. 결코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한다. 그 이유는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 내가 알’기 때문이다. 이를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믿음의 고백이라고 할 때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하는 감사가 있어야 한다. 기도는 일방적인 요구가 아니라 기도를 통해 여호와를 알고 말씀에 나타난 사랑을 깨닫고 나의 삶을 말씀의 요구에 따라 살아내면서 겪는 풍랑과 파고를 견디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복을 누린다.
그럼에도 지금 여기가 좋습니다 라는 기도가 아니라 영원까지 이어질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에 한 점으로라도 내가 있음을 보는(본다는 의미를 되새기며) 것이다. ‘아멘, 아멘’ 이러한 두 번의 표현은 요한복음에서 ‘진실로 진실로’라고 기록된 것처럼 그 확고함에 대한 기도자의 분명한 표현이다.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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