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세대가 가야할 길
Notes
Transcript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이후에 큰 기근이 온 세상을 덮쳤다. 야곱의 가족들도 기근때문에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갔다.
형제들을 만난 요셉은 두번의 테스트 이후에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형제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 했지만 요셉의 진심어린 용서로 인하여 함께 부둥켜 안고 재회의 기쁨을 누렸다.
그리고 요셉은 형들에게 아버지와 다른 가족들을 데리고 올 것을 권했다. 요셉의 생존 소식을 전해들은 야곱은 믿을 수 없었지만 요셉이 보낸 수레를 보고(45:27) 기운을 얻었다.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으로 와서 요셉과 재회하게 되었다.
가나안은 교회, 애굽은 세상
가나안은 교회, 애굽은 세상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성도가 가야할 길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시기 위한 거점으로 삼으신 교회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 모여서 예배하고 하나님을 배우며 이곳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해 서로 나눕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교회만 아름답고, 교회만 살찌우고, 교회 안의 성도들만 행복한 것이 하나님의 관심이 아닙니다. 낙원교회 최요한 목사님께서 설교하실 때 하나님의 관심은 애초에 세상에 있었다고 말씀하신 것을 듣고 매우 공감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애초에 교회를 이처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셨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보내주시고, 교회도 세우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만 사랑하셔서 나라를 세우시고 이스라엘만 강하게 하시고 부유하게 하시려고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이것을 오해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강력했던 다윗 왕 때를 회상하며 언제나 다시 그런 왕국을 세울 수 있을까? 고대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그보다 훨씬 이전 시대부터 세상에 있었습니다.
야곱의 시대에 대표적인 세상은 애굽입니다. 애굽은 가나안 주변의 여러 강대국 중에 한 나라였는데 요셉의 때에 7년 풍년과 7년 흉년의 기간에 막강한 제국으로 입지를 굳히게 됩니다. 물론 여기는 우상과 죄악이 넘쳐나는 나라입니다. 아브라함의 때에도 기근으로 인해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간 사실이 있습니다.(12:10) 또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때에 흉년이 있어 애굽으로 내려가려 했을 때 하나님이 애굽으로 가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 (26:2)
이와 같은 사실 때문에 야곱의 가족들도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형제들은 미워하는 동생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보내버렸고, 온 세상에 기근이 왔을 때에 애굽에 곡식이 있는 줄 알고 있었지만 형제들은 서로 바라만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꺼리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녀들을 애굽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양식을 구했습니다. 얼마 후에 양식이 떨어지자 또 자녀들을 애굽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그 양식으로 생명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요셉과 재회한 이 시점에는 요셉이 그들에게 거처를 애굽으로 옮길 것을 권합니다. 야곱과 가족들에게 영 내키지 않는 제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인 벧엘이 가나안에 있고, 그들의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는데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애굽으로 가서 살아야 하는가? 고민이 되었을 것입니다. 단지, 요셉을 한 번 보고 돌아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곳에서 머무르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46:3)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46:3)
성도와 교회와 가정은 사실 한가지 입니다. 이제부터 교회로 용어를 통일하겠습니다. 교회는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들의 우상을 섬기게 될까 두렵고, 그들에게 해를 당할까 두렵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릅니다. 세상은 훨씬 더 힘이 있고 부유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사실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음악이 들어오는 것을 왜 반대할까요? 교회가 더 힘이 있고 강력하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겠죠? 왜 영화나 드라마를 못보게 할까요? 왜 주일에 놀러가는 것을 못하게 할까요?
세상 음악을 듣는 것이 죄고,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이 죄고, 주말에 놀러가는 것이 죄라서 그렇습니까? 그것이 틀렸다고 할 수 없지만 우리가 좀 더 솔직해져야 합니다. 정말로 그것들을 멀리하는 이유는 두려움입니다.
세상 음악이 더 귀에 잘 들리고 교회 음악이 밀리거나 잊혀질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말씀과 설교 시간보다 티비나 핸드폰 보는 것에 더 마음을 뺏길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교회 나오는 것보다 놀러 다니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될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애굽으로 가면 애굽에게 내가 먹힐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그것이 본질이고 핵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는 갔다가 얼른 다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삭에게는 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야곱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46:3)고 말씀하셨습니다. 애굽으로 가야할 때가 있고, 애굽으로 내려가기 위한 준비가 있는 것입니다.
풍요의 시대
풍요의 시대
풍요의 시대에는 애굽으로 내려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모두 언제 애굽을 바라봅니까? 기근에 때에 애굽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교회의 풍요의 시대는 언제입니까? 70~90년대 우리나라는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오던 시대입니다. 그때는 오는 사람들만 잘 돌봐주면 되는 때입니다.
교회에서 교육도 시키고 음악도 가르치고 인재도 키웠던 시대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배고픈 사람 먹여주고, 아픈 사람들 병을 고쳐주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때에는 세상이 교회를 바라봅니다. 특히, 영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구름 떼처럼 교회에 몰려오고 와서 은혜를 받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풍요의 때가 있으면 기근의 때도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이 시기와 때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기근의 시대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지 않습니다. 교회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교회의 도움을 바라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영적으로 기근이 와서 성도들의 은혜가 점점 시들해져 갑니다. 이것은 목회자들의 역량이기 이전에 영적인 기근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이 더 똑똑하고 준비를 많이 해서 성도들이 은혜받고 사람들이 교회에 몰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비와 같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거두시면 방법이 없습니다.
이제 기근의 때에는 애굽으로 가야합니다. 거기에서 영적인 양식도 공급받고, 교육도 받고, 병도 치유받고, 배고픈 사람들의 배도 채우고 그런 것입니다. 두려워 하지 말고 세상으로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성도의 삶은 세상과 단절된 삶이 아니라 구별된 삶입니다. 세상에 속하되 세상에 물들지 않는 삶이 성도의 삶입니다.
예수님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당시 하나님을 제일 잘 알고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인도자들이었던 제사장,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과 율법교사 및 서기관들은 성도들에게 세상과 단절된 사람을 말했습니다. 그것이 맞았던 때가 있었고 그것이 필요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는 영적인 기근의 시대였습니다. 교회 안에 은혜가 메말라가고 성도들이 배고프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자기 안에 질문들이 넘쳐나며 신앙적 모순때문에 혼란스러웠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계속 성전 안에서의 헌신과 복종 그리고 율법을 요구합니다. 예배는 어떻게 하고, 헌금은 어떻게 하고, 금식은, 기도는, 율법은 어떻게 지키고 전통은 어떠한지를 계속 이야기하면서 하나님때문이라고 말은 거창하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존재 유지와 성도들을 잃을까봐 두려움에 한 행동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과감하게 그들의 메시지에 거부하며 부정하다고 멀리하던 문둥병자와 세리와 창녀들에게 찾아가셨습니다. 그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교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문둥병에 걸리지도 않았고, 창녀처럼 몸을 함부로 하지도 않으셨고, 세리처럼 자기 유익을 위해 이웃을 착취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더 나아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요즘 시대로 보자면 주일 예배를 교회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드린 것입니다. 기도할 때 제사장과 바리새인은 광장 한 가운데서 사람들이 모두 보는 장소에서 큰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예수님은 새벽에 산으로 올라가서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 무릎사이에 얼굴을 파뭍고 눈물 흘리며 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명령할 때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성도들을 전도해와라. 성전을 더 크고 아름답게 지어라. 내 이름을 높이라고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데리고 오라’가 아닙니다. 어디로 가라는 것입니까? 모든 민족에게로 세상으로 나아 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왜 필요합니까?
이곳에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해서 알고 믿기 위해서 입니다. 그 이후에 제자도 삼고, 가르치지고 하고 세례도 베푸는 것입니다.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46:34)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46:34)
하나님은 야곱의 가족들을 애굽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오래 전에 요셉을 준비시키시고 먼저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런 준비가 없이 방법이 없이 애굽으로 가버리면 애굽의 힘과 문화에 금새 동화되버리고 말 것입니다. 요셉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와 세상 가운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해야하는 운명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 치우쳐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아슬아슬한 사이를 걸어갈 수 있을까요? 이 시대에 성도와 교회가 가야할 길이 어디입니까?
그곳이 바로 ‘고센땅’입니다.
요셉이 야곱의 가족을 위해 준비했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세상의 경계가 바로 ‘고센땅’입니다.
지도를 보시면 야곱의 가족이 살던 헤브론에서 애굽으로 이동을 하는데 사실 수도인 멤피스로 이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의 가족들 경로를 보니 애굽에서 수도인 멤피스까지 가지 않고 라암셋이라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요셉은 가족을 애굽에서 살게하려고 이렇게 했습니다.(46:32-34)
‘직업’이 목자라고 밝혔다.
애굽사람들은 목자를 가증하게 여긴다고 했다. 가증하게 여긴다는 말은 아주 천하게 여기고 같이 하기 싫어하고, 심하게 표현하면 혐오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사람들 중에는 교회를 싫어하고 기독교인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요즘에 사회 분위기는 갈수록 이런 현상이 많아지고 있다. 이런 때에 우리는 교회 안에서만 성도로 살다가 나가서는 또 불신자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자기 신분을 주변사람들에게 밝혀야 한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입니다. 그것이 세상으로 나아가서 할 첫번째 행동이다.
2. 비옥하지만 사람들이 꺼리는 곳
고센은 지도에서와 같이 나일강 상류에 위치한 멤피스와 달리 여러 갈래의 강들로 이루어진 삼각주 지역이다. 그래서 습지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땅이 기름졌다. 그래서 목축을 하기에 매우 적합했지만 사람이 이동하거나 집을 짓고 살 수가 없는 땅이었다. 그래서 이 당시까지는 이 좋은 땅에 거의 사람이 살지 않았다. 요셉은 더 좋은 땅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려진 땅을 가족에게 준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세상에서 성도가 살아가는 것은 힘들고 어렵게 느껴질 때가 많이 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고 말하면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까 두렵기도 하고, 양보해야 하고, 포기해야 하고, 술과 담배와 같이 보이는 것들에 제약도 생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꺼리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고센 땅을 선택한 이유는 그곳에서 잘 살 수 있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때에 이집트 중왕조 후반인 기원전 2,000년 경부터 그곳에 사람들이 살 게 되었고, 1500년 이후부터 여러 성들이 세워졌다고 한다. 인류의 역사를 간단하게 세등분하면 아담때부터 아브라함때를 2천년, 아브라함때부터 예수님때를 2천년, 예수님때부터 우리 시대를 2천년으로 본다. 그래서 창조과학자들은 인류 역사를 6천년으로 보는 것이다. 아담때부터 아브라함의 시기는 아직 확정할 수 없지만 예수님이 태어나기 2천년 전에 아브라함이 살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증손자인 요셉이 살던 시기도 그와 비슷하다. 그러므로 이집트 고센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유적은 야곱의 가족의 것으로 추정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곳에 사람이 살 수 있게 된 계기는 ‘벽돌’의 사용이었다.
땅이 습지이고 질퍽하기 때문에 바닥에 벽돌을 깔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요셉의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이들은 땅에 놓는 벽돌은 진흙으로 만들고 집을 지을 벽돌은 짚을 넣어 더 튼튼하게 만들었다. 이 비옥한 땅에서 야곱의 후손들은 엄청난 번성과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그래서 400년이 지나자 애굽사람들이 경계할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한 것이다.
출 1:7,11그래서 애굽의 왕 세티1세가 수도를 멤피스에서 라암셋으로 옮기고,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고 그들이 살던 지역에 도시를 만들어 애굽사람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셉이 했던 것과 같이 곡식창고를 지었는데 그곳이 바로 비돔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도로 몰려드는 애굽사람들을 수용할 건물과 길들 그리고 성을 지어야 ㅇㅇ했다. 그래서 엄청나게 힘든 벽돌 제조과정을 거쳐야 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신다. 이 시기가 바로 다시 교회로 돌아가는 시기이다.
사람들이 꺼리는 곳 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성도의 능력이다. 어떻게 고센과 같은 곳에서 생존할 뿐 아니라 번성하고 강성해질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하는 지점이다.
벽돌은 반석과 같다. 반석 위에 세운 집은 말씀 위에 세운 신앙과 같은 것이다. 말씀을 읽고 배우고 알아감으로써 세상에서 물들지 않고, 단절되지 않고 신앙을 지키며 성도로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록펠러는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를 물에 띄울 때 역청을 발랐다는 말씀에서 영감을 얻어 이집트 땅을 헐값에 사서 그곳에서 나는 기름으로 석유왕이 되었고,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