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계의 긴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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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에 나타난 열국에 대한 심판 메시지 중에서 모압에 대한 신탁의 분량이 가장 깁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대적한 절대악으로 묘사되는 바벨론을 향한 신탁보다 더 길게 묘사되는 이유에는 모압과 이스라엘 사이의 역사적 배경이 많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모압은 지리적으로 유다와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수 천년의 애증의 관계를 갖고 있죠. 성경은 모압의 시작을 어둡게 그리고 있습니다. 창세기 19장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후 롯의 두 딸이 롯을 취하게 만들어서 근친상간을 갖고 암몬과 모압이 태어나게 됩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였으니까 모압은 원래 이스라엘과 혈통이 같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모압과 이스라엘은 적대관계가 됩니다. 출애굽 이후에 모압의 왕 발락은 발람이라는 이교도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파괴하려고 했지만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면서 이 계획이 실패합니다(민 21-23). 그러자 모압 여인들이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하여 이방 신을 숭배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비느하스라는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기지를 발휘해서 곤경을 면하게 되죠(민 25). 이를 계기로 신명기 23장에서 모세는 모압 족속이 10세대 동안 거룩한 모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지했습니다(신 23:3-6). 이후에 모압과 이스라엘의 갈등은 역사에서 계속 이어졌습니다.
모압이 의존하던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죽은 후에 모압의 왕 메사는 이스라엘을 배반합니다(왕하 3:5). 이 메사 왕의 석비가 19세기에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오늘 등장하는 지명들이 적혀 있습니다.
물론 긍정적인 역사도 소수이지만 있습니다.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가 된 룻이 모압 출신입니다. 룻은 사사시대의 사람이죠. 보아스에게 고엘 제도를 통해서 시집을 가게 되면서 모압 족속임에도 불구하고 룻은 예수님의 조상이 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모압의 길고 힘겨운 역사를 감안할 때 모압에 대한 신탁이 왜 이렇게 길게 기록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주전 594년 경 유다의 시드기야 왕 때에 바벨론에게 반역을 도모하기 위해서 모압을 포함한 이방 나라의 사신들을 예루살렘에 소집했을 때로 추정됩니다(렘 27:3).
이 예레미야서를 읽었을 1차 독자였던 바벨론 포로들의 입장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바벨론의 포로 생활이 좋았을 것 같습니까, 안좋았을 것 같습니까? 당연히 안좋았겠죠. 그런데 그들의 마음은 마냥 안좋지는 않았습니다.
어제 애굽을 다루었지만, 애굽의 종살이와 비교하자면 바벨론은 천국과 다름 없었습니다. 일단 애굽과 바벨론의 종살이의 동기부터 다릅니다. 애굽의 노예가 된 이유를 성경에서는 단순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만 설명합니다. 하지만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죠. 바로 이스라엘의 죄악, 우상숭배 때문이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그렇게 숭배했던 우상들이 넘쳐났던 곳이 바벨론이기 때문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유다인들 대부분은 바벨론을 멸시하는 마음보다는 바벨론을 동경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실제로 애굽에서의 생활과 바벨론에서의 생활은 달랐습니다. 애굽에서의 생활은 잔인하고 가혹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바벨론에서도 물론 강제노역이 있기는 했지만 애굽만큼은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서와 느헤미야서를 통해서 바벨론이 포로들한테 어떻게 대했는지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능력이 있으면 고위직에 고용될 수 있는 공정하고 상식적인 나라였습니다. 여러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포로였던 유대인들 대부분은 바벨론에 반역을 범하지만 않으면 평범하게 경제활동에 종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포로 초기에는 여러 제약이 있었지만, 다니엘서를 보면 갈대아인들에게 고발당한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되면서 느부갓네살 왕이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기까지 합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의 지위가 높아지기 시작하죠. 이렇게 자연스럽게 유대인들은, 물론 마음 한켠에서는 고향을 그리워했을지라도, 바벨론의 화려한 우상숭배의 문화에 순응하며 살게 됩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모압에 대한 신탁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요? 모압은 이스라엘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수 천년동안 미혹한 나라였습니다. 모압의 문화에 순응하면 이스라엘이 망하는 역사가 반복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모세는 모압 사람을 아예 분리시켰지만, 시간이 지나자 북이스라엘도 모압과 손을 잡고,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도 모압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모두 멸망을 당했죠.
이러한 암울한 역사에 숨겨진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를 1차독자들이 이 예언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던 것이죠. 바벨론을 동경했던 마음, 부러워했던 마음을 모압 심판에 대한 예언을 통해서 낱낱이 벌거벗겨진 기분을 느꼈을 것입니다. 세상에 순응하면서 산다면 또 이러한 수치를 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10절을 다시 읽으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절묘하고 적확하게 말씀하셨는지 다시 느끼게 됩니다.
여호와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받을 것이로다
하나님께서는 모압을 파괴하는 것을 지체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것을 게을리 하는 자가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바벨론을 동경하고, 화려하고 높게 솟아오른 바벨론의 문화에 시선을 빼앗겼던 디아스포라들의 마음을 간파하시고, 이보다 더 강하신 하나님 나라, 더 위대한 하나님 나라, 더 선하고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그들의 손으로, 우리의 손으로 이루기를 원하신다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세상에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마음과 시선을 분리해야 해요. 저는 얼마 전부터 뉴스를 인터넷으로 보는 것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대신 종이신문으로 뉴스를 확인합니다. 내가 뉴스를 찾아보면 자꾸 내가 관심있는 것, 자극적인 헤드라인만 쫓아가게 되면서 절제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대신 종이신문은 뉴스를 절제하면서 볼 수 있죠. 그동안 저는 목사는 세상 돌아가는 것도 잘 알아야 한다라는 명분이 뉴스를 끊임없이 보는 것을 합리화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우상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어떠한 방법으로 세상 문화로부터 분리하고 계십니까? 단순히 술, 담배 절제하고 봉사하고 도덕적으로 살면 충분할까요? 우리의 평소의 생각과 방식과 삶의 양식은 여전히세상에 순응하며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러 지명들이 파괴되는 것을 예언한 말씀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지명들은 모압에서 우상들의 거래가 활발했던 도시들입니다. 즉 “너의 취미, 너의 습관, 너의 시선, 너의 귀, 너의 마음, 너의 활동, 너의 모든 영역에 있는 우상들을 제거하기를 지체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혹하는 삶의 모든 영역을 심판하시기 일보직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셔서라도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주목하게 하실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나를 위해 징계하실 수도 있다는 거룩한 긴장감을 늘 가지셔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징계가 임한다고 해도 슬퍼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히브리서 12:7-8절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우리가 하나님 자녀라는 증겨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일에도 시간이 부족하지 않으십니까? 말씀을 아는 일에도, 기도하는 일에도 시간이 부족하지 않으십니까? 일 때문에 바쁘신가요? 더 긴급한 일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바쁜 일상 때문에 세상에 순응하며 살다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을 놓치는 그 삶을 제거하기를 원하십니다.
누가복음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르다의 집에 들어갑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이리 저리 분주하게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 말씀만 듣고 있는 겁니다. 마르다는 당연히 마리아가 아니꼽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눅10:38-42]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빼앗기지 않는 유일한 것이 무엇일까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내 삶에 알게 모르게 스며든 세상의 상식들과 문화들은 모두 빼앗깁니다. 그 모든 것이 만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방해한다면, 모두 제거하기를 원하십니다. 혹시 주님을 위해서 한다고 생각했던 삶의 일부나 사역/봉사의 부분들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45장 바룩에 대한 예언처럼 주님 위해서 시작했지만, 나를 위한 것이 되지는 않았나요? 주님께 두어야 하는 마음을 그 일에 뺏기고 있지는 않나요? 모든 삶과 봉사는 하나님 말씀을 더욱 깨닫기 위한 것이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세상의 상식과 우상숭배 문화를 순응하는 것에서 철저하게 분리하고 하나님 나라의 지식, 하나님 나라의 문화로 살아가는 하루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