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809 금요심야 기도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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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3:1–13 (NKRV)
1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4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 내용아래서 3부분으로 나눠 이야기 하는데 첫번째로는 바울이 지금 자기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말미암아 이방인을 위해 감옥에 갖혀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대로 따뜻한 방에서 에베소에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감옥에서 편지를 쓰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사도바울이 깨달은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한 내용입니다.
세번째는 하나님께서 이 비밀을 왜 깨닫게 하셨는지에 대한 이유와 목적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3장 7절에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기 스스로를 알았습니다. 예수 믿기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은혜의 선물을 받았다고 표현합니다. 대가 없이 주는 것이 선물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은혜를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8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이것은 바울의 진심이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잘 알았습니다. 이 은혜를 받을 만한 조금의 의도 자신에게 있지 않았음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말해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는 자신의 능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또 자신의 의지로 얻어낸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선물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에게 임하여 젔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바울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부러울 것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될 만큼 많은 것들을 누리며 살았던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다소”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다소라는 곳은 당시 지식의 도시 였습니다. 당시 지식인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 바로 “다소”입니다.
그래서 교육의 도시라고도 불려지는 곳입니다. 이러한 곳에서 바울이 태어 났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3:5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 합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라고 강하게 자신을 소개 합니다.
또 사도행전 22:3 에 의하면 사도바울은 어린시절에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웠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깐 사도바울은 비록 이방땅 다소 에서 태어 났지만 어린시절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와서 가말리엘에서 교육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했던 사람입니다.
또 율법에 열심을 낸 사람입니다.
얼마나 율법에 열심을 냈는가 하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율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박해하고 심지어는 잡아 죽이기 까지 하면서 율법과 유대교에 열심을 내던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그러던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완전히 변화 됩니다.
사도바울이 생각하기로 “이 기둥만 잡고 있으면 난 절대 흔들리지 않아!” 했는데 진정한 기둥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자신이 지금까지 기둥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이 보석만 내가 가지고 있으면 이 보석으로 나를 치장하면 그 누구도 나를 한부로 하지 못한다” 고 생각했는데 진정한 보석이신 예수님을 만나자 자기가 끌어모았던 세상의 보석이 그저 그런 빚나는 돌맹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완전히 변화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어떻게 자기 같은 사람에게 이와같은 놀라운 은혜가 주어지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비방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무너뜨리고 그것으로 모자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잡아 죽인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그러기에 바울 입장에서는 자기가 지은 죄가 용서 받는 것,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것입니다. 그 은혜가 주어지는 것만으로도 아마 벅찰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을 비방하고 욕하던 자신에게 어떻게 복음을 맡겨주실 수 있는가, 그리고 교회를 맡겨주실 수 있는지 바울은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자기같은 사람에게 이러한 은혜가 주어질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은혜는 자신의 의도 아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어느 조건도 아니라는 것을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런 은혜가 자기 같은 사람에게 주어질 수 있는 이유에 대해 한가지 더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한 사건입니다.
사도바울 당시 이스라엘은 독립 국가가 아니라 로마에 속국이었고 로마의 다스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건 예수님 당시에도 그렇고 사도 바울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는 재판권이 없었습니다.
이 말은 바꿔말하면 모든 재판권은 로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잘 알다시피 로마에서 파견된 빌라도 총독에게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도 로마에서 파견한 벨릭스, 베스도, 아그립바 왕에게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은 여러나라를 통치하기 위해 한가지 유화정책을 하였는데, 모든 나라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어떤 나라는 그 나라의 종교를 공인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유대교는 로마의 합법적인 종교,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됩니다.
그래서 유대교는 로마 법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재판권은 로마에 있었지만 유대교는 공식 인증된 종교이기 때문에 유대교와 관련되 재판만은 유대인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로마가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도 원칙을 두었는데 산헤드린 이라는 이스라엘의 최고 권력기관의 감독하에 모든 재판을 진행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사형도 집행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형을 집행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헤드린 공의원에서 파견한 사람이 그자리에 있어야 했습니다.
산헤드린 이라는 것은 70명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제사장 24명, 장로 24명, 서기관 22명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 산헤드린의 최고 수장은 대제사장 입니다.
이 산헤드린의 감독하에 재판을 진행 할 수 있었고 사형을 집행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형도 모든 것에 대해서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것만 사형을 집행 할 수 있었습니다.
신성모독은 크게 3가지인데
첫번째는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모세를 비방하는것
그리고 마지막은 성전안에서 하지 말아야 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에 해당하는 것을 하면 돌에 맞아 죽이는 사형을 집행할 수 있었는데, 이때도 반드시 산헤드린 공의원에서 파견한 사람이 참석해야 하고 그 사람의 권한 아래서 사형이 집행이 되는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는것은 성경에도 그렇고 약식으로 많이 나와서 정확한 것을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이렇게 진행이 됩니다.
한사람이 고발합니다. 그리고 증인도 있어야 합니다. 고발하는 사람이 있고 증인도 있으면 예루살렘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고발 당한 사람에게 자기가 묻힐 구덩이를 파게 합니다.
그것을 다 파면 다시한번 고발합니다. “이 사람이 이런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면 증인이 “네 맞습니다. 제가 봤습니다.” 이렇게 하고 죄인의 옷을 벗깁니다. 그리고 죄인을 묶습니다.
구덩이를 등지고 두손을 묶고 세워둡니다.
그런 다음에 증인들의 옷을 벗어 산헤드린에서 파견된 다시말해 이 재판을 책임지고 있는 최고 권위자 앞에 갔다 놓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증인들이 가장 먼저 돌을 던집니다. 그런데 이때 던지는 돌은 작은 돌이 아니라 맷돌 같은 돌을 던지기에 그 돌을 한번 맞으면 구덩이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람들이 구덩이를 향해 돌을 던지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냐면 구덩이가 다 채워질때까지 던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사도바울에게 일어난 한 사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6장 8절부터 읽겠습니다.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 이른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이것으로 보아 스데반이 걸린 죄명은 바로 신성모독죄 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들을 매수해서 스데반에게 거짓누명을 씌운 것입니다.
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여기서 말하는 공회가 산헤드리 공의회 입니다.
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이와 같은 거짓 누명을 씌워서 스데반을 잡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7장은 1절부터 53절까지 스데반이 유언과 같이 한 설교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54절부터 입니다.
54-58을 읽겠습니다.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 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재판의 최고 책임자가 사울이라는 청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울이 누구입니까? 바로 바울입니다.
사울은 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그러니깐 스데반을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겠습니까? 바로 바울입니다.
바울이 죽인 것입니다. 바울이 허락하였기 때문에 스데반이 죽은 것입니다.
바울이 스데반에게 거짓 누명을 씌웠기 때문에 스데반이 죽은 것입니다.
스데반에게 거짓 누명을 씌운것이 바로 바울입니다.
59절입니다.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릅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엑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은 이미 돌을 맞은 상태입니다. 그러기에 크게 소리 지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59절에 부르짖어 로 번역된 원어의 뜻은 간구하다 부탁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60절의 스데반이 한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없습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렀다고 되어있지만, 이것은 정말 큰 목소리를 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죽으면서까지 있는 힘을 다해 기도했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스데반의 기도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없었습니다. 스데반과 가까이 있는 몇명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바울입니다.
스데반이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는 기도를 했을 때 바울이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마 스데반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당시 바울은 ‘신성모독을 하고 죽는 주제에 누가 누구를 위해 기도하고 있느냐며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8장 1절을 보면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그의 죽음은 당연한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다음에 사도행전 8장은 스데반 집사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흩어지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7장과 8장은 한 장면입니다.
그러기에 7장의 스데반의 순교, 스데반의 기도 다음의 사건이 바로 9장 입니다.
9장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9장의 내용은 예수님이 바울을 찾아오는 장면입니다. 바로 바울의 회심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자기 같은 사람에게 복음을 알게 하고 그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또 하를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스데반의 기도 입니다.
만약에 스데반이 죽으면서 바울을 저주하며 죽었다 한들, 그래서 그 기도를 듣고 정말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해를 입힌다고 해도 바울은 아무말도 못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동안 예수님을 비방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이 바울을 죽이신들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당시 바울이 그 기도를 들었을 때에는 비웃었겠지만, 정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에, 스데반의 기도가 떠오를때 마다 바울은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아마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기록한 성경을 보면 스데반을 잊지못하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3번의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가서 거짓누명에 씌워 잡힙니다. 성전에 이방인을 들여놓았다는 거짓 누명을 쓰게 된다.
자기가 옛날에는 거짓누명을 씌웠는데, 이제는 바울 자신이 거짓누명에 씌워 잡힌 것입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22:19-20
19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이처럼 바울은 스데반을 마음속에 묻어둔 것입니다.
또, 디모데 후서 4:6-8 입니다.
디모데후서는 사도바울이 모든 사역을 마치고 이제 자신이 죽을 것을 알아 마지막으로 유언처럼 남긴 성경이 디모데후서입니다. 디모데 후서에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8절에 면류관이 헬라어로 스테파노스 입니다. 이 스테파노스는 스데반 이름입니다.
한글로는 스데반 이지만 원어의 음은 스테파노스 입니다.
그러니깐 사도바울이 이렇게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 달려 갈 길 다 갔고 내가 선한 싸움도 다 싸웠다. 이제 나 스데반 본다.”
바울은 스데반을 잊지 못하고 마음에 품고 살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 후서 4장 16절입니다.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누가 했던 기도입니까? 바로 스데반이 한 기도 입니다.
사도바울의 마음에는 한 사람의 이름이 깊이 각인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스데반입니다.
바울은 이미 알았습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한가지 더 기억합니다. 바로 스데반의 기도 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땅의 사역을 다 마치고 하늘나라에 가서 누구를 제일 먼저 보고 싶겠습니까?
물론 예수님인데 예수님빼고 말입니다.
바로 스데반 이겠죠.
바울과 스데반이 천국에서 만나면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아마 스데반이 바울을 천국에서 보면 스데반이 더 기뻐하고 감사할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바울에게만 스데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스데반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믿음을 지키며 이자리에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아마 스스로 아실 것입니다. 결코 내 힘만으로는 안됩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 그리고 기도 덕분에 우리가 지금 이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님 혹은 많은 목회자들과 교회학교 선생님들 또, 이름모를 어떤 집사님, 권사님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까지 누군가의 눈물의 기도와 간구로 인해 우리처럼 자격없는 존재가 주님의 전에와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만 스데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스데반이 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나에게는 어떤 스데반이 있었나 생각해 봤는데 금방 떠오릅니다.
제일 먼저 부모님입니다. 그리고 교회학교 선생님들입니다.
우리모두에게는 다 스데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누군가의 스데반이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바울처럼 값없이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 우리가 누군가의 스데반이 되어줄 차례입니다.
용서해주고, 용납해주고, 같이 품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격려하고, 그들이 주님을 볼 수 있도록 같이 예배드리고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갚는것이 아닙니다. 사실 은혜는 값을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지금까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습니까? 절대 그렇게 못합니다. 그러기에 은혜는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있으십니까? 그러면 흘려 보내야 합니다. 두손으로 움켜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모르는 이들에게 기꺼이 흘려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흔히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사람은 안돼, 이사람은 답이 없어.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도 됩니다. 홍해를 가르신 우리 하나님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우리 주님이 하시면 안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사명은 이제 누군가의 스데반이 되어 우리가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기다려주고, 용납하고, 용서하며 기도하여 한영혼 한영혼을 살리는 우리모두가 되길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