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809 새벽기도회: 이사야 40:1-2
Notes
Transcript
찬송하시겠습니다. 찬송가 324장 찬송하시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를 새벽기도회 자리로 부르시고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심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희의 삶은 날마다 넘어지는 삶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큰 은혜와 사랑을 받았지만, 그것에 보답하지 못하는 참으로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이런 저희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런 저희의 연약함이지만, 그럼에도 저희는 다시 그리스도께로 나아갑니다. 저희의 모든 삶의 이유가 되신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삶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내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가 죄를 이겨내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이사야 40:1-2 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어제 제가 나오지 않아 당황하셨을텐데요. 알람 맞추고 자야하는데 그만 잠들어버려서 잠에서 못 깨서 못 나왔습니다.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려야 할 거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이런 부족한 자를 통하여 오늘도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같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먼저 말씀을 두고 기도하면 좋겠는데요. 오늘 말씀은 이사야 40장으로 결국 남유다는 심판받고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겠지만, 그날에 있을 유다 백성들에게 미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39장까지 남유다의 행실을 비판하시고, 마음과 행실을 고치지 않으면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면, 40장부터는 하나님께서 결국 이 유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벨론을 통해 심판을 받았지만, 그날에 하나님으로부터 경험하게 될 위로의 요소들과 내용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어떤 위로를 전달하시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함께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1절에서 아주 놀라운 말씀으로 시작하십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여 포로가 될 겁니다. 이들이 포로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버리셨거나 아니면 그분이 역사의 주인이 아니셨음을 입증하는 것은 아닌지, 또는 남유다에게 펼쳐진 이 상황은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들로부터 자기 백성을 지키실 수 없었거나 유다가 저지른 치명적인 죄악성으로 인해 패배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내놓는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보십시오. 1절에서 이사야가 전하는 말을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을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유다가 포로로 잡혀간 것은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포기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남유다의 하나님이시며 남유다는 그분의 백성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지금 자신의 백성에게 위로를 전달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언약관계를 말씀하실 때 쓰는 명칭들이기도 합니다. 바로 너희 하나님, 내 백성이라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과거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관계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변하지 않았음을 천명하고 계시는 겁니다. 비록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그들이 하지 못하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언약이 유지되도록 지키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들의 언약의 하나님이시고, 이들은 그분께 변함없는 언약의 백성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백성인 유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필요가 전혀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유다는 하나님께서 이미 수없이 “너희 그렇게 하면 심판받는다. 너희 이방 국가 의지하는 것. 아무짝에 쓸모 없다. 나를 의지해야 한다. 나를 의지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멸망할 뿐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앗수르나 바벨론의 세력이 남유다를 포로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은 그저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왕이시기 때문에 앗수르와 바벨론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습니다. 남유다가 포로가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남유다를 여전히 자신의 백성이라고 하시며 위로하시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베푸시는 위로는 이스라엘이 고난을 당했으니까 마땅히 하나님께서 주셔야 하는 위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위로는 과분한 용서의 결과입니다. 유다가 하나님께 계속해서 범죄하고 목이 뻣뻣하여 회개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은 유다에게 이런 큰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심지어 어떻게 말씀하시냐면, 2절에서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비록 남유다가 자신의 죄로 인해 포로생활을 하면서 마치 출애굽 때와 같이 노역을 하게 되고, 포로라는 엄청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이 말씀을 받은 남유다는 포로로 잡혀가진 않았지만,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특히나 2절에서 “예루살렘”은 남유다를 지칭하는 말인데, 이것은 여성형 명사입니다. 히브리어 명사에는 우리나라에는 없지만, 각각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을 단어가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이 예루살렘은 여성형 명사인데요. 보통 같으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유다, 시온 이런 단어를 쓰십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성형 명사인 예루살렘을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은 의도적입니다. 바로 유다를 지칭하는 말로 예루살렘을 사용하신 것은 유다가 자신의 아내, 신부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바로 남편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신부를 향한 사랑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그녀에게 애정이 가득 담긴 말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심지어 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면, 오늘 읽진 않은 49장에 보면 이 하나님의 사랑을 잘 표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49장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14-15절입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바로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고 잊으셨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어머니가 어떻게 젖 먹는 자신의 아이를 잊을 수 있으며, 자신의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하고도 강력한 사랑은 바로 자기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그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연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설령 그 어머니의 사랑이 끊어진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자신의 백성을 향한 사랑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자신의 신부를 향한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도 결코 끊을 수 없을 것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향한 사랑은 그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깨진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깨지지 않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 또한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이 이들이 원래 살던 터전인 이스라엘 땅이던지, 아니면 포로로 끌려간 이방 땅에 있던지 언약 안에 있는 그들을 직접 하나님께서 찾아가셔서 그들을 돕고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을 떠올려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라는 그 우상이 가득했던 곳에 살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가셔서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이라는 거대한 민족으로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요셉을 떠올려 보십시오. 요셉은 애굽의 감옥에 갇혀있었지만, 하나님은 그곳에 있는 요셉과 함께하셔서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유다도 하나님께서는 언약관계에 있는 그분의 백성에게 찾아가셔서 이 말씀으로 위로하십니다.
또한 이러한 변함없은 언약관계에 근거해 그분의 백성을 위해 새로운 출애굽과 구원을 이루실 겁니다. 그분께서 포로 가운데 있던 그분의 백성을 자유롭게 하실 겁니다. 그러므로 이 유다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말씀을 받았다면 언약관계로 가야 할 겁니다. 이들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있지 아니하면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유다가 경험하게 될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끌려온 것이 하나님께서 버리셨다, 우리를 잊으셨다고 생각할 순 있으나 이사야를 통해 받은 이 말씀을 그들이 살펴보게 될 때 위로를 얻게 될 겁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이들과 언약관계를 유지하고 계신다는 이 사실이 포로 가운데 있던 유다 백성에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위로가 될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언약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유다가 지키지 못한 이 언약을 하나님께서 여전히 지키고 계시니 언제든지 이 언약으로 들어와서 나에게 구원을 받으라는 위로를 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비록 포로생활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다는 사실을 통해 유다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유다에게 주어질 위로입니다. 이 위로는 신약 교회에게도 동일한 위로가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인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부인 교회에게 신랑인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언약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심으로 그 누구도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인 우리는 언제든지 그리스도께로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유다처럼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범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내 뜻대로 살고자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에 빠져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실까”, “나의 이런 모습을 분명 미워하실거야.”라는 생각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은 우리가 다시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든 반겨주신다는 위로를 전해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증명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범죄할 때 오히려 그리스도께로 가야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우리의 진정한 위로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며 우리와의 언약관계를 지키신 하나님, 그 언약관계를 완성하신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두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이 이사야를 통해 전달된 이 말씀을 통해 저희는 유다 백성들과 같이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께서 버리셨다는 생각,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으셨다는 생각을 유다 백성들이 가졌지만, 하나님은 결코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깨진 것처럼 보였던 그 언약관계를 하나님은 여전히 지키고 계셨습니다. 또한 그 언약관계는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저희가 이 사실을 기억하며 유다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께 범죄하여도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저희의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 죄를 이기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죄는 저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럴 때 성령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저희가 생각하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를 이기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하루가 되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지키실 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