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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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부여교회 형제, 자매님들. 주님 안에서 평안하셨습니까? 네. 잘 계시는 것 같아 마음이 좋습니다. 먼저 함께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기도)
말씀 같이 찾겠습니다. 창 3 2 장 1 7 절입니다.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엣것은 뉘 것이냐 하거든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서울 한가운데에 위치한 서울중부교회에서 교제하고 있는 송현민 형제라고 합니다. 저희 서울중부교회는 하계수양회 5차 참석이었는데요. 부여도 5차셨었죠? 아마도 오며가며 저를 마주치셨을수도 있겠습니다. 작년에 제가 있던 교구에 한 자매님의 고향이 부여인데 부여를 추천을 하셔서 교구 야유회를 부여까지 왔었는데요? 제가 오늘 부여교회 와서 성도분들 이렇게 뵈니까 왜 부여가 그렇게 좋다고 추천하셨는지 알겠습니다. 이렇게 부여에 구원받은 형제, 자매님들이 신앙생활 멋지게 하고 계셔서 그렇게 추천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작년에 서울 한가운데서 부여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야유회를 먼데 다녀왔다고 교구 형제, 자매님들이 생색내셔서요. 저도 부여교회 형제, 자매님들께 먼데서 왔다고 생색 좀 내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저는 여기 바로 앞에 공주수양관에서 7차 참석하다 바로 넘어와서 그런 기회가 없어서 조금 아쉽지만 하계수양회 때문에 또 가까운 부여로 외부 설교를 배정받을 수 있어서 이 또한 복인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네가 누구에게 속한 사람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는 참으로 중요한 질문
모든 사람에게 “네가 누구에게 속한 사람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는 참으로 중요한 질문
자, 방금 같이 읽어본 말씀으로 다시 돌아와보겠습니다.
오늘은 “네가 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이 말씀을 중심으로 오늘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쉽게 제가 설명하면 “너는 누구에게 속한 사람이며 어디로 가고 있느냐?” 이런 질문이겠죠.
먼저 제가 이 말씀 전에 상황을 좀 설명드리면요.
32장 이전까지의 상황은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의 명분을 훔쳐서 달아난 이후에 20년을 외삼촌 라반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하나님 명령으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는 길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려면 형 에서가 있는 땅을 지나가야 하는데 이제 에서가 수하 400을 이끌고 야곱을 마중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상황에서 야곱은 자기보다 앞서 자기 종을 먼저 보내는데, 그 종을 만날 에서가 “네가 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이렇게 묻게 될 것을 지금 야곱이 얘기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해되시죠.
32장 17절의 에서가 야곱의 종에게 묻는 이 물음은 단순한 물음일까요?
야곱의 일생을 쭉 살펴보면요. 사실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똑같은 물음을 던지고 계신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이 물음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묻고 계십니다.
“네가 누구에게 속한 사람이며 어디로 가고 있느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이 물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과연 내가 어디에 속한 사람이고, 과연 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인생의 아주 근본적인 질문이잖아요?
여러분도 한번씩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누구에게 속한 사람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사실 우리 나라 사람만큼 질문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죠.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직장은 어디 다니세요? 고향은요?
학교는 어디 나오셨어요? 군대는요? 형제 자매가 어떻게 돼요?
자녀는 몇명이에요? 심지어 자녀가 있다면 아들인지, 딸인지까지!
가끔은 내가 취…취조당하는건가? 라는 생각이 들때도 있습니다. 안그렇습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서로에 대해 열심히 조사하려고 할까요?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렇게 자세하게 물어볼만큼 우리의 위치와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을 알아보는게 중요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누구에게 속했는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사실 이것보다 중요한 인생의 물음은 없습니다
에서 입장에서도 그렇죠. 누군가 에서가 있는 땅을 지나간다면 당연히 물어봐야 하는 질문이겠죠.
이 사람이 어떤 소속이고 어떤 위치에 있고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중요할 겁니다.
에서가 지배하는 땅을 빼앗으러 온 침략자인지, 단순히 에서 땅을 지나가려고 하는 사람인지, 에서와 친해지고 싶어서 여러가지 선물을 들고 온 사람인지. 당연히 물어볼 수 밖에 없습니다. 중요하잖아요.
1-1. 신앙에 대해서도 “누구에게 속했으며, 무엇을 위해 사는지?” 이 물음은 중요하다
1-1. 신앙에 대해서도 “누구에게 속했으며, 무엇을 위해 사는지?” 이 물음은 중요하다
그런데 내 신앙에 대해서도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이 계실겁니다.
하나님 믿는지 또는 교회 다니는지? 다닌다면 어디 교회 다니는지? 교회는 왜 다니는지? 교회 다니면 좋은 점이 뭔지?
내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밝혔을 때, 또는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을 했을 때 우리에게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들 이런 경험 한번쯤 있으시죠?
대답이 없으신거 보니까 큰일났는데요? 진짜 없으셔요? 없으시면 안되는데? 다들 이런 경험 있으시죠? (네~) 맞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물어봅니다. 당신, 하나님 믿냐고? 하나님 믿는 이유와 목적이 뭐냐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냐고 물어옵니다.
우리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베드로전서 3장 15절 찾겠습니다.
(벧전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우리에게 이 질문은 남다른 의미를 가질겁니다. 단순히 세상 살면서 내가 속한 직장과 출신 학교와 인맥에 대해서 대답할 것을 준비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다운 답을 준비해야 할겁니다.
여기 3장 15절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그리스도를 주로 삼는다는게 어떤 의미일까요?내가 정말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소속은 어디겠어요? 그리스도를 주로 삼고 주에게 속한 사람들이잖아요.
이어서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을 사는게 올바른 방향이잖아요.
“어디로 가느냐?” 이 질문에 나는 예수님 닮은 삶을 살겠다. 이게 맞잖아요.
그리고 “너희속에~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내가 사는 이유는 이 귀한 복음말씀 전하기 위해 살아간다고 대답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할겁니다.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예수님을 닮은 온유한 모습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경외하는 삶을 통해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할겁니다.
분명히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다니까요?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 준비없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항상 대답할 것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1-2. 야곱 또한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1-2. 야곱 또한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야곱 또한 결코 이 물음으로부터 예외가 될 순 없습니다.
야곱의 인생을 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계속 이 물음을 던지고 계시잖아요.
“야곱아, 너는 나 여호와에게 속한 사람이 맞느냐?”
“너는 누굴 위해 살고 있느냐? 나를 위해 살고 있느냐?”
“야곱 네가 가진 모든 것이 나 여호와로부터 시작되었고 언제든지 헌신할 준비가 되었느냐?” 묻고 계십니다.
다시 본문 말씀 돌아와서 제가 17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7절에서 ‘그가’는 누구일까요? 바로 야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선 자’. 앞선 자는 야곱의 종을 가리킵니다.
야곱이 자기 종에게 이르기를, “형 에서가 와서 너에게 어디 소속이고 어디로 가는중인지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거라~“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형이니까 자기가 직접 만나서 얘기하지 왜 종을 먼저 보내서 대답하라고 했을까요?
이렇게 된 배경을 좀 설명하면요. 야곱은 에서에게 무엇을 빼앗아 갔죠?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빼앗아 도망갔습니다. 장자의 명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장자로서 받아야 될 축복과 권리들, 그리고 영적 축복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중요한 권리잖아요.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받았고 에서가 사냥 나가있는 동안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대신 받아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쳤습니다. 에서 입장에서는 화 나겠어요? 안나겠어요? 화가 많이 난겁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에서에게 지금 죽느냐 마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여있는거에요.
그래서 자기가 갖고 있는 재산들을 형 에서에게 준다고 먼저 보내면 혹시 형 에서의 화가 누그러들지 않을까? 하는 꾀를 발휘해서 자기보다 앞서 종들과 재산들을 보내는 장면인겁니다.
그런데 야곱의 인생이 그 이후에 순탄하게 풀렸냐? 하면 아니죠.
‘꾀 많고 속이는 자’였던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톡톡히 훈련을 받습니다. 형 에서는 잘 속여넘겨서 탄탄대로를 걸을 줄 알았는데 외삼촌 라반은 꾀 많고 잔머리 잘 굴리던 야곱보다 한 수 위였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아무리 꾀가 많고 잔머리를 잘 굴려도 도저히 못 당해내죠.
그래서 결국 야곱이 여러번 크게 당하고 나서야 이제 외삼촌 라반으로부터 나올수 있었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여기 32장의 상황은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는 길에 형 에서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야곱은 형 에서가 무서울까요? 안무서울까요? 무섭겠죠.
7절에 심히 두렵고 답답하다 얘기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장자의 축복을 빼앗아 갔으니 에서 입장에서는 야곱이 원수잖아요. 그러다보니 야곱은 어떻게 하면 형 에서로부터 자기 목숨을 부지할까 애가 탔던 겁니다.
32장 3절에 자기보다 먼저 사자들을 보내서 형 에서가 어떤 상태인지 살펴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형이 400명의 자기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거죠. 야곱 입장에서는 아직 형이 화가 풀렸는지 안풀렸는지 알 수 없잖아요. 동생 보러오는데 자기 수하들 400명을 왜 끌고 오냐구요. 게다가 형은 익숙한 사냥꾼이자 들사람이었으니 야곱은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겁니다. 그래서 7절에 야곱이 심히 두렵고 마음이 답답해졌고 자기에게 익숙한 자기 꾀와 자기 생각과 자기 계획들로 이 상황을 피해보려고 합니다.
2. 자기 꾀와 자기 계획을 이용하는 야곱
2. 자기 꾀와 자기 계획을 이용하는 야곱
2-1. 두 떼로 먼저 나눠놓고 기도하는 야곱
2-1. 두 떼로 먼저 나눠놓고 기도하는 야곱
(창 32:7)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자기 종들과 양과 소와 약대들, 자기가 갖고 있는 재산들을 두 떼, 두 무리로 나누는 겁니다.
그래서 혹시 형 에서가 한쪽 무리를 치게 되면 그동안 다른 한쪽에 있던 무리는 열심히 도망갈 수 있도록 꾀를 냈습니다. 야곱은 자기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서 최선의 수를 냈던 겁니다.
그리고 9절부터 12절까지 같이 보겠습니다.
9절부터는 야곱이 하나님께 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내용을 쭉 보면요. 9절부터 한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창 32:9)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창 32: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9절에 “하나님 저에게 은혜 베푸시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로 기도가 시작합니다.
그리고 12절에 “하나님 저에게 은혜 베풀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로 기도가 끝납니다.
이 기도 요약하면 무슨 내용이에요?
“하나님! 하나님이 전에 나한테 은혜 베풀어주신다고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지금 형 에서의 손에 죽게 생겼습니다. 하나님 저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셨는데 지금 당장 형 에서에게 죽게 생겼습니다. 하나님 말씀하셨던 내용 지키셔야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살려주세요~!!”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하는건 알겠는데 어떠십니까? 전라도 말로 “어째? 껄쩍찌근허지 않습니까?”
물론, 야곱이 지금 간절하지 않은건 아닙니다. 야곱은 간절해요. 자기 목숨이 달려있잖아요. 그런데? 자기 꾀를 내고 이 기도 이후에도 자기 나름대로 자기 목숨 부지해보려고 여러 계획들을 세웁니다.
자기 꾀와, 자기 머리와 자기 계획들이 없이 온전히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다면 우리가 이 구절 보면서 껄쩍찌근한 마음 안들겠죠? 보시면 기도 내용 속에서도 야곱이 어떤 사람인지 보이지 않습니까?
아주 긴급한 상황인데도 여기서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줘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하나님께 얘기를 하는 겁니다.
아니,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데 한번 하신 말씀을 지키시지 않겠냐구요.
약속하신 사실에 대해서 두 번이나 반복해서 언급하는 겁니다. 야곱이 기도할 때 두번이나 언급 안하면 하나님이 약속 까먹으시는 분이 아니시잖아요.
그런데 야곱은 기도제목에서도 하나님이 도와주셔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한참 설명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잊어버리시는 분이셔요? 아니잖아요. 이사야 49장 14절 찾겠습니다.
2-2. 나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2-2. 나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사 49:14~16) “(14)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15)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잊어버리셨습니까?” 하나님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어미가 자식을 잊어버리는 일이 있어도 내가 너를 잊는다? 잊지 아니한다? 잊지 아니할 것이다.
16절에도 우리를 어떻게 하셨대요? “내 손바닥에 새겼다”
참 마음에 위로가 되고 감사가 되고 은혜되지 않으셔요? 하나님 손바닥에 나를 새겨버리셨대요.
여러분, 가끔 꼭 기억해야하는데 종이같은건 없고 할 때 어떻게 하셨어요?
급한대로 손바닥에다가 펜으로 적습니다. 그런데 영원하시던가요? 아니죠.
어떤 진한 색의 펜으로 적어도 땀이 나거나, 손을 씻거나 하면서 시간이 지나면 결국 지워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하셨대요? 우리를 손바닥에 새겨버리셨답니다.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거에요.
[외우기] (욥 7:17~19) “(17)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마음을 두셨다는거에요. 여러분 아내가 되었건 남편이 되었건 항상 마음에 두고 계시죠? 어딜가나 항상 생각나고 하시잖아요. 안그러세요?
그럼 질문을 바꿔서 연애할 때 또는 결혼교제 하셨을때 또는 신혼 때 항상 마음이 콩밭에 가있잖아요.
콩밭이 어디에요. 남편은 아내 마음에, 아내는 남편 마음에 가있잖아요. 하나님이 그와 같으시다는 겁니다.
우리를 어찌나 사랑하시는지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내가 침 삼킬 동안에도 하나님 마음에 내가 있다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야곱의 약속을 하나님께서 잊으시겠어요. 절대 불가능한겁니다. 그런데 야곱은 혹시나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잊어버렸을까? 기도하는 겁니다.
2-3. 머리 좋은 친구들은 매를 번다
2-3. 머리 좋은 친구들은 매를 번다
이게 참 머리좋은 사람들은 그런 것 같아요. 우리도 간혹 학교 다닐 때 보면 매를 버는 친구들 있잖아요. 다들 기억 떠올려 보십시오?
뭔가 잘못해서 이제 혼나는 상황입니다. 그냥 잘못했다고,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그러면 되는데 꼭 이런저런 이유 얘기하면서 자기는 억울하다고 구구절절 설명하는 친구들 있잖아요.
그러면 선생님이 되었든 부모님이 되었든 그 얘기 듣고 “아 그래, 너 참 착한 학생인데 억울하겠구나. 너는 열외다” 이러신 분 보셨어요?
“이 녀석이~ 어디 말 같지도 않은 변명하고 있어” 그러고 더 때리시죠. 한대 맞을꺼 두대 더 맞잖아요. 그래요 안그래요? 머리는 참 좋은데 그냥 한번 꾹 참고 맞으면 금방 끝날텐데 꼭 사족을 달아서 더 맞는 친구들 있죠?
야곱이 약간 그런 과인겁니다. 하나님께 그냥 살려달라 매달리기만 하면 되는데, 먼저는 자기 꾀를 이용해서 살길을 도모해보는 겁니다. 재산들을 두 떼로 나누어서 혹시 형에 한쪽 치면 다른 한쪽은 도망가야겠다. 이렇게 자기 재산들을 모두 잃지 않을 것들에 대한 방비를 세워놓는거죠.
그리고나서 하나님께 기도하는거에요. 그런데 기도를 하면서도 하나님이 혹시나 내 기도 안들어주시면 어떡하지? 이런 마음이 있으니까, 아주 절박하고 급박한 상황에 놓여있는데도 무조건 간절히 매달리는 것보다 “하나님 약속하셨으니까 그 약속 지키셔야 하잖아요 저 살려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13절부터 같이 보시겠습니다.
2-4. 예물을 준비하고 상거가 뜨게 한 야곱(전적으로 하나님 신뢰안한 야곱)
2-4. 예물을 준비하고 상거가 뜨게 한 야곱(전적으로 하나님 신뢰안한 야곱)
(창 32:13) 야곱이 거기서 경야하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형을 위한 예물을 준비하는 겁니다. 혹시나 형을 만나기 전에 먼저 예물들을 잔뜩 보내면 형의 화가 좀 누그러들지 않을까? 그런 지혜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도 부족해서 어떻게 했죠? 16절입니다.
(창 32:16)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눠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 종들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상거가 뜨게 하라 하고
종들에게 이 예물들을 맡기고 먼저 가게 하고 ‘상거가 뜨게 했습니다’
상거가 뜨게 한다는게 무슨 말이냐면요. 화가 난 에서가 한쪽 떼를 치면 다른 한쪽이 도망갈 수 있는 시간을 벌게끔 서로 거리를 멀리 둬라. 그런 말이죠.
지금 야곱의 이 모습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입니까? 아니면 양다리 걸치고 있는거에요? 말로는 하나님 건져 내라고 하면서 자기 나름의 살길을 다 모색하고 있잖아요. 하나님이 혹시나 약속 지키시지 않으시면, 하나님이 혹시나 나를 건져내주지 않으시면 내 꾀로 한번 살아나야겠다. 이런 마음이 깊숙한 곳에 있는 겁니다.
3. 긴 세월 훈련받은 야곱
3. 긴 세월 훈련받은 야곱
야곱이 형 에서 만나기전에 무엇하다가 왔습니까? 자기보다 한수 위였던 외삼촌 라반에게서 20년간 훈련받다가 이제 겨우 가나안 땅을 출발한 참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뛰는 놈 위에?” 누가 있죠? 나는 놈. 바로 외삼촌 라반이 나는 놈이었습니다.
야곱은 나는 놈이었던 라반 밑에서 죽어라고 고생만 했습니다. 야곱이 아무리 꾀가 많아도 라반에게 항상 지는겁니다. 처음에 야곱이 라헬에게 반해서 라헬을 아내로 얻으려고 외삼촌 라반의 밑에서 7년을 일했는데 라반이 야곱을 속여서 라헬은 못 얻고 레아를 아내로 주었죠. 그리고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또 7년을 일했던 겁니다. 그리고도 라반이 정당한 품삯을 야곱에게 주지 않고 열 번이나 품삯을 변역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계속 월급 준다고 하면서 말을 바꿔서 푼돈만 주는 겁니다. 그렇지만 이런 시간 가운데서도 결국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정당한 몫을 채워주시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20년이란 긴 세월동안 야곱은 훈련받았습니다.
그래서 라반 밑에서 죽어라고 고생하다가 하나님 말씀대로 가나안 땅으로 떠나게 됩니다. 라반이 야곱을 잡으러 쫓아왔으나 하나님이 또 라반의 꿈에 나타나서 야곱을 구원하시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이정도 경험했으면 이제 그만 훈련받아도 될텐데, 좀 살만하니까 야곱을 철천지원수로 생각하고 있는 형 에서를 만나게 되는 겁니다. 야곱 입장에서는 외나무 다리에서 원수를 만나게 된거죠. 하나님은 야곱에게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는데 돌아가려면 에서를 만나야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속담이 지금 야곱의 눈앞에 펼쳐진겁니다.
최소한 외삼촌 라반 밑에 있을때는 고생만 하고 힘들기만 했지 목숨의 위협은 받지 않았는데 형 에서를 만나서 재산 지키는건 고사하고 잘못하면 목숨도 잃게 생긴 겁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야곱은 어때요? 충분히 많은 훈련을 받았고 하나님의 기적들도 여러번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기 꾀, 자기 생각, 자기 주장, 자기 계획을 끝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7절, 9절, 12절, 13절, 16절까지 보면 야곱은 먼저 자기 꾀를 쓰고 그 다음에 하나님 붙잡는거죠. 끝까지 자기 육신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으로 기도드립니다.
3-1. 하나님이 한 번 불어버리면 날아갈 인생들, 계획들, 자기 꾀
3-1. 하나님이 한 번 불어버리면 날아갈 인생들, 계획들, 자기 꾀
그리고 기도하고 나서도 안심이 안되니까 또 다른 계획을 세우잖아요.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웃기겠어요? 하나님 손바닥 안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면서 제 딴에는 자기 힘으로 어려움을 피해서 간다고 생각하고 있는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주 우스운 인생들이지 않습니까?
시편 2편 찾겠습니다. 시편 2편에 어떻게 말씀을 시작하십니까?
(시 2: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시 2:4)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시 2:9)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사람들이, 열방과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 것을 보고 4절에 하나님께서 비웃으신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9절에 철장으로 깨뜨리고 질그릇 같이 부숴버리시겠다 하셨습니다.
뒤로 좀만 넘겨서 33편으로도 가보겠습니다.
(시 33:10)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시 33:11)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열방의 도모, 이 세계의 열방이 뭘 도모합니까? 마치 창세기 11장에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똘똘 뭉쳐서 바벨탑을 쌓으려고 하는 것처럼 이 대 꼭대기를 하늘까지 닿게 하고 우리 이름을 내자. 하나님 없이도 인간들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하는 인간이 하나님을 도전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한 번 불어버리면 날아갈 인생들인데 모르는 거에요.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인간들이 별별 계획을 세우고 자기 나름대로의 사상을 세우고 이상과 어떤 목적을 정해보지만 무효다 그 말이에요. 무효. 인간들이 쌓아올린 바벨탑 무너뜨리시고 인간들이 세운 계획들을 홍수로 싹 한번 쓸어버리셨습니다. 이제는 불로 싹 태울 겁니다.
11절에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목적만이 영영히 설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지식이 많고 지혜롭고 가진바 재산이나 능력이나 힘이 많으면 뭐할까요? 하나님이 훅 불어버리시면 어때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날아가버릴 인생들인데 자신의 처지는 생각지 못하고, 자기가 가진 것을 끝까지 의지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은 생각지 못하고 끝까지 자기 생각과 자기 꾀와 자기 욕심과 고집을 못 버리고 있는 겁니다.
3-2. 참 변하지 않는 야곱, 그 모습이 사실은 우리 각자다. 우리 각자에게도 훈련의 과정이 분명히 존재한다
3-2. 참 변하지 않는 야곱, 그 모습이 사실은 우리 각자다. 우리 각자에게도 훈련의 과정이 분명히 존재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훈련받을 때 자기의 잘못된 생각과 습관을 빨리 버리지만 야곱처럼 끝까지 그것을 붙잡고 있으면 어떻게 돼죠? 하나님 앞에 그것이 깨어질 때까지 훈련받는 겁니다.
창세기 32장 이 짧은 한 장 안에서도요. 많은 교훈을 우리가 배울 수 있지만요.
야곱이란 이 한 사람만 주목하면 어때요? 참 특이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참 변하지 않는 사람이란걸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겁니다.
“아! 그만큼 훈련받고 고생하고 하나님 능력도 경험했으면 이제 좀 자기 생각도 좀 버리고, 자기 꾀도 좀 버리고, 자기 주장도 버리고, 자기 계획도 버리고 하나님만 의지할법도 한데 참 안변하네?”
그런데 야곱의 모습이 사실은 우리 각자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잖아요.
창세기 32장 시작을 어떻게 하냐면 같이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32장 1절
(창 32:1)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창 32: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납니다.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빼앗아서 도망쳐 나왔을 때는 누구를 만났습니까? 벧엘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게 되잖아요. 그런데 지금 라반으로부터 도망쳐 나왔을 때 또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32장 2절에 이 사자들이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하나님의 군대였습니다. 하나님의 군대의 모습으로 야곱 앞에 나타났었습니다.
처음 길을 떠났을 때도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셨고 에서를 만나는 길에서도 하나님은 항상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에서와 400인의 수하를 맞닥뜨리기 전에 하나님의 군대가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보았잖아요.
하나님의 군대까지 만났으면 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해야 옳잖아요. 그런데도 야곱은 끝까지 자기 생각, 자기 계획 의지하는거 보세요.
자, 창세기 한구절 더 찾겠습니다.
(창 47:8)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연세가 얼마뇨 (창 47:9)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이 바로를 만나 자기 인생에 대해 말하는데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내 인생 돌아보니 험악한 세월이었다.” 말하고 있습니다.
훈련을 아주 험하게 받은거에요. 그런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훈련 받을 때 내 생각, 내 꾀, 내 주장, 내 계획들. 하나님쪽으로 빨리 고치는게 중요할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말을 쓰곤 합니다. “사람은 고쳐쓰는게 아니다” 제가 찾아보니까요.
이게 우리나라에만 있는 말이 아니구요. 서양에도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통상적으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보니까요?
사람은 도무지 안바뀐다는 사실을 알았다는겁니다.
교육도 해보고 체벌도 해보고 이런저런 방법으로 사람을 바꿔보려고 해도요.
사람이 그만큼 변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세상 사람들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고쳐쓰는게 아니라는 말이 있는 거잖아요.
우리도 구원받기 전까지 도무지 바뀌지 않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내 머리와 내 생각이 우선이었고 내 힘과 내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내 인생 내가 사는거라 생각하며 내 인생의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후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변하게 할 수 없고 어떤 교육도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하게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구원은 사람을 변하게 합니다. 그토록 바뀌지 않았던 사람도 조금씩 바뀌는거에요.
억지로 바뀌는 겁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변화 안될 수가 없잖아요.
술, 담배 좋아하시던 분들도 시간이 지나면 다 끊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던 취미들, 오락들 다 멀리하게 됩니다. 왜요?
내 소속이 완전히 바꼈거든요. 이전에 나의 소속은 공중 권세 잡은 마귀의 아들이었다면, 이제 내 소속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잖아요.
나는 누구에게 속한 사람입니까?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딱 되었잖아요.
그런데 한순간에 확 바뀌던가요? 우리 모두가 지금도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 생각해보는 야곱을 보면 마치 내 모습과 같지 않습니까?
내 육신이 강해서 끝까지 하나님 말씀에 100%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야곱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끝까지 자기 생각 고집하고 자기 육신가지고 살아가기를 하나님이 바라지 않으시죠.
창세기 32장 24-31절입니다.
24절에 야곱은 이 곳에서 하나님의 사람과 씨름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께서 야곱의 육신을 꺾으시죠.
육신으로는 야곱에게 무엇이 남았습니까? 31절에 환도뼈가 위골됨으로 절름발이가 되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신앙적으로는 끝까지 매달림으로 하나님께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과 축복을 얻게되지 않았습니까?
내 육신이 강해서 끝까지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내 모습을 어떻게 굴복시킬 수 있을까?
훈련받는 동안 그 과정속에서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 붙잡고 안놔줘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야곱의 인생은 훈련받는 삶의 연속이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찾아보겠습니다.
3-3. 결국 하나님의 사람이 된 야곱
3-3. 결국 하나님의 사람이 된 야곱
창세기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창 46:1)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행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니 (창 46:2)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불러 가라사대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창 46:3)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창 46: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창 46:5)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발행할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바로의 태우려고 보낸 수레에 자기들의 아비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웠고 (창 46:6) 그 생축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을 이끌었으며 야곱과 그 자손들이 다함께 애굽으로 갔더라
2절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야곱에게 나타나시고 야곱을 부르셨습니다.
3절에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4절에 “내가 너와 함께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다”
3절에 야곱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알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1절에 브엘세바에 이르러 야곱이 무엇했죠? 하나님께 제사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제사드렸던거에요.
지금 여기 브엘세바는 가나안 땅의 최남단입니다.
성경보면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이런 말씀들이 많죠. 단은 이스라엘 최북단이고 브엘세바는 이스라엘 최남단입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 말은 가나안 땅 전체를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브엘세바에서 제사를 드렸다는 그 말은 애굽으로 넘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했던거에요. 하나님이 이제라도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 하면 방향을 돌리려고 했다는거죠.
이전까지의 야곱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겁니다. 이전까지는 자기 계획대로, 자기 뜻대로 살았다면 이제는 훈련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기 원하는 야곱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잖아요.
네가 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야곱은 하나님의 사람이 확실히 되었고 인생의 방향이 자기 계획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방향대로 가려고 했던 겁니다.
(외우기) (잠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잠20:24)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잠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또 창세기 48장 10절에 보면 야곱이 죽을 때가 가까워져서 요셉의 자녀들을 축복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창48:10)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인하여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비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13절-14절
(창 48:13) 우수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좌수를 향하게 하고 좌수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우수를 향하게 하고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창 48:14)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
요셉은 당연히 장자인 므낫세가 장자의 축복을 받아야 하니 야곱의 오른편에 므낫세를 놓고 왼편에 차자인 에브라임을 두었는데 14절에 야곱이 팔을 어긋맞겨 머리에 얹었던 겁니다. 이렇게.
17절-19절
(창48:17-19) 17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18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19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그러니까 요셉이 야곱의 손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서 장자인 므낫세에게 오른손을 얹어달라고 하니까 19절에 야곱이 이렇게 말하죠.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두번이나 강조해서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10절대로 나이가 많아서 또 눈이 어두워서 착각해서 차자인 에브라임의 머리에 오른손을 얹어 장자의 축복을 내린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그렇게 했다는거죠.
험악한 세월을 지나온 야곱은 더이상 자신의 꾀와 생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겁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장자인 므낫세가 장자의 축복을 받는게 맞지만 야곱은 이제 자신의 생각과 꾀를 전부 버리고 하나님의 계획과 뜻, 하나님의 섭리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겁니다.
5. 하나님의 사람에 속하고 선한 일에 열심해야 한다.
5. 하나님의 사람에 속하고 선한 일에 열심해야 한다.
야곱이 평생을 훈련받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격을 갖춰갈 때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어요.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5-17)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여기 교육이라고 했을 때 교육이라는 단어보다는 훈련이라는 단어가 사실은 원어에 더 적절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교훈하시고 책망하시고 바르게 하시고 그런데 의로 교육한다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다운 인격을 갖추게 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고, 또 동시에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는 목적도 있고, 또 그리스도인다운 인격을 갖추고 의가 무엇인지를 알아서 의에 순종할 수 있는, 즉 의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그 목적을 위해서 주셨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단지 교육한다는 의미보다는 훈련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게 사실은 내포되어 있습니다.
5-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5-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함께 참여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뭡니까? 선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예요.
[외우기] (엡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서 지으심 받은 거예요.
[외우기]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도서 2장 14절에도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
그런데 여기 디모데후서 3장 17절에는 **“모든 선한 일”**이라 그랬어요. 선한 일이 딱 하나가 아니죠. “모든 선한 일” 무엇이 선한 일입니까? 가장 먼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귀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영혼을 건지는 전도는 정말, 정말 선한 일이죠. 그리고 하나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봉사에 전도하는 그 일, 교제하는 그 일을 위해서 봉사하는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 봉사에 참여하는 것도 선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형제자매와 교제해 주는 일, 형제자매가 어려운 형편에 있는데 위로해 주는 일, 그리고 형제자매의 어려움을 보고 구제하는 일, 그래서 교회 안에서 되어지는 모든 것들, 선한 일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 끝나면 형제자매를 자동차에 태워서 가는 일도 선한 일이잖아요? 선한 일 얼마나 많아요? 그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그리고 디모데전서 6장 11절에는요
(딤전 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바울 사도가 디모데를 향해서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했거든요.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사람의 신분을 얻은 것도 정말 영광이고, 그리고 훈련의 과정을 거쳐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인격을 갖춰서 하나님의 역사에 함께 참여해서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것은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리어지는 것은 훨씬 더 큰 영광입니다. 그 영광은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누구누구의 사람들이라고 할 적에요. 앞에 누구 이름이 거론되느냐에 따라서 그 축복과 위치와 영광이 다르잖아요.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했던 사람이 참 많잖아요. 대표적으로 누가 있습니까?
5-2. 40년동안 미디안광야에서 훈련받은 모세
5-2. 40년동안 미디안광야에서 훈련받은 모세
모세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 위해서 훈련받았습니다. 모세가 몇년동안 훈련받았는지 아시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는데 쓰임받기 위해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 받았잖아요.
모세는 애굽의 왕자였기 때문에 애굽의 모든 궁중 문학을 통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는 것은 불가능해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이란 긴 시간동안 훈련받았습니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고 자기는 할 수 없다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오래 기다리는 훈련을 받았잖아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훈련 받았기 때문에 그 말 안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40년동안 인도하는 데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격을 갖추지 않았으면 그 일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을 거예요.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훈련받은 결과 모세는 묵묵히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기다리는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5-3. 왕위에 오르기까지 십수년을 훈련받은 다윗
5-3. 왕위에 오르기까지 십수년을 훈련받은 다윗
소년이었던 다윗이 선지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당장 왕위에 올라갔던게 아니죠. 십수년간을 갖은 고생을 하고 나이 30에 되어서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광야로 산으로 들로 동굴로, 심지어 적대국인 블레셋까지 도망다니는 신세를 십수년을 하고서야 다윗은 왕위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비록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는 간음죄를 저지르는 일이 있었지만 사도행전 13장에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로 이름 불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세워진 수많은 이스라엘 왕들을 평가할 때 항상 “다윗의 행함같이” “다윗의 길로 행하고” 란 평가가 들어가잖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수년 훈련받은 그 시간들이 다윗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했음에 분명하지 않습니까
5-4. 다메섹에서 회심한 사도바울도 훈련을 통과하고 나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였다
5-4. 다메섹에서 회심한 사도바울도 훈련을 통과하고 나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였다
바울 사도도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 아라비아에서 3년 동안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고향인 다소에 내려 가서 그 나름대로 또 훈련을 받았을 거예요. 그 훈련을 받은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회심을 했을 때 완전한 회심을 이루었던 겁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아주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거나 하나님의 일을 행하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5-5. 부분적으로만 하나님의 일에 충실했던 요나
5-5. 부분적으로만 하나님의 일에 충실했던 요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나도 그렇죠.
(욘1:8-10)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9)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10)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서 배 제일 밑층에 내려가 깊이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풍랑이 쳐서 이제 누구 때문에 이와 같은 풍랑이 생겼는지 제비를 뽑았던겁니다.
그런데 누가 뽑혔죠? 요나가 뽑혔습니다. 그리고 선원들이 요나에게 어떤 질문을 했습니까?
네 생업이 무엇이냐? 너 직업이 무엇이냐? 물었습니다.
요나의 직업이 무엇이에요. 하나님 말씀 전하는 전도자였습니다. 우리의 진짜 직업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전도하기 위해서 일을 하며 사는 것이지 우리의 진짜 직업은 전도자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겁니다.
그런데 간혹 세상 직업이 진짜 직업으로 착각하고 사시는 분들이 계셔요. 아닙니다. 우리의 진짜 직업과 해야할 일은 전도잖아요.
어디서 왔느냐? 고국이 어디냐? 어느 민족에게 속하였느냐?
여기서도 누구 소속인지 물어보고 있잖아요. 네가 뉘 사람이냐?
우리는 어디에 속했다고 말해야 합니까?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임을 당당히 밝혀야 할겁니다.
(빌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이렇게 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물어보는 겁니다. 네가 어디로 가느냐?
대체 목적이 무엇이냐? 물어보고 있잖아요. 우리가 무엇이라 대답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끄럽지 않게 당당하게 우리 삶의 목적을 밝혀야 맞잖아요.
요나처럼 불순종하다가 세상 사람들에게 책망받아서는 결코 안될겁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살아나왔으면 이제 정신차리고 전심을 다해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힘써야 할텐데 어떻습니까? 불평 불만 가득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 각자는 너무나도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들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 분명히 알 수 있을 겁니다.
6. 하반기에는 복음 선포에 더욱 힘쓰는 우리들이 되자
6. 하반기에는 복음 선포에 더욱 힘쓰는 우리들이 되자
마지막을 성경 한구절 더 찾겠습니다.
(시 73:22~28) (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지 못하던 때에는 마치 짐승과 같이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구원받고 나서는요? 야곱과 항상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이제 나와 항상 함께 하시며 내 오른손을 붙드시는 겁니다. 그리고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말씀으로, 또 훈련을 통해 나를 인도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야곱의 인생 전체를 통한 하나님의 훈련을 보면 어떻습니까? 쉬운 훈련이 아니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외우기) 욥 23:10.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끝에가서는 내 육신에 있는 잘못된 찌끼들을 제하고 정금이 나오게 하시잖아요. 그리고 결국 주님만 바라보고 살 수 밖에 만드시는 겁니다. 야곱의 꾀와 머리와 육신의 힘을 모두 제하시고 온전히 주님만 바라보는 나그네 인생으로 딱 바꿔주시잖아요.
25절에 이 세상에 주님 외에 바라볼 것이 없어지고 26절에 육신은 점점 쇠약해져 가지만 28절에 이제 나의 남은 소망은 주님을 가까이 하고 주의 행사를 전파하는 것만 남는 겁니다. 복음 전하는 일만 남은 거에요.
야곱이 험난한 세월. 고된 훈련을 통해 자신의 소속과 가야할 방향을 확실히 했던 것과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훈련 속에서 각자의 소속과 삶의 방향을 확실히 정해야 할 겁니다.
다시 본문 말씀 같이 보시겠습니다.
“네가 뉘 사람이며” 저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네가 어디로 가느냐” 복음 전하는 일을 하러 갑니다.
“네 앞엣 것은 뉘 것이냐” 내 재능, 내 시간, 내 물질, 내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니 복음 전하는 일에 귀하게 쓰겠습니다. 이게 맞는겁니다. 이게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답일거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번 하계수양회 다녀오시면서 다들 마음에 불꽃 하나씩 품어오셨을거에요. 무더운 날, 복음을 위해서 희생하고 수고하고 헌신하고 전도하는 그 모습을 보며 어떤 분은 열정의 불꽃을 어떤 분은 2024년 전반기를 되돌아보며 반성의 불꽃을 어떤 분은 각오와 결심의 불꽃을 품어오셨을겁니다.
우리가 오늘 생각해본 이 말씀 한구절을 우리 마음속에 항상 두어서 이 물음에 착념하고 또 착념할 필요가 있을겁니다.
남은 한해에는 이 말씀을 지키며 사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