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룩으로 부르신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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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바룩으로 부르신 은혜
예레미야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1~45장, 46~52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론 세부적으로 더 나눠야 하지만, 45장을 기준으로 본다면 45장까지는 남유다의 멸망과 회복을, 46장 이후에는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신탁들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 45장은 유다 백성에 관한 예언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45장은 남유다 전체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다소 뜬금 없이 ‘바룩’이라는 개인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룩 개인에게 주시는 사사로운 위로를 건낸 것처럼 보여지죠. 하지만 하나님의 의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예레미야라는 책은 바룩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주어진 신탁을 대필한 책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교훈적인 목적을 가지고 바룩이, 또는 바룩의 후계자가 책의 구성을 연대를 섞어서 재배열했습니다. 그래서 36장의 배경이 45장에서 또 등장합니다. 45:1절 읽어봅시다.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에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이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니라 그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1절에 보면 “여호야김 넷째 해”라는 배경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배경이 언급될 때는 그냥 지나치면 안됩니다. 새로운 주제가 시작된다는 일종의 표지판입니다.
이때가 B.C. 605년 경인데, 이때 여호야김 왕이 예레미야의 예언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태워버립니다. 친애굽파였던 여호야김이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분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태워버린 것이죠. 36:23절 읽어드리겠습니다.
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하면 왕이 면도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
28절도 봅시다.
너는 다시 다른 두루마리를 가지고 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불사른 첫 두루마리의 모든 말을 기록하고
왜 다시 기록하라고 하신 것일까요? 20여년 후에 있을 멸망에 대비해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레미야의 원독자들은 바벨론 유수 초기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미 나라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이는 예레미야의 설교를 직접 들었을 것이지만 어떤 이는 그렇지 못했을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유다 백성들이 열방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디아스포라라고 하죠. 구전으로 전할 방법이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록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할 방법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와 바룩과 그의 후계자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적 설교를 어떻게든 책으로 보존하려고 했습니다. 바룩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해서 예레미야의 소망의 메시지를 듣지 못한 이들에게,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 절망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가 담겨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예레미야의 설교를 대필하여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예레미야서를 보존하는 과정이 언제까지 이루어졌냐면 예레미야와 바룩이 애굽에 끌려갔을 때까지, 유다의 멸망 이후 B.C. 580년 경까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와 바룩 모두 애굽에서 죽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즉 국내외 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죽음이 도사리는 환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포로된 백성들에게 소망을 전하기 위해 기록된 말씀을 보존하신 겁니다. 이 사명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예레미야와 바룩의 모습을 45장이라는 짧은 장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도대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셔서 이렇게 말씀을 보존하셨을까요?
두루마리가 여호야김 왕에 의하여 태워졌을 때, 본문은 바룩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3절에서,
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토록 쉽게 소멸될 수 있다니?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쉽게 짓밟힐 수 있다니? 그렇다면 어쩌면 하나님의 약속도 인간의 힘에 의해, 열강의 힘에 의해 쉽게 짓밟힐 수 있겠구나.” 이런 마음을 바룩이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이렇게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4-5절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서 “찾느냐”, “찾지 말라”라고 번역된 원어의 의미는 구하다, 갈망하다, 마치 어떠한 것을 직접 대면하고 경험하기를 강하게 원하는 뉘앙스입니다. 역대하 7:14절에서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크고 영광되고 광대한 것을 경험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거예요. 정말 하나님을 위한 게 아닌 나의 욕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렇게 하셔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 아니에요?”라는 의문이 들 때라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왜죠? 모든 육체에 재난, 즉 죄를 제거하려면, 이스라엘이 회복하려면, 죄악으로 점철된 이스라엘이 무너져야 합니다. 이전 것은 죽어야 해요. 하나님의 영광이 마치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슬픔과 절망, 고난과 탄식이 있어야 해요.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걸까요?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즉 바룩의 생명을 보존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들을 보호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곳에서 핍박을 받은 바룩을 보호하심으로써 앗수르로, 바벨론으로, 애굽으로, 페르시아로 흩어진 백성들에게 소망을 꼭 전하시려는 하나님의 긍휼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영광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아닌 하나님만 드러나니까. 그래서 45장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거예요. “나를 버리고 포로된 너희를 내가 포기하지 않았다”
45장을 읽은 포로기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소망을 품었을 겁니다. “나를 살리시려고 바룩을 보호하셨구나. 바룩과 같이 이방 땅에서 핍박 받고 있는 나도 이 말씀을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을 보존하시는구나. 그렇다면 나를 통해서 이 말씀이 증거되고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겠구나!”
그래서 45장은 바룩 개인에게 사사로이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죄악에 빠진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버리시기까지 하시면서 그분의 말씀을 보존했다. 마치 십자가처럼. 죽어야 다시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처럼.” 자신의 영광을 가리시면서 우리를 살리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45장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이 잘 안보이시나요?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은 자신이 세우신 것도,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허시는 분이십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구원 받았는데, 영생을 얻었는데, 혹시 충분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나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찾는 것 아닐까요?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전서 1: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말씀을 영접하신 여러분, 여러분 안에 살아있고 활력이 있는 그 말씀이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을 오늘 하루도 늘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바룩으로 이미 사용하고 계시다는 사실, 여러분의 삶을 통해, 내가 스스로 볼 때 미련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나의 연약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꼭 믿고 확신하시면서 믿음의 열매를 맺는 오늘 하루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