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8.09. 금요기도회.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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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트 후 사도신경
멘트 후 사도신경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본문
본문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서론
서론
작년 2월 미국의 애즈베리 대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미국은 기독교를 배경으로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에 과목 중에 예배가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요, 보통 채플이라고 부릅니다. 애즈베리 대학도 마찬가지구요.
2월 8일 수요일 여느때와 다름 없는 예배 시간이 시작되었고, 그날 설교를 담당했던 잭 미어크립스 목사님은 로마서 12장을 본문으로 해서 “행동하는 사랑”이라는 주제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스스로 딱히 대단한 설교를 한 것도 아니었다고 생각했기에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전에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자리에 남아서 기도하십시오”하는 마지막 권면만을 남기고 얼른 예배당을 떠났습니다. 학생들도 예배가 마치자 마자 저마다 흩어져 교실로 식당으로 기숙사로 향했구요. 여기까지는 평소와 다를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권면을 따라 스무 명 남짓 되는 학생들이 남아서 기도하는 중에 별안간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시작되었고, 자기가 경험하고 있는 이 특별한 역사를 지인들에게 즉각 공유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안,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죄악에 대한 생생한 감각,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느끼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고 예배당을 찾은 학생들 또한 현장에 들어서자 마자 성령의 강력한 임재에 사로잡히게 되고, 이 특별한 역사를 마찬가지로 지인들에게 또 공유하고, 그래서 또 다른 학생들이 예배당을 찾게 되고, 이것이 반복되어 삽시간에 1,500명 정원의 예배당이 가득차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날부터 밤낮할 것 없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학생들의 자발적인 예배가 이어졌지요.
애즈베리 대학의 한 예배당에 성령께서 임재해 계신다는 소식은 SNS를 통해 인근의 대학은 물론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여,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예배자들이 몰려든 탓에 예배당에는 항상 사람이 가득차 있었고, 한 번 예배당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6~7시간씩 기다려야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시작된지 사흘만에 이제 이곳을 찾는 사람은 매일 15,000명으로 늘었습니다. 대학이 위치한 윌모어 시티의 전체 인구가 6,000명인 것을 생각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숫자인지 아시겠지요? 대학교 건물은 물론이고 도시 전체가 사람으로 가득 찼습니다. 도시의 경계에 더 이상 주차할 자리가 없다는 큰 표지판이 붙는 진풍경이 벌어지기까지 했던 이 특별한 역사는 무려 17일간 연속으로 이어지다가 안전의 이유로 24일 공식적으로 끝이 났습니다. 이 기간 동안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를 경험하여 영적인 회복과 각성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가리켜 부흥이라고 부릅니다. 영적인 생명을 잃고 죽어가는 교회를 다시 살리는 성령님의 특별한 역사 말입니다.
부흥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부흥을 주시면 좋은거고 아니면 어쩔 수 없고”하는 정도의 마음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부흥을 주시길 간절히 사모합니다” 하는 만큼의 마음이십니까? 아니면 이보다 더욱 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반드시 부흥을 주셔야 합니다”과 같은 마음이십니까? 제가 말한 순서대로 1, 2, 3번이라고 번호를 매긴다면 내 마음과 같은 것은 몇 번인가요? 본래 하나님이 뜻하신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알면 알수록,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본래의 뜻과 얼마나 멀리 벗어나 있는지 알면 알수록, 부흥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커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너무도 높아 보이고 우리의 현실은 너무 낮아 보이기 때문이며, 성령님의 특별한 역사가 아니고서는 이토록 깊은 타락과 침체를 반전시켜 회복케 하고 각성케 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죠. 그러니 부흥에 대해서 그닥 기대나 간절함이 없다는 것은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모르거나, 지금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깊이 타락하고 침체되어 있는지를 모르거나, 아니면 둘 다 일 수도 있겠네요.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반드시 부흥을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새 일을 행하여 주십시오.”하며 부르짖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직 마음이 미적지근한 분들을 위해 몇 가지 통계를 준비했습니다. 먼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라는 단체에서 실시한 작년도의 여론조사의 내용 중 일부인데요, 1) 지금 화면으로 보고 계신 그래프는 한국 교회의 신뢰도를 나타냅니다. 우리 자신은 이웃의 눈에 어떻게 비춰질까요? 충격적이게도 우리는 이웃에게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라 믿지 못할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단 21%만, 다시 말해서 5명이 모인 중에서 한 명만이 우리를 믿을만 하다고 생각하지요. 2) 2008년 1차 조사때부터 지금까지 한국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대폭 증가하여 오늘날 이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사회 전반적인 영역에 얼마나 기여했다고 여겨질까요? 3) 지금 화면으로 보고 계신 그래프는 그에 대한 응답을 보여주는데요, 한국 교회의 신뢰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딱히 기여한 바가 없다고 여겨지는 것이지요. 4) 앞으로는 이런 상황이 나아질거라고, 그래서 교회가 사회에 크게 기여하게 될 거라고도 기대하질 않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신뢰를 잃고, 기대를 잃었을까요? 우리는 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도가 성도다움을 잃었고,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었기에 그렇습니다. 이미 온 사회가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것을 아는데 그렇질 못하고, 오히려 신앙이 없는 사람들보다 더욱 끔찍한 일을 저지르며 상식 이하의 수준으로 타락해가니 당연히 신뢰를 잃고 기대를 잃을 수 밖에요.
우리의 침체와 타락은 자연스럽게 기독교 인구 감소를 불러왔습니다. 5) 작년 종교별 인구 조사를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기독교 인구는 15%까지 떨어졌습니다. 한때 천만을 자랑했던 기독교 인구는 이제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770만 명으로 계산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빼야할 것들이 있지요. 먼저 이단-사이비의 숫자가 기독교 인구의 10% 쯤으로 여겨지니 77만을 빼면 693만 명이 됩니다. 또 종교를 기독교라고 체크하긴 하지만 교회를 출석하지 않는 사람의 숫자가 25% 쯤으로 여겨지니 173만을 빼면 520만 명이 됩니다. 어림잡은 수치이긴 합니다만, 기독교 인구는 과거에 비해 40% 이상 줄었다고 볼 수 있어요. 더욱 충격적인 것은 감소한 기독교 인구의 대부분이 20대부터 40대 까지의 젊은 층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10년 뒤에는 기독교 인구가 10%까지 떨어지고, 그나마 남은 자들도 노년층이 대다수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생명을 잃어 늙고 병들어간다는 분명한 신호이지요. 이런 현상이 계속된다고 상상해보십시오. 타락과 침체와 쇠퇴의 끝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생명을 잃은 교회는 죽습니다.
6) 교회가 죽는다는 말이 생소하실 것 같습니다만, 이것은 상당히 권위있는 교회 연구가가 40년의 오랜 목회와 연구 끝에 조심스럽지만 확신을 가지고 사용한 말입니다. 교회 연구가이자 목사인 톰 레이너 목사는 최근 “죽은 교회를 부검하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7)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죽어 가고 있다. 미국만 해도 10만 개의 교회가 죽음으로 향하는 징후들을 보인다. 자신의 교회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누구도 많은 세월 동안 몸과 마음을 바쳤던 교회를 잃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교회들은 죽는다. 물론 보편 교회(universal church)는 결코 죽지 않는다. 하지만 개별 교회들은 죽는다.”
그는 이 책에서 여러가지 죽어가는 교회들의 증상에 대해 밝히고 그에 따르는 해결책을 제시하는데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만이 죽어가는 교회를 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셔서 새로운 일을 일으키셔야만 죽어가는 교회는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새 일, 성령님의 특별한 역사, 다시 말해 부흥! 이것을 두고 간절히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이 이제 좀 생기셨습니까? 우리가 선택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시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할 정도의 성격이 아니라구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반드시 주셔야 합니다”하고 매달려야 할 성격의 것입니다.
본론
본론
이제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더욱 분명히 알아봅시다. 이 이사야서는 내용으로 보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앗수르를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과 이후에 올 구원의 날에 대한 예언이 첫 부분에 중요한 내용으로 담겨 있고, 그 다음으로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들 중 남은 자들이 구원을 받고 귀환하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이 둘째 부분에 담겨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귀환 이후 예루살렘이 영광스럽게 회복되고 열방이 구원을 얻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이 셋째 부분에 담겨 있지요. 이 중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셋째 부분에 해당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읽은 이 대목에서 회복될 예루살렘의 영광스런 모습에 대해 아주 감동적인 선언을 하시고, 이 모든 일을 하나님 자신의 열심으로 이룰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시지요.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사야 62:1 (NKRV)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시온이라는 말은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또 다른 말, 즉 별칭인데요, 여기서 시온과 예루살렘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도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 거주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긴 포로생활 끝에 이곳에 거주하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주길 원하시고, 무엇을 회복시키시길 바라실까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구원을 주시기를 원하시고, 그들을 의로운 모습으로 회복시키시길 바라십니다. 그저 하나님의 백성이 이전의 비참한 신세에서 벗어나 부족함 없이 사는 정도의 모습을 바라시는게 아니라, 그들이 의로운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신실한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시며 열심히 일하실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이어서 나오는 2절과 3절에는 하나님께서 열심히 일하신 결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지에 대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 가지 변화를 겪게 될텐데요, 함께 한 부분씩 나누어서 읽어봅시다.
이사야 62:2–3 (NKRV)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먼저 2절 상반절입니다. 어떤 변화가 약속되어 있습니까? 이웃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의로운 모습을,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확 와닿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어질고 성실하고 진실해서 살아가는 모습이 참 멋지게 보이는 것입니다. 인격이 훌륭해서 그 사람 자체가 너무 멋지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이웃들이 보고 기꺼이 신뢰하고 존경할만한 그런 변화를 만들어내실거라고 분명히 약속하시고 계십니다.
다음 2절 하반절입니다. 어떤 변화가 약속되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정하실 새 이름으로 불릴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4절부터 드러나니 잠시 후에 자세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다음 3절입니다. 어떤 변화가 약속되어 있습니까? 자신의 백성들을 가장 귀한 보물과 같이 여기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신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나타낼 귀한 존재로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이웃들에게 높이 여겨지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귀하게 여겨질만한 그런 변화를 만들어내실거라고 분명히 약속하고 계십니다. 인간의 눈에만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지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도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질 정도로 그들을 변화시키시겠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도 그저 피조물 중의 하나일 뿐이고, 더욱이 피조물 중에서도 가장 골칫덩이였을 뿐인데, 그런 자들을 향해 이런 약속을 주시다니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놀랍고 귀한 약속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4절과 5절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불리게 될 새 이름이 무엇인지, 이전과 비교해보았을 때 어떻게 변화가 되는 것인지에 대해 나타납니다. 이 부분은 개역개정에서 일관되게 번역되어 있지 않아서,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제가 다시 번역을 해보았습니다. 두 부분으로 나누어 함께 한 부분씩 읽어봅시다.
이사야 62:4–5 (사역)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아주바)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버려진 곳(세마마)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내가 기뻐하는 자(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내가 함께하는 곳(쁄라)이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을 결혼한 것처럼 맞아들이실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너를 지으신 분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먼저 4절 상반절입니다. 이전의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이 살던 땅은 무엇이라 불렸습니까? 버림 받은 자요 버려진 곳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도무지 함께하실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버려진 것처럼 비참하게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이 사는 땅은 무엇이라 불립니까? 내가 기뻐하는 자요 내가 함께하는 곳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이들이 다시 정신을 차려 하나님께서 다시 받아주시고 함께하실만한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개선해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죄에 물든 인간에게는 그런 변화를 이뤄낼만한 의지도 능력도 없습니다. 만약 이런 일이 가능했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불릴 새 이름은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이 아니라 “우리의 입으로 정한 새 이름”이 되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새 이름은 분명히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신해서 책임을 지시고 일하시겠다는 겁니다.
4절 하반절과 5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기뻐하시기로, 그들과 함께하기로 결단하십니다. 마치 동쪽과 서쪽같이 도무지 함께할 수 없을 것만 같던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마치 빛과 어둠처럼 도무지 하나될 수 없을 것만 같던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하나님은 합해내시기로 결단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이 함께할 수 있고, 하나될 수 있는 일이 어떻게 가능해졌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무슨 수로 자신의 이 결단을 이루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이신 우리 구주를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심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 진리를 분명히 깨달아 마음에 깊이 새기셨으면 좋겠습니다. 갈보리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기 위해 누구를 미워하셔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맞아들이시기 위해 누구를 버리셔야 했습니까? 추악하고 비겁한 자들을 위해 치르신 대가가 너무 큽니다. 영원에 영원을 거듭한다 할지라도 이 은혜는 갚을 길이 없는 은혜입니다. 이 위대한 결단 위에 우리의 구원의 약속이 세워졌고, 이 위대한 결단대로 우리의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설명하지 않고 슬쩍 넘어가긴 했습니다만, 이 약속은 먼저는 유대인에게 주어진 것이었으나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속에서 이제 모든 민족,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민족, 모든 사람을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이 약속은 얼마든지 우리에게도 “예”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남은 6절과 7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파수꾼은 일반적으로 적의 침입을 경계하며 지키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 하나님께서 위대한 소망으로 가득찬 약속을 주시며 세우신 파수꾼의 모습은 조금 다릅니다. 적을 경계하는 파수꾼은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시야에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며 자리를 지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시며 세우신 파수꾼은 간절히 무엇인가를 기다립니다. 자신의 눈으로 약속의 성취를 보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특별한 파수꾼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조금 더 쉬운 말로 쓰면 “너희 하나님의 기억을 일깨워드리는 자들아” 정도가 될 수 있겠네요.
이들을 불리우는 호칭에 이들에게 맡기시는 역할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이 특별한 파수꾼들은 단순히 열망을 가지고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기억하시도록 일깨워드려야 합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시는 날이 오기까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회복시키시는 날이 오기까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 내내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과 회복을 위해 일하는 쪽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말씀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과 회복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결단으로 시작되어 하나님의 열심으로 완성되는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 말을 우리는 그저 손놓고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일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참 놀라운 신비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원치않는 구원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소원하지 않는 회복을 일으키시지는 않습니다. 늘 우리의 기대와 소원보다 더욱 크고 놀랍게 일하시는 분이시긴 하지만, 바라지도 원하지도 않는 것을 억지로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고자 하시는 것들에 대해 간절한 마음을 품게 하셔서 기도하게끔 이끄십니다. 이것이 기도의 신비이고,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일을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일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말의 가장 중요한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이 신비 가운데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저는 확신하건대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이루고자 하시는 것들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품게 하셔서 기도하게끔 이끌고 계십니다. 아까 보았듯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자신의 아들을 미워하시고 버리시면서까지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시며 바라셨던 바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전의 비참한 신세에서 벗어나서 부족함 없이 사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롭게 살아가는 것에까지 이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멋지고 영광스러워서 이웃들이 기꺼이 신뢰하고 존경할만한 사람들이 되는 것,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들이 되는 것, 바로 그런 것들을 바라보시며 하나님은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열심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하지만 성자 하나님의 희생과 성부 하나님의 열심에 빚진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나요?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내리신 더욱 특별한 은혜를 생각해봅시다. 나라를 빼앗겨 가진 모든 재산과 권리를 수탈당한 민족,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가난한 신세가 된 이 민족을 위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우리 구주를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셨음은 물론입니다. 게다가 누구도 소망이 있다 말해주지 않아 아무런 소망도 품을 수 없었고, 누구도 구원자가 계시다 말해주지 않아 아무런 의지할 데도 찾을 수 없었던 이 민족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교회들의 심장에 불을 지피셔서 기도하게 하시고 또한 수많은 청년들의 심장에 불을 지피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 민족이 해방을 맞이하기 전까지 약 1,500명의 선교사들이 조선을 찾았으니, 적어도 수천의 교회와 수만의 그리스도인이 이 민족을 위해 기도했을겁니다. 그리고 1,500명의 선교사들 중 대부분이 청년이었습니다. 수천 교회의 사랑의 헌신, 수만 그리스도인의 눈물의 기도, 생때같은 청년들의 생명을 이 민족을 위해 쏟아부으셔서 복음을 심어내셨고, 조선이 약속을 품고 깨어나게 하셨습니다.
조선에 처음으로 태어난 하나님의 백성들. 야소교도들이라 불린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은 그야말로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을 통해 붙들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기까지, 자신들은 물론 이 민족이 해방의 날을 맞이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길 꿈꾸며 기도에 힘을 다하였습니다. 새벽이고 저녁이고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교회에 나와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것이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새벽 기도회, 수요 예배, 금요철야기도회 같은 것들이 왜 외국에는 없고 한국에만 있겠습니까? 조선의 그리스도인이 그만큼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들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셔서 조선에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난 성령의 특별한 역사를 시작으로 조선 교회가 영적으로 깨어나기 시작했고 1907년 평양에서의 대부흥을 맞아 1908년까지 엄청난 하늘의 생명이 조선을 살려냈습니다. 그야말로 조선의 팔도강산이 성령의 역사로 뒤덮였습니다. 어딜 가던 하나님에 대한 간증으로 넘쳐났고, 개인이 변화되고 사회가 변화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역사상 이렇게 큰 부흥은 없었다고 평가될 정도로 말입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며 당시 있었던 흥미로운 자료를 몇가지 찾았는데요, 이 자료를 먼저 접하며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참 멋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8) 첫번째 자료는 1897년 창간된 주간신문인 조선그리스도인회보에 실린 기사 중 하나입니다. 1899년 3월 첫째주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더라구요. “이번에 새로 나온 국도 군수 중에 유세력한 양반 한 분이 말하되 ‘나는 야소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다. 야소교 없는 저 영남마을로 옮겨달라’ 한다. 우리 교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도다. 만약 새 고을 원님이 무단히 백성의 재물을 빼앗을 지경이면 그것은 용이하게 빼앗기지 않을 터이니 이 원님이 예수 믿는 사람이 있는 고을에 가지 않는 것이 그 까닭인 듯하다.”
이 기사에 얽힌 내막은 이렇습니다. 당시 어떤 양반이 청탁을 해서 평안도 어느 마을의 군수 자리를 하나 얻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부임하기 전 사람을 보내 그 마을에 자기의 뒷배가 되어줄 부자들은 얼마나 있는지, 돈을 뜯어낼만한 사람들은 얼마나 있는지를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알아보니 그 고을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었던겁니다. 이 자의 입장에서는 큰일이 난거죠. 그리스도인들은 정직하여 부정이나 청탁 등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이 사람은 자기 뒤를 봐주는 세력가를 찾아가 다른 마을로 발령을 내달라고 청탁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기자의 귀에 들어가면서 신문에 실린 것입니다.
9) 두번째 자료는 1900년 12월 창간된 월간 신학잡지인 신학월보에 실린 기사 중 하나입니다. 1907년 4월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1903년 원산 부흥운동 당시 교회를 다니지 않던 윤승근이라는 사람이 부흥회에 참여해 성령을 체험한 뒤, 원산에서 자신의 집이 있는 벽제까지 사흘길을 걸어오면서 과거의 죄를 통회하며 자복했다. 그는 10년 전 동전을 만드는 정부 화폐 주전소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한꺼번에 두달치 월급을 받을 일이 기억났다. 당시에는 횡재라 생각해 그냥 써버렸는데 이것이 국가의 재정을 횡령한 일이라고 생각되어 이자까지 모아 하디선교사를 통해 정부에 반납했다. 당시 정부 관리는 이 돈을 돌려받으면서 “양심전”이라는 항목으로 영수증을 써줬고, 이후 기독교인들은 과거에 횡령했던 것들을 되돌려 주는 양심전운동을 펼쳤다.”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당시 사회에서 존경과 신뢰의 대상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분명히 보았습니다. 자기와 같이 술 먹고 노름하고 나쁜 짓을 하고 다녔던 사람이 교회에 가더니 개과천선을 하여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버리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조선에 복음이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저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이야" 하면 "저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라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돈을 빌리려고 할 때도 예수 믿는 사람인 것이 밝혀지면 쉽게 빌릴 수 있었고, 억울하게 사건에 휘말려 의심을 받을 때도 예수 믿는 사람인 것이 밝혀지면 쉽게 오해를 풀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변화된 모습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웃의 눈에 존경과 신뢰의 대상이 되고 하나님의 눈에 존귀하고 보배롭게 여겨지는 것 말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정말 자신이 그렇게 변화되기까지 기도했고, 자신을 넘어서서 온 민족이 그렇게 변화되기를 꿈꾸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도저히 잠잠히 계실 수 없을 정도로 끝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기억나시게 했다구요.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영원히 변치 않는 소망의 복음과 셀 수 없이 많은 선교사들의 사랑의 빚과 너무나도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의 삶을 신앙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우리의 지금 모습은 어떻냐 이말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이웃의 눈에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고 하나님의 마음에 아픔과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감각이 없습니다. 생명을 잃어 죽어가고 있음에도 아파하지 않습니다. 영광을 잃어 추악해져가고 있음에도 근심하지 않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뜻하신 바를 잊었고, 우리가 지금 거기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지도 깨닫지 못합니다. 감각이 없으니 기도도 사라져 갑니다. 날이 갈수록 기도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기도하는 시간도 줄어듭니다. 기도원은 이제 사람이 찾질 않아 하나둘 문을 닫은지 오래입니다. 기도 소리에서 절박함과 간절함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져 갑니다.
어쩌면 우리는 진작에 죽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 민족의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때문에 멸시와 조롱을 받으시는데, 이러한 상황을 두고 분연히 일어나지 않는 교회가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저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모습을 바라시며 우릴 위해 아들을 내어주셨을까요? 수많은 청년들이 이런 모습을 바라며 우릴 위해 삶을 바쳤을까요? 신앙의 선배들이 이런 모습을 바라며 우릴 위해 멋진 신앙의 유산을 남겼을까요?
결론
결론
우리의 모습이 이웃에게 어떻게 여겨지던지, 또 하나님께 어떻게 여겨지던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내 소원, 내 만족만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그래서 생명을 잃고 썩어가고 죽어가는 모습 이제 정말 좀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죽어가는 교회에 다시 불어넣을 생명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변화를 이루어낼 만한 의지도 능력도 없습니다. 하지만 가장 암울해 보이는 이 때에라도 소망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실거라, 자신의 열심으로 반드시 우리의 변화를 만들어내실거라 하신 약속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일을 행하시되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그 일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기도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만약 우리가 지금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까지 우리를 내모실겁니다. 우리가 다시 간절한 마음으로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게 될 수 있다면 잠시 분노와 진노로 우리를 대하시고, 심지어 버림받은 자처럼 대하시기까지 할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하셔서라도 죽어가는 자를 살리고, 성도의 성도됨과 교회의 교회됨을 그 영광스런 모습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이라도 우리가 돌이킨다면,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이 되어 절대 하나님이 잠잠히 계시지 못하도록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를 위해 하늘 문을 여시고 다시 한 번 부흥을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돌이킵시다. 우리를 다시 살리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듭시다. 우리를 다시 회복하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시다.
우리 모두가 이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파수꾼,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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