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기도(2) 기도의 대상과 근거
0 ratings
· 23 views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 기도한다. 그 이유는 세상 권력자가 아니라, 그분이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Notes
Transcript
주님의 기도(2) 기도의 대상과 근거
마태복음 6:9b, 13b
서론
김영봉 목사님의 주기도문 강해, 「가장 위험한 기도 주기도」(IVP, 2013)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톰 라이트 목사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일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독교 개론”을 가르칠 때, 어떤 학생이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교수님,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 제가 이 과목에서 얻을 것이 있습니까?” 톰 라이트가 학생에게 말합니다. “그래? 자네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그러자 그는 머뭇거리면서 여기 저기서 주워들은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를 다 들은 톰 라이트 교수님이 말합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나도 믿지 않네. 그것은 기독교가 가르치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믿음이네. 어디, 기독교가 가르치는 하나님, 그리고 내가 믿는 하나님 이야기를 들어 보지 않겠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님 이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하나님을 믿는다, 혹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내용을 들어보면, 서로 다른 하나님입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 만들어낸 하나님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믿고 있는 하나님이 과연 성경을 통해, 혹은 기독교 역사를 통해 알게 된 하나님입니까?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정말 성경이 말하는 실제 하나님인지 살펴보고 검토해보셨습니까? 10년 전 알고 있던 하나님과 지금 하나님이 같습니까? 아니면, 성경을 읽으면서 점점 그 하나님 상이 달라지고 풍성해졌습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질문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는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다면, 우리의 기도도 당연히 잘못됩니다. 엉뚱한 신에게 기도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기도한다고 착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주님의 기도의 서문과 종결문을 통해서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살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는 모두 여섯 가지 간구가 나옵니다. 처음 세 간구는 ‘하나님’에 관한 간구이며 다음 세 가지는 ‘우리’에 대한 간구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이 여섯 가지 간구를 서문과 종결문이 감싸고 있는 구조입니다. 서문은 기도의 대상, 그리고 종결문은 이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근거와 이유를 보여줍니다.
주님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본격적인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누구에게 기도하는지 그 대상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 짧은 문장 안에 기도의 대상과 관련하여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시다’는 말을 물리적 공간 개념으로 이해하여 저 멀리, 우리와 떨어진 우주 공간 어디에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말은 물리적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로, 하나님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와 한계 너머에 계신 분, 우리보다 훨씬 크신 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이 크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다 알 수 있는 것은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을 살고 있는 동안 우리는 부분적으로 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을 통해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배우고 알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평생 하나님을 얼마나 알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계시된 내용을 다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전부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내가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다고 고백하며 성경을 통해서 지금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 상을 계속해서 수정하며 성경이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알아가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바로 알아갈수록 우리 기도는 달라집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소통, 그리고 친밀한 교제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더 깊이 교제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하나님과의 사귐을 여긴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더 열심히 배우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수단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님을 알아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주실 것인가에 관심을 두지 말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이 주실 선물에만 관심이 있다면, 우리의 기도는 비인격적인 주문행위(자동판매기에 돈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내가 원하는 것이 튀어나오는, 혹은 ‘금 나와라 뚝딱!’ 하면서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부른다면, 우리는 겸손하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무서움과 공포가 아니라, 상상할 수 없이 아름답고 크고 거룩한 어떤 것 앞에서 갖게 되는 경외심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의 작음, 우리의 초라함,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내가 알고 있는 범위의 작은 하나님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더욱 하나님을 알아가기 힘씁시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는 늘 우리 곁에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와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소통하며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분, 우리의 상상 너머에 계신 분이면서도 동시에 우리 곁에서 우리를 따뜻하게 품고 계시며 우리를 책임지고 돌보시는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만날 수 있고 친밀한 인격적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분, 우리 삶의 작은 부분까지도 관심을 갖고 돌보시는 분, 우리 삶에 관여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내재성’을 의미합니다.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말씀(출 4:21~23)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그가 백성을 보내 주지 아니하리니
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구경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 우리 삶에 무관심한 분이 아니라, 관여하시는 하나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돌보시고 이끄시고 책임지시고 구원하시는 아버지십니다.
저에게는 ‘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육군사관학교 근무 중 생도들, 청년들, 학생들과 함께 했던 베트남 선교 기간 중 만난 베트남 청년 이야기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청년이었고, 우리 선교팀의 통역 아르바이트를 위해 합류했습니다. 3일째 되는 날, 시골 교회에서 일일 성경학교를 하던 중 점심시간에 선교사님이 저를 찾아 빨리 오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에게 갔더니, 현지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이 형제가 자기도 하나님을 믿고 싶다고 말하여 함께 기도하자고 부른 것입니다.
이상함을 느꼈답니다. 왜 이 친구들은 나도 관심 없는 우리 나라의 어려운 사람들과 시골 마을에 와서 이렇게 기쁘게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사랑을 쏟아부을까? 이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인가? 이 분이 정말 이 사람들의 아버지라면, 나에게도 그런 아버지가 계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나도 그런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너희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분이 내 아버지도 되면 좋겠다.” 우리가 교제하는 우리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아버지, 그래서 먼 나라까지 찾아와서 낯선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사랑을 나누면서도 힘들다고 하지 않고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도록 인도하시는 아버지, 우리 삶을 이끌어가시고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책임지시고 사랑하시는 하늘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도 그런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소위 ‘탕자의 비유’입니다. ‘기다리는 아버지’ 비유라고 해야 더 알맞은 제목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시는 아버지, 사랑을 낭비하는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팀 켈러 목사님은 이 비유를 가지고 책을 쓰면서 제목을 ‘탕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재산을 모두 낭비하는 탕자가 아니라, 사랑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낭비하는 아버지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아버지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허허 받아주시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같은 아버지는 아닙니다. 그분은 동시에 심판자이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까지 그것을 미루시고 끝까지 인내하시며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배신하고 떠나도 여전히 기다리는 아버지이십니다.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어김없이 먼저 달려와 안아주시고 용납하시고 용서하시며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한 분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나만’을 위한 분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은 같은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고백하는 형제자매가 되었음을 믿습니다. 요일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꼭 공동체여야할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냥 혼자서 예배드리고, 혼자서 기도하고, 혼자서 신앙생활 잘 하면 그만이지, 왜 우리가 공동체가 되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혼자 사는 것’이 마치 유행처럼 된 세상입니다. 우리 믿음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바로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개인에서 ‘공동체’로, 그것도 ‘가족 공동체’로 부름받았음을 믿는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 방식이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개인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나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된 영적 가족을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로 기도할 때 우리는 나에서 우리로, 내 가족에서 교회 공동체로, 더 나아가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로 관심을 돌려야 합니다.
이제 주님의 기도의 제일 마지막으로 가보겠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종결하는 문장은 우리가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여기에서 “대개”는 “그러므로”, “왜냐하면”을 뜻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이유와 근거를 설명하는 접속사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내용은 하나님께서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의 영원한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그 어떤 다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구하지 않겠다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주님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근거와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고 고백하는 사람들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 부르는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 너머에 계시면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며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의 주인이 되시는 분입니다. 나 자신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공동체 기도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크고 위대하신 분임을 기억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을 더욱 배우고 알아가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우리와 늘 함께 계시며 우리 삶을 돌보시고 이끌어 가시는 분이기에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며 동행하겠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을 믿기에 나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우리 공동체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과 이웃 교회와 구원이 필요한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주인이시기에 다른 어떤 것에도 무릎 꿇지 않고 담대하게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사랑하겠습니다. 기도를 가르쳐주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