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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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인사말-도입]
오늘은 이렇게 인사하겠습니다. 앞뒤 좌우로 성도님들을 보면서 ‘은혜로 삽시다’ 한 번 더 인사하겠습니다. “오늘 주님의 은혜로 충만 하시길 기대합시다” 광고 드리겠습니다. 교회학교 수련회가 모두 마치고 이제 대학청년부 수련회가 다음주 8월23(금)-25일 광주 진세골 사랑의 집에서 열립니다. 수련회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임재가 함께하도록 그리고 우리 함꿈 청년들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알 수 있는 시간되게 해달라고 도고 기도 부탁드립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교독하여 읽겠습니다: 렘17 :9-14]
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 하나니 11.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12.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13.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나이다 14.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 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서론]
오늘 설교 제목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리고 본문 말씀을 묵상하다가 처음에는 제목을 ‘자신을 정확히 알자’ 혹은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정 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읽고 묵상할 수록 마음이 힘든 것입니다. 로마서7: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는 바울의 탄식이 정말 바로 옆에서 내 귀에다 대고 하는 탄식처럼 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살아갑니다. ‘죄 많음-하나님 사랑-은혜충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3가지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첫째, 우리가 소유한 것 중 당연한 것은 없다. 그리고 둘째,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중에 우연인 것도 없다. 기독교인에게는 ‘운이 좋거나 나빠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우리가 은혜받을 자격은 하나도 없다 입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배하는 자니 약속된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두가지 이유로 이것이 자신을 속이는 것인데요~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의지하고 예배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그렇다고 자신을 속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고요, 또 다른 이유 첫번째 이유의 연장인데요 제2원인, 즉 피조물인 우리는 어떠한 경우도 제1원인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구속(강제)시키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은혜에서 비롯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가지 무를 망각하고 “ 내가 이것을 가지는 것은 내 노력의 결과이니 당연해!” “어쩌다 보니 공교롭게 일이 잘 풀렸네” “내가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는데 하나님은 내게 복을 주셔야 해” 이렇게 마음을 가시는 순간 우리는 그 즉시로 은혜를 상실하게 됩니다.
최근에 유튜브에서 본 이야기인데요, 미국의 65세된 한국인이 음료수(버블 티) 가게에서 맛에 대하여 컴플레인 하다 소동을 일으켜 경찰이 출동 했다고 합니다. 경찰이 그 65세된 사람을 보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나이 드신 분이 이런 자그마한 일로 점원에게 화를 내고 소동을 필수가 있습니까?” 말입니다. 그 65세 중년의 분이 옆에 딸을 불러 통역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 딸은 와서 자신의 신분이 ‘의사’라고 먼저 밝히고 경찰에게 왜 우리 아버지에게만 뭐라 하냐? 잘못한 것은 점원인데~ 이렇게 했다고 합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 65세된 한국인이 한인교회 목사라고 나중에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전해 듣고 처음에는 또 목사가 하나님을 욕 먹이는구나! 이랬다가 갑자기 제 속에서 탄식이 나옵니다. 솔직이 저도 제가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 이런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생각할까요? 사회적 신분이 올라가고 부유해 지면 당연히 그렇지 못하고 자원이 적은 사람들이 나를 높여주고 대우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돈,학벌,권력,직업) 돈을 지불하면 그 댓가를 반드시 받아야 하고 존중 받아야 한다는 생각 그 깊은 곳에는 무엇이 자리하고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이 그 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삶과 현실이 분리된 종교라고 세상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기독교인들의 삶을 나타내는 이런 표어를 만들어 봤습니다. “주일은 세상과 다르게, 평일은 주일과 다르게” , 믿음과 삶이 분리된 그리스도인을 풍자한 표어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신화와 이스라엘의 역사라고 생각하고 믿지 않는 일들이 불신자들이 아니라 신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세상으로부터 기독교인들은 위선적이라는 이런 모욕적인 평가를 듣는 여러분의 심정은 어떠신 가요? 오늘날 삶에 어려움이 찾아올 때 교회를 찾아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위로가 필요하고 회복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하나님에게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처음 시작 그랬는데 여전히 교회에 와서 우리는 위로 받기만 원하고 채워 주시옵소서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기도를 하고 있지 않나요? 혹은 생활의 염려와 심적인 문제가 해결되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신앙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변화되기전까지(거듭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기독교는 세상이 오해하는 것같이 어려울 때 마음의 위로를 받거나 일시적인 안정을 위해 있는 세상 종교가 아닙니다. 매주 교회에 나와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세상에 나가서는 여전히 전과 같은 방식으로 똑같이 살아 간다면 그 사람은 복음의 능력을 맛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기독교는 답을 주는 종교이고 모든 문제의 해답을 말해 줍니다. 예배 시간에 찬송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높이다 가도 삶의 현장에서 조금만 자신에게 손실이 발생할 때, 아니면 자신이 대접 받아야 하는 것을 대접받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 소동을 피우는 사람은 그 사람이 아무리 목사 라도 과연 복음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이라고 말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비극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 같은 신자들이 변화되지 않고 자기의 편리대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 우리의 섬김이 양심을 일깨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심을 무마시키는 거짓된 위로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보다 자기 만족과 거짓 위로를 통한 영원한 안도감으로 스스로를 속이기 있지는 않는지요? 갈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기심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본론]
오늘 읽은 9절 말씀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성경은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안에 있는 죄악, 비열함, 위선, 어리석음, 광기가 우리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죄’에 대한 문제와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유일한 책입니다. 성경은 죄의 본질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우리의 반역이라고 말하고 그 치료될 수 없는 질병에서 우리를 고쳐 주신 유일한 분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흘리신 보혈로 우리는 치료함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은 죄에서 치료함을 받았습니까? 그런데 왜 여전히 죄인으로 살아 가십니까? 왜 교회에서는 아멘 할렐루야 하고, 돌아서서는 여전히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 자기 욕망을 따라 살아가시나요? 여호와의 손이 짧아서 여러분을 죄에서 완전히 치료하지 못해서 입니까? 아니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시면서 선언한 ‘내가 다 이루었다’ 라는 말씀이 불완전 해서 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주님이 한번 더 오셔서 십자가에 다시 죽어야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안 짓고 살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롬8: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우리는 여전히 죄의 습성과 육체의 연약함으로 거룩하지 못한 행위들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 성령의 능력으로 성화되어 가면서 점차 소멸되어 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짓는 문제, 불완전한 문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죄의 본질적 근원(뿌리)이 치료함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반역의 죄에서 치료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고 하면서도 일상에서는 자신이 주인이 되고 자기의 욕망을 따라 자기만족과 자기의와 자기충족의 삶을 살아간다면 이는 두가지 중 하나입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거듭나지 못한 변화되지 않은 무늬만 교인이거나 혹은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이 그 사람을 치료하기에는 완전하지 못하거나 입니다. 후자는 불가능하니 답은 나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치료함 받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거짓입니다.
복음은 일시적인 것이거나 불완전한 치료가 아니라 완전한 치료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요일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가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 죄라는 이 치명적인 질병에서 완전히 치료함을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게 됩니다.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는 바울의 고백이 이제 우리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런 우리의 죄를 치료하시는 4가지 단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비밀이 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자기만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외롭고 고독한 존재입니다. 혹시 저는 그런 비밀 없는데요? 하시는 분은 곰곰이 자신을 더 깊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9절은 인간 실존에 대한 탄식 입니다. ‘누가 이를 알리요마는’ 이 비밀은 발각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은 거짓됨과 비열함과 위선과 광기가 숨어 있습니다. 어찌보면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습니다. 서로의 속 마음을 모르기에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우리 서로의 속마음을 모두 알게 된다면 같이 공존할 수 있을까요? 결혼이 가능하겠습니까? 교회공동체가 유지될까요? 가장 순수한 가정과 교회가 이럴진대 세상이 어떻게 유지가 될 수 있겠습니까! 마음속 동기와 관심은 자신과 하나님만 압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사람들은 모르지만 자신은 압니다. 자신을 솔직히 직면하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 선한 것이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심지어 우리는 선한 일을 하면서도 그 속에 우리 동기가 선하지 않을 수 있음을 잘 압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직면하시기 바랍니다. 롬3:11-18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 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반면에 세상은 자신을 인정하고 신뢰 하라고 말합니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귀 기우려 듣고 그 목소리를 따라 행하면 자유를 얻는다고 말합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신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집중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인본주의 입니다. 세상의 목소리는 자신이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선포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좋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안에 선이 없다고 너무도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렇기에 내로남불, 기억의 왜곡, 스스로 속이는 우리의 마음은 말씀을 통하여 치료함을 받아야 합니다. 히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둘째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10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 하나니 내 안에 비밀을 나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지나가는 생각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척해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속이고 살아가도 하나님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지식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신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지식은 하나이며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알면 자신을 제대로 보게 되고, 자신을 제대로 보게 되면 하나님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왜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어야 하나요? 그것이 경건한 생활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인가요? 물론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성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선을 행할 능력이 전무합니다. 이것이 자신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능력은 외부에서 와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들은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우리가 성전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분의 영으로 우리가 살아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말씀을 통해 복음을 은혜를 날마다 체험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 읽어라! 기도해라! 백날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스스로를 날마다 속이며 살아갑니다. 그래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정확하게 아십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했던 인류 최초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창3:10-11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을 피해 숨바꼭질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심장을 살피시고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시는 분입니다.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언젠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 그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세번째는 자기 노력의 절망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1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11.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자고새는 메추라기 입니다. 정결한 작은 새입니다. 광야에서 고기를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먹이신 새이죠! 사람은 말년이 중요합니다. 누구나 그렇기를 원합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해 지기를 원합니다. 11절 말씀은 불의한 재물을 쌓지 말라는 말씀인데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적용점을 찾았습니다. 불의로 재물을 쌓는 것과 자고새가 낳지 않은 알을 품는 것, 그리고 자기 노력으로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의지, 이 모든 것이 같은 맥락입니다. 도덕적으로 좀 더 노력하고 좋은 사람으로 관계를 맺고 그런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안 그런 척, 깨끗한 척, 거룩한 척, 믿는 척, 살아가면 시간이 흘러 주님 앞에 설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요?
혼인 잔치에 초대된 여러분 정신 차리십시오! 예복을 입지 않으면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괜찮아! 나는 믿음으로 구원 받잖아! 지금은 온전하지 않아도 그리스도 예수의 날 나는 온전해져! 자기기만 입니다. 불완전한 도덕적 존재 로서의 삶, 척하며 살아가는 삶의 옷, ‘자기의’ 라는 불가능한 삶의 방식을 버리고 십자가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은혜라는 예복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은혜의 예복을 입기 위해서는 ‘자기의’ 자기 노력의 절망을 철저하게 경험하셔야 합니다. 내가 지금 자고새처럼 낳지 않은 알을 품고 있으며 불의한 재물을 모으고 있으며 이것의 결국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를 반복하는 역겨움으로 하나님과 숨바꼭질 하는 삶을 이제 내려 놓으시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14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 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예레미야의 기도를 우리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영혼의 속임수와 책략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는 지식과 나를 아는 지식으로 ‘죄’ 라는 치명적인 질병에서 우리를 완전하고 온전하게 치료하시는 십자가의 은혜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어떤 수단으로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의 비열한 본성을 고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치료하심과 회복하심을 기대하면서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은 고쳐서 쓰지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요 정말로 맞는 말입니다. 사람은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고후5:17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 도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나의 찬송이 되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러면 내가 낫겠나이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나를 구원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일시적인 치료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속지 마세요! 날마다 치료함 받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죄에서 치료함 받습니다. 오늘 아니면 주일에 다시 기도하지! 언젠가는 회복되겠지! 이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치료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에서 치료받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하나님이 우리를 만지시면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시고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근본적이고 완전한 치료입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불완전한 도덕적인 처방이 아닙니다.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은 단번에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마시고 지금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무릎 꿇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속으로 내가 교회를 다닌 지 얼마나 오래 되었는데 이런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잘못된 길을 가지 마시고 깨달았을 때 탕자와 같이 바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똑같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하게 치료하시고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결론]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안에는 말 못할 비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을 다 아십니다.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의 치명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하며 하나님과 숨바꼭질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아닙니다. 이제 더 이상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속임수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일에는 세상과 다르게 평일에는 주일과 다르게 살아가는 삶에서 떠나야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따라 내가 하나님이 되어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반역하는 불완전하고 역겹고 임시방편적인 모습과는 이별을 해야 합니다. 고후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솔직하게 우리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리며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하게 임할 줄 믿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 기억하며 우리 함께 찬양 드리고 기도하겠습니다. ‘나의 백성이’ 라는 찬양인데요 원제는 ‘이 땅 고치소서’ 입니다. 찬양 가사 중에 “이나라 주의 것 되게 하소서!”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 안에 임합니다. “나의 삶 주의 것 되게 하소서” 간절한 마음으로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나의 백성이~겸비하여 내게 기도하며 나의 얼굴을 구하여서 그 악한 길 떠나면,하늘에서 듣고 죄를 사하며 그들의 땅을 고치리라, 아버지여 고쳐 주소서! 이 나라 주의 것 되게 하소서! 주하나님 간절히 기도 하오니 상한 이 땅 새롭게 하소서!
[기도]
주님!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내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믿음도 주님이 주신 것인데 마치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는 것 같이, 우리 뜻대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우리는 피조물인데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나의 욕망을 따라 살았습니다. 이 시간 회개하고 통회 하는 맘으로 주 앞에 나아갑니다. 주의 십자가 그 보혈로 우리를 고쳐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 이름 한번 크게 부르며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아버지여! 고쳐 주소서! 나의 삶 주의 것 되게 하소서! 주 하나님 간절히 기도 하오니 상한 이 맘 새롭게 하소서!
여호와여 주는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우리 이 시간 한번 더 기도할 텐데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완전하게 회복시키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손들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이 순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인격 전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 한분만을 주님으로 섬기고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만드시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바라보시고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이 은혜 받을 때요 구원의 날이로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오직 복음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 받지 않으면 우리가 가정이, 교회가, 자녀가, 남편이, 아내가, 이 나라가 민족이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 시간 간절히 복음의 능력으로 우리를 새사람 만들어 달라고 주의 것 되게 해달라고 큰소리로 ‘주여 은혜를 주옵소서” 외치며 기도하시겠습니다. ‘주여! 은혜를 주옵소서”
주 사랑이 나를 숨쉬게 해! (마무리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