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주시다

누가복음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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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누가복음 4:38-44
“자유를 주시다”
2024. 8. 14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자유를 주시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본문에 이어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사역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이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셨죠. 시간적으로 본다면, 귀신을 쫓으신 이 사역은 안식일 오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 본문의 사건은요, 안식일 오후에 일어난 사건과, 해 질 무렵에 일어난 사건과, 다음날 아침에 일어난 사건으로 순차적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하루 이틀 동안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난 겁니다.
예수님이 참 긴 하루를 보내셨죠. 이토록이나 예수님의 스케줄이 빡빡했어요. 굉장히 바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하루 일과를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단편적으로 들여다 볼 텐데요. 오전에 귀신을 쫓으신 예수님이 그 뒤에는 무엇을 하셨는가? 자, 오늘 본문 38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38절 시작,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예수님의 안식일 두 번째 사역이 나오는데요. 회당에서 귀신을 쫓으신 예수님이 회당에서 나가시고 곧바로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중간 과정이 없죠. 마치 회당하고 시몬의 집이 붙어있기라도 한 것처럼, 회당에서 나가시자마자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어요. 여러분, 이것은 공적인 장소에서 사적인 장소로의 전환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마치 연극무대가 순식간에 뒤바뀌듯이,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이 순식간에 바껴요.
공적인 장소에서 사역을 하신 예수님이 이제는 지극히 사적인 개인의 집에서도 사역을 하신다는 거예요. 공동체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회당에서만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사적인 장소에서까지, 주님이 임하시고, 주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예배당에 함께 모여서 예배할 때 주님이 역사하셔요. 그리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우리의 집에서, 또 우리의 직장에서, 동일하게 우리 주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주님은 때와 장소를 가리시지 않아요. 오전에 역사하시고, 오후에도 역사하시고, 해 질 무렵에도 역사하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시편 121편 4절에, 시편기자가 이렇게 노래했어요. 시편 121편 4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아멘.
우리 주님이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항상 우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담대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이 시몬의 집으로 가셨어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이 왜 갑자기 시몬의 집에 가셨을까요? 누가복음에서 시몬의 이름이 여기서 처음 나오거든요. 누가복음을 처음 읽은 사람은 시몬이 누구인지 몰랐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지금 갑자기 시몬의 이름이 나왔을 때 어리둥절 했을 거예요. 시몬이 누구길래,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 가셨을까?
그런데 이 사건 바로 뒤에 누가복음 5장에 가면, 시몬에 대해서 자세하게 나와요. 호숫가에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배를 타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가 잡히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처럼 누가는 중요한 인물을 굉장히 독특하게 등장시킵니다. 먼저 이름을 그냥 툭 던지듯이 갑작스럽게 등장을 시키고, 그 뒤에 그 사람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요. 대표적으로 사울을 그런 식으로 등장시키죠.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처음 사울의 이름이 나오거든요. 사도행전 7장 58절을 보면요.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여기서 사울의 이름이 갑자기 등장합니다. 그리고 바로 뒤에 사도행전 8장에서 사울이 교회를 잔멸하고요, 9장에서는 회심하는 장면이 나오죠. 이처럼 누가는 중요한 인물의 이름을 먼저 갑작스럽게 한번 등장시키고, 그 뒤에 다시 자세하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서술을 합니다.
누가의 이러한 방식은 독자로 하여금 집중도를 올리는 이점이 있습니다. 만약에 독자가 그 사람을 몰랐다면, 그 사람에 대한 궁금증으로 인해서 더욱 집중하게 될 것이고, 반대로 독자가 그 사람을 알았다면, 이 역시도 아는 이름이 나오니까 집중도가 올라가게 돼요.
그래서 누가복음을 처음 읽은 데오빌로 각하도 시몬의 이름을 봤을 때, 보다 집중해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바라보게 되었을 겁니다.
우리도 오늘 이 사건을 보다 집중해서 살펴보기를 원하는데요. 자, 어쨌거나 예수님이 지금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어요. 예수님이 왜 시몬의 집에 갑자기 들어가셨는지, 그 이유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배경설명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과 시몬이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죠. 제가 누가복음 4장 14절, 15절을 설교하면서 이미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었어요.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후에, 어디로 가셨다고 했습니까? 요한복음에 의하면, 다시 요단강으로 돌아가셨다고 했죠. 광야에서 다시 요단강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때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시몬의 형제 안드레였어요.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요한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안드레와 요한, 두 사람이 본래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는데, 요단강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때부터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안드레는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면서, 시몬을 예수님께로 데려갔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시몬에게 게바라고 하는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요, 예수님하고 시몬이 이미 안면이 있어요. 이미 만나서 새로운 이름도 받았을 정도로, 친분이 있는 상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 들어가신 일이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다만, 누가는 일일이 이런 배경상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갑자기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 들어가신 것으로만 기록을 했어요. 시몬이 누군지, 왜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는지, 독자들이 궁금해 할만한 이런 내용들을 설명해주지 않아요.
누가는 오직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드러내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회당에서 귀신을 쫓으셨던 예수님이 이번에는 열병을 쫓아내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는 메시야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 오직 이것을 위해서 누가는 책을 써내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보면요.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어요. 시몬의 장모가 위독하다는 것을 이미 아시고, 직접 시몬의 집으로 가신 거죠. 아마도 시몬의 장모는 아들이 없었던 것 같아요. 본래 아들이 없었는지, 아니면 아들이 있었는데 죽은 건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지금 아들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위 집에서 같이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었어요. 그것도 그냥 열병이 아니라, 중한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하다는 말이 헬라어로 “메가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크다”라는 말이에요. 이 메가스라는 말에서 나중에 영어 “메가” 라는 말이 나왔어요. 뭐, 메가바이트, 메가톤, 이런 말을 쓰잖아요. 굉장히 크다는 것이죠.
누가는 의사였기 때문에, 장모의 열병이 의술로 고칠 수가 없는 병이라는 것을 알았을 거예요. 그래서 메가스, 굉장히 큰 열병이라고 표현을 한 겁니다. 사람들이 이 열병을 고치기 위해서 온갖 시도를 다 해봤겠죠. 열을 내리기 위해서 물을 끼얹어 보고, 부채질도 해보고, 좋다는 약도 먹여보고, 피도 빼보고, 별 짓을 다 해봤을 거예요. 그런데 소용이 없어요.
그런데 바로 그때,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그리고 곧바로 장모를 고쳐주시는데요. 이때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오늘 본문 39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아멘.
예수님은 장모가 앓고 있던 열병을 꾸짖으셨습니다. 안수를 하시지도 않았어요. 그냥 말로만 꾸짖으셨습니다. 마치 열병이 하나의 인격체라도 된다는 듯이, 말씀으로 꾸짖으셨더니 병이 떠났어요. 그만큼 예수님의 말씀에는요,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 한 마디에 귀신도 떠나고, 심지어 병도 떠나요. 도대체 그 말씀이 어떤 말씀이길래, 귀신도 쫓아내고 열병도 쫓아내는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에는 성령의 권위가 함께할 뿐만 아니라, 능력이 있어요. 능력, 헬라어로 두나미스. 이 말에서 나중에 다이너마이트라는 말이 나왔다고 했죠? 그야말로 말씀에 폭발력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 한 마디면, 폭발력에 튕겨나가듯듯이, 귀신이 떠나가고, 열병이 떠나가는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말씀으로써 놀라운 일들을 행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사모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예요.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 말씀을 붙잡을 때, 우리 삶에도 능력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으로 말씀을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삶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 제목처럼, 우리 삶에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회당에서 귀신 들렸던 자가 귀신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고,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누르고 있는 속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게 되는데요. 그것은 바로 섬김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몬의 장모는, 자유롭게 되자마자 섬김을 시작해요. 39절 끝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아멘.
여러분, 이것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올바른 반응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자유함을 얻은 사람은 마땅히 감사함으로 섬김의 삶을 살게 됩니다. 시몬의 장모는 정말 즉각적으로 섬김을 시작했어요.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하지만 세상에는 이처럼 극적으로 삶이 변하는 사람이 흔치 않죠. 나중에 누가복음 17장에 가서 보면, 나병 환자 열 명이 예수님께 고침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중에 아홉 명은 다 자기 갈 길 가버리고, 오직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 그 발 아래 엎드려 감사를 드리죠.
이처럼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진정으로 예수님께 돌아오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나병환자 10명 중에 한 사람이면, 겨우 10%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볼 때, 시몬의 장모는 얼마나 대단합니까? 몸져 누웠다가 일어나자마자 수종을 들어요. 여기서 장모가 어떤 수종을 들었을까요? 이 수종 들다라는 말이 헬라어로 “디아코니아”라는 말인데요. 이 말은 “섬기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어요. 그리고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음식을 제공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시몬의 장모가 섬김의 일환으로써, 예수님과 손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한 거예요. 자기 손으로 직접 하나부터 열까지 음식을 만들어서 대접한 겁니다. 나를 위해서 여기까지 와주시고, 나를 이 중한 열병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신 주님께 너무나 감사해서, 최선을 다해서 섬긴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와 같이, 나를 만나주시고, 나에게 은혜 주신 주님을 위하여서 감사함으로 수종 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면, 우리가 예전과 똑같이 살아서는 안 돼요. 예수님이 쉬지 않고 일하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섬기며, 봉사하며, 수종 드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 40절로 가서 보면, 이제 해 질 무렵이 됩니다. 오전에도, 오후에도 일하셨던 예수님이 해 질 무렵에도 여전히 일하십니다. 그런데, 특별히 해 질 무렵이 되니까 온갖 병자들이 다 예수님을 찾아오죠. 이것은 예수님이 대한 소문이 불과 반나절 만에 퍼져서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 찾아왔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소문이 엄청나게 빠르게 퍼진 거예요.
그런데 이 장면에서 우리가 또 한 가지 주의깊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어요. 그것은 해 질 무렵이 되면서 마침내 안식일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루가 해가 질 때 시작해서, 해가 질 때 끝이 나요. 우리는 밤 12시에 하루가 끝나잖아요.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아요. 해가 지면 하루가 끝납니다. 오늘 본문에도 해 질 무렵이 되니까, 해가 지니까 안식일이 끝이 난 겁니다.
그래서 이제서야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리고 오는 거예요. 여러분, 안식일에는 사람을 들고 옮길 수가 없습니다. 일을 하면 안 되니까, 당연히 사람을 들고 옮기는 것도 하면 안 돼요. 오늘 본문 40절에 보면, 병자들이 자기 스스로 오지 않고, 사람들이 데려왔거든요. 해가 지면서 안식일 끝나니까 때는 이때라, 하고 데리고 온 겁니다. 그냥 좀 기다렸다가 날이 밝으면 데려와도 됐을 텐데, 사람들이 마음이 조급하니까 그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온갖 병자들을 다 데리고 와요.
그래서 지금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왔지만, 이 병자들에게는 해보다 더 밝은 빛이 그들에게 비추게 됩니다. 병이 고침 받고, 귀신이 떠나가는 새로운 인생이 열리는 겁니다.
자, 오늘 본문 40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아멘.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십니다. 그런데 이때에는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셨어요. 안수 하신 거죠. 분명히 오전에도 그렇고 오후에도 그렇고, 말씀만으로 귀신과 병을 쫓으셨던 분이, 지금은 일일이 손을 얹어서 고치셔요.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말씀에 귀신과 병을 쫓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죠. 그렇기 때문에 지금 40절 말씀의 장면이 우리에게는 상당히 불필요한 장면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냥 말씀만 하시면 한방에 이곳에 모인 모든 병자가 고침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왜 일일이 안수를 하실까?
예수님이 그냥 이렇게 선포만 하시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곳에 있는 모든 귀신은 떠나갈 지어다! 모든 질병은 떠나갈 지어다!” 그냥 이렇게 선포만 하시면 한방에 다 끝나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일일이 손을 얹으실까?
그 이유는 예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섭니다. 말씀은 그곳에 있는 사람이 모두 동시에 들을 수 있죠. 그래서 말씀을 통한 사역은 공적인 사역입니다. 하지만 안수는요, 지극히 개인적인 사역이에요. 한 번에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는 사역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시몬의 집으로 가셨듯이, 예수님은 공적인 사역에서 개인적인 사역으로 전환하심으로써, 지금 이 순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계십니다.
오전 오후 쉬지 않고 사역을 하신 예수님이, 이제 해가 져서 쉬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한 분만 바라보고 간절히 찾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 그 병든 부정한 몸에 손을 얹으시는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때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지만, 또 때로는 따스한 손길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지금 이 공적인 예배당에서 말씀으로 우리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면, 그곳에서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친밀한 주님의 손길을 느끼며 위로와 새힘을 얻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 4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41절 시작,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아멘.
예수님이 일일이 안수하시던 그 현장에, 병자들뿐만 아니라 귀신 들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때 귀신들이 나가면서 소리를 질렀어요. 뭐라고 소리 질렀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회당에서도 귀신이 비슷한 소리를 했죠. 34절에,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동일하게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증언하는 말을 외쳤어요.
여러분, 희한하게도, 귀신들은 자기가 불리한 상황에 처하면 하나같이 예수님의 정체를 발설해요. 이렇게 하면 예수님이 봐줄까봐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귀신들은 어차피 자기들이 예수님 앞에서 쫓겨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거든요. 그래서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겁니다.
제가 저번에 마귀의 시험에 대한 장면을 설교하면서 이미 말씀을 드렸었잖아요. 마귀는 예수님이 사람이 되는 것을 막으려고 해요. 그냥 하나님으로만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만약에 귀신이 외치는 말을 사람들이 듣고,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믿음이 생기게 된다면, 예수님의 사역에 지장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안 그래도 사람들은 메시야에 대한 잘못된 환상을 갖고 있거든요. 메시야가 오시면, 우리를 로마의 속박에서 풀어주시고, 영원히 견고한 왕국을 건설해서 무궁한 평강을 주실 것이다. 이런 잘못된 환상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다가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덧붙여진다면, 사람들은 절대로 메시야의 고난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난의 길을 가시는 것을 막으려고 했던 것처럼, 하나님으로서의 메시야로만 남아주시기를 원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귀신을 잠잠케 하신 거예요. 제가 지난 시간에 ‘잠잠하게 하다’ 라는 말이 본래 ‘재갈을 물리다’ 라는 뜻이라고 말씀을 드렸었죠. 사람들에게 잘못된 환상을 심어주지 못하도록, 귀신들의 입을 막아버리신 거예요. 그래서 귀신들이 더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쫓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이미 귀신의 의도가 먹혀들고 있어요. 바로 밑에 42절에 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이 떠나지 못하도록 만류하려고 하죠. 예수님이 아침에 기도하시려고 잠깐 사라진 사이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으려고 난리가 나고, 또 예수님을 찾고나서는 못 가게 막아요.
자, 오늘 본문 42절인데요. 42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예수님이 일찍 일어나서 한적한 곳에 가셨습니다. 이 한적한 곳이 헬라어로 “에레모스”라는 말인데, 이것은 “광야”라는 말이에요.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장소가 바로 에레모스였습니다. 또 세례 요한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말을 했을 때, 이 광야도 역시 에레모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아침에 광야에 가신 거예요. 왜요? 기도 하시려고.
그런데 그 잠깐 사이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으려고 난리가 났어요. 예수님이 혹시 떠나셨나 하고 온 동네를 뒤진 겁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광야까지 가서 예수님을 찾은 거죠. 그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기들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만류하려고 했습니다. 다른 데 가지 마시고, 여기 가버나움에 계속 머물러 있으라는 거예요. 여기서 계속 병도 고쳐주시고, 귀신도 쫓아주시고, 땅값도 올려주시고, 그냥 여기 계시면 얼마나 좋아요?
요즘에도 보면, 무슨 시험에 합격하거나, 고위공무원이 되면, 동네에 플래카드를 달거든요. 우리 동네가 이런 동네다, 자랑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메시야가 우리 동네에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그게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메시야가 저기 서울도 아니고, 부산도 아니고, 바로 여기 여수에 계시다고 한다면, 정말 기쁜 일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잡는 겁니다. ‘다른 데 가지 말고, 여기서 우리랑 같이 삽시다. 기적을 베푸시려면 여기서 베푸시고, 말씀도 여기서만 가르치시고, 바로 여기서부터 왕국을 건설합시다.’ 이러한 욕심으로 예수님을 붙잡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이기적인 생각이죠. 복음을 사유화 하려는 겁니다. 예수님은 온 열방의 메시야로 오셨어요. 어느 특정 사람들만의 메시야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한 곳에 머물러 계실 수가 없어요. 쉬지 않고 장소를 옮겨다니시면서, 빛으로 어둠을 비추셔야 합니다. 그래서 밑에 43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선포를 하시죠. 43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아멘.
예수님은 어느 한 동네를 위해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나사렛을 위해서만 오신 것도 아니고, 가버나움을 위해서만 오신 것도 아니에요. 다른 모든 동네를 위해서 오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붙잡아놓을 수가 없어요. 나사렛에서 예수님을 밀쳐서 떨어뜨릴 수 없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붙잡아놓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사람의 필요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욕심 때문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열광하는 가버나움을 떠나 갈릴리 여러 동네 회당으로 가셨습니다. 오늘 본문 44절에 보니까,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아멘.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은 배척을 받으시는 것도 감수하시고, 또 자신을 향한 칭송과 열광 앞에서도 미련없이 떠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와 같이 행해야 합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나를 배척하는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또 나를 칭송하는 그곳을 미련없이 떠나야 합니다. 복음을 듣는다고 모든 사람이 변화되지는 않아요. 복음을 배척하기도 하고, 잘못된 믿음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다른 동네를 향해서 가야 합니다.
말씀에 능력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변화되는 사람이 있어요. 시몬의 장모와 같이, 변화되는 그 한 사람을 위해서 우리가 전도해야 합니다.
내가 누리는 이 자유를 다른 사람들도 누릴 수 있도록,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죄와 사망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서 일하시는 우리 주님을 신뢰하며, 우리도 기꺼이 섬기며, 봉사하며, 수종 드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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