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814 수요강론: 룻기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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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를 수요강론 자리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깊이 상고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심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에 부족한 저희임에도 언제나 저희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나타내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리하여 저희가 한 주간 살아갈 힘의 원천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얻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나아왔습니다. 이 시간 세상의 모든 말보다 더 귀하며 저희에게 참된 위로를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함께하실 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룻기 2:1-16 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수요강론에 나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무더운 날씨 가운데서도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오시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오늘도 이 자리에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부터 우리는 룻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주 말씀을 잠깐 요약해보자면, 룻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보았습니다. 룻에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미래이지만 하나님께서 돌보실 것을 믿고 그분을 의지한다는 것이었는데요. 이것이 룻의 믿음이며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룻을 하나님께서는 이런 믿음으로 그녀를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보필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나오미도 이 룻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오늘은 룻과 나오미, 이 두 고부가 베들레헴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복음을 듣고 베들레헴에 도착한 말씀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 말씀과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직접 등장하진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룻과 나오미를 어떻게 보살피고 보호하시는지를 살펴보고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직전 본문인 1장 마지막 절인 22절은 나오미와 룻이 보리 추수할 시기에 베들레헴에 도착했다고 알려줍니다. 예전에 나오미 가정이 베들레헴을 떠난 것은 기근 때문이었습니다. 그 기근을 피하고자 모압으로 피난을 간 것이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나오미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심지어 가족이라고는 오직 며느리인 룻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삶의 밑바닥에 있는 이들이 복음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오자 보리 추수할 시기임을 알려주어 이들에게 희망이 생겼음을 룻기 저자는 알려주면서 1장을 마무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2장에서는 베들레헴에 도착한 룻과 나오미에게 어떤 일들이 펼쳐지는지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2장의 시작은 룻과 나오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이 둘로 2장이 시작되지 않고, 한 사람을 소개하는데요. 그 사람은 바로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척으로 베들레헴에서 재력이 있는 ‘보아스’라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룻기 저자는 이 보아스를 갑자기 등장시킴으로 보아스가 이 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룻기를 읽는 사람들에게 기대를 하게 만듭니다.
특히나 이 보아스의 특징으로 “유력하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부유한 사람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물질적으로 부유한 것만을 뜻하지 않고, 내적인 것, 즉 이 보아스의 마음도 매우 풍족하고 부유한 사람으로 마음도 훌륭한 미덕있는 사람임을 뜻합니다. 바로 보아스는 외적과 내적 모두 훌륭하고 부유한 사람입니다.
룻과 나오미는 모압에서 모든 것을 읽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들은 과부이며 가난한 사람으로 당시 사회에서 최약체에 해당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에 비해 보아스는 매우 부유한 자로 사회에서 강자입니다. 룻과 나오미와는 다른 상황인 이 보아스가 이 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요?
이제 다시 룻기 저자는 룻과 나오미에게 2절에서 시선을 옮깁니다. 룻은 생계를 유지하고자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 부탁을 합니다.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룻은 나오미에게 생계를 유지하고자 이삭을 주우러 갈 수 있도록 요청을 합니다. 1장 끝에서 말한 것처럼 마침 베들레헴은 추수할 때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여기서 독특한 것은 한글 성경에는 뉘앙스가 잘 나타나있진 않지만, 룻이 한 말은 요청이며 부탁입니다. 원어를 살려보자면 룻이 한 말은 “제가 제발 가게 해주세요.”, “제가 제발 이삭을 줍게 해주세요.”입니다.
룻이 이렇게 간절하게 부탁한 이유는 2절이 룻에 대해 묘사한 것처럼 “모압 여인”, 즉 이방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여인 혼자서 무슨 일을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친척이 아무도 없는 연고지가 아닌 이방 여인입니다. 자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도움을 청하거나 보호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혹여나 이삭을 주우러 갔다가 밭의 주인이 룻에게 수모를 주어 큰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룻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기에 룻은 간절하게 요청한 겁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이 발생할 수 있음에도 룻이 밭에서 이삭을 줍겠다고 말한 것은 시어머니를 보필하겠다는 룻의 강한 의지가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지난 주에 1장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살피신다는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기도 합니다.
어찌됐든지 룻은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따라가 이삭을 줍겠다고 말합니다. 사실 룻은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모든 밭은 가난하고 외국인 체류자, 고아와 과부를 위해 일부 남겨두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그렇게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9:9-10 입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또한 신명기 24:19-21 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든 밭과 들에서 나는 소출들 중 일부분을 가난한 자, 여기서는 객으로 번역되었지만 외국인 체류자, 고아와 과부, 즉 약자들을 위해 남겨둘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룻은 그러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경험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면 이삭을 주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룻이 이방인이기에 이삭 줍기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알지 못했는지, 아니면 이 당시가 사사시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희미해졌던 시대라서 그랬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는 누군가에게 호의를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이런 룻의 요청을 나오미는 허락하고 그녀를 보냅니다.
그렇게 룻은 추수하는 자들을 따라다니면서 이삭을 하나씩 하나씩 줍습니다. 부지런히 따라다니면서 이삭을 줍던 룻은 어쩌다보니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단어는 “우연히”라는 단어입니다. “우연히”를 한번 기억해두시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녀는 지금 이삭을 줍고 있는 밭이 보아스의 밭인지 몰랐을 겁니다. 그러다가 어찌나 타이밍이 좋은지 마침 1절에 소개된 보아스가 등장합니다. 원래 4절의 시작은 “보라! 보아스를!”입니다. 저자는 “보라! 보아스를!”이라는 말로 보아스에게 이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습니다.
베들레헴 외곽에 있는 자신의 밭에 도착한 보아스는 추수꾼들을 향해 “여호와께서 당신들과 함께 하시기를!”이라는 인사를 하고, 추수꾼들도 화답으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이라는 인사를 나눕니다. 이들의 인사는 어찌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하는 당연한 인사 같지만, 우리가 염두해야 할 것은 이 시기가 사사 시대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이러한 인사를 나눔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 특히 보아스가 여호와를 믿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로에게 인사를 나눈 뒤 보아스는 자신의 밭을 추수꾼들이 잘 추수하고 있는지 한번 쓰윽 둘러보았을 겁니다. 그러다가 눈에 한 사람이 걸립니다. 그 사람은 바로 룻입니다. 자신의 밭에서 매번 일하는 추수꾼들이었지만, 낯선 한 사람이 그 무리에 끼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자신의 하인에게 “이 젊은 여인은 누구에게 속하였느냐”라고 물어봅니다. 특히 이 보아스의 질문은 젊은 여인이 누구냐고 묻지 않고 누구에게 속했느냐고 물었는데, 이것은 고대에는 한 여인의 정체성은 그 여인 자체에 있지 않고 누구에게 속했는지, 다시 말해 누구의 딸이며 누구의 아내이며, 누구의 종인가에서 찾았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당연히 추수꾼들 무리에 끼어있는 젊은 여인이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물었던 겁니다.
그러자 하인은 6-7절에서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젊은 여인으로 ‘추수꾼을 따라 모아 놓은 곡식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해주세요.’라고 부탁해서 아침부터 와서는 지금 잠시 집에서 쉬고 있는 것 외에는 계속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해줍니다. 지금 보아스가 보고 있는 룻은 계속 이삭을 줍다가 잠시 앉아서 쉬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가 8절에서 보아스가 룻에게 말하는데요. 7절과 8절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8절을 보시면 한글 성경에는 나타나있진 않지만, 보아스가 룻에게 하는 말이 일반적인 평서문이 아니라 반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을 살려서 말하면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라는 말을 너가 듣지 않았느냐?”라는 겁니다. 8절 전에는 보아스가 룻에게 다른 밭에 가지 말고 자신의 밭에서 주우라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이렇게 반문한 것을 보아 보아스가 하인으로부터 룻에 대한 소개를 들은 이후에 하인을 통해 룻이 다른 밭에 가서 이삭을 줍지 말라고 전달했고, 그 이후에 룻을 다시 한번 대면한 보아스가 자신이 하인을 통해 한 말을 듣지 않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하인에게 룻에 대한 정보를 전달받은 보아스는 룻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정심이 들었는지 다른 밭에서 줍지 말고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주우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밭에서 떠나지 말고 자신의 하녀들과 함께 있으라고 룻을 배려합니다. 여자, 가난한 자, 이방인, 과부라는 약자 요소가 한 데 모인 룻에게 보아스는 같은 성별인 하녀들을 붙여주어 룻을 배려합니다. 특히 8절에서 “떠나지 말고”라는 말은 “붙어 있으라”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1장에서 룻이 나오미를 꼭 붙잡았다는 말에 사용된 말과 같은 말입니다. 나오미를 보필하고 배려하려고 했던 룻은 이제 보아스를 통해 배려를 받습니다.
그리고 보아스의 호의와 배려는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보아스는 하녀들을 따라 다니며 이삭을 주우라고 하고, 남자 하인들에게는 룻을 건들지 말 것을, 곧 룻에게 추근대지 말 것을 명령함으로 룻이 안심하고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하고, 심지어 목이 마르면 하인들이 길어온 물을 마시라고 하며 룻에게 엄청난 호의를 베풉니다. 룻과 보아스는 오랫동안 봐온 사이가 아닙니다. 서로 교제한 적도 없고 심지어 보아스는 유대인, 룻은 모압인이라는 서로 다른 민족입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보아스의 호의이며 배려입니다.
룻은 앞서 나오미에게 호의를 베푸는 자를 따라 이삭을 줍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호의는 룻의 예상보다 훨씬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보아스로부터 이런 엄청난 호의를 받은 룻이 오히려 의아해집니다. 자신은 이방 여인에 불과한데, 자신이 보아스로부터 주목을 받아 보아스에게 호의를 받은 것에 대한 이유를 10절에서 땅에 엎드리며 물어봅니다. “나는 이방 여인인데, 당신이 어찌하여 저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십니까?”
이에 대한 보아스의 답변은 “너의 남편이 죽은 후로 너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너의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도 온 일이 나에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입니다.
바로 보아스가 룻에게 엄청난 호의를 베푼 것은 룻이 남편이 죽은 이후에도 친 어머니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보필하고 친절을 베푼 것들과 모압 여인이라는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향을 떠나 이 이스라엘 땅으로 왔기에 룻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겁니다. 앞에서 보아스의 하인이 룻에 대한 정보를 들었을 때는 룻에 관한 모든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녀가 시어머니를 공경한 것과 그녀가 고향을 떠나 낯선 베들레헴에 온 것을 높게 평가하여 그녀에게 호의를 베푼 겁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보아스는 그저 룻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 마음씨가 고운 사람 정도로만 보였을 겁니다. 그녀의 선한 행위에 따라서 호의를 베푼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보아스가 룻에게 호의를 베푼 것은 단지 그녀의 선한 행위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12절에서 보아스의 말이 이어집니다. “여호와께서 너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너에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보아스가 룻에게 호의를 베푼 것은 그녀가 시어머니에게 선한 행위를 행한 것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1장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룻은 모압인들이 믿는 그모스가 아니라 여호와만을 믿겠다는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녀는 하나님 한분만 바라보고 자신을 배척할지도 모르는 이 낯선 땅까지 왔습니다.
그녀가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이곳까지 온 이유를 보아스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을 향한 동일한 신앙을 가진 보아스는 여호와께서 룻의 선행에 보답해주시기를 축복하며, 특히 여호와의 날개 아래에 피난 온 룻을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여호와의 날개 아래 피한다는 것은 어미 새가 자기 새끼를 자기 날개 아래에 보호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보호를 받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시편에서 사용하는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시편 91:4 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바로 베들레헴에 온 까닭이 하나님 때문이었던 룻이 베들레헴에 온 이후로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안 보아스는 그녀와 동일하게 이스라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가지고 있기에 그녀에게 호의를 베풉니다. 보아스는 하나님께서 룻을 보호해주실 것을 그저 축복하고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보호가 자신을 통해서 일어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바로 보아스가 룻에게 호의를 베푼 이유도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단순히 그녀를 향한 안타까운 시선으로 인한 동정심과 그녀가 시어머니를 공경하고 고향을 떠나 낯선 곳인 베들레헴으로 온 것을 높이 평가한 것을 넘어서서 룻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구체적으로 자신을 통해서 표현되길 바란 겁니다.
그러므로 3절에서 제가 기억하고 있어야 한댔던 “우연히”가 정말 우연히일까요? 베들레헴으로 온 룻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삭을 줍다가 자신도 모르게 도착한 보아스의 밭에 이르게 된 것이 정말 우연일까요? 이 장면을 보는 관찰자의 시선 또는 이 글을 읽는 독자의 시선으로 봤을 때는 우연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보아스의 밭에 이르게 된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녀를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하게 만드셨고, 그녀가 보아스의 밭에서 추수꾼들과 함께 이삭을 줍고, 그녀가 보아스의 눈에 띄고 보아스가 그녀에게 엄청난 호의를 베푸는 이 모든 과정은 자신의 날개 아래로 피하러 온 룻에게 베푼 하나님의 은혜이며 호의였습니다.
심지어 이 호의를 받은 룻도 보아스의 호의에 의아해하고 이 모든 일이 우연이라고 생각했을지라도 적어도 보아스는 이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보호가 룻에게 임하기를 원한 겁니다.
이렇게 보아스가 룻에게 호의를 베푼 이유에 대하여 말하자 룻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자를 따라가겠다고 나오미에게 말한 그 대상이 보아스가 진정으로 해당되는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룻은 13절에서 “제가 당신의 눈에서 호의를 찾기 원합니다.”라고 말하는데요. 바로 자신에게 보아스가 호의를 베풀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룻은 보아스를 “내 주”라고 표현하는데요. 이렇게 보아스를 표현하는 이유는 보아스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보아스의 하녀들과 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신에게 호의를 베풂으로 보아스가 자신의 마음에 말했다는 뜻, 다시 말해 자신을 위로했기에 보아스를 “내 주”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행한 호의는 이방 여인으로 타인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룻에게 큰 위로를 주었을 겁니다.
그런데 보아스의 호의는 여기서도 그치지 않습니다. 보아스는 이제 룻에게 더 극진한 호의를 베푸는데요. 바로 자신의 사람들,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하는 식사의 자리에 룻을 초대합니다. 8절부터 13절까지 이어진 보아스와 룻의 대화가 끝나고 이제 시간이 흘러 점심 시간이 되었습니다. 보아스와 추수꾼들이 식사하기 위해 함께 모였을 때 보아스의 하녀들의 뒤를 따라가며 이삭을 주웠던 룻은 보아스의 사람이 아닌 자신이 그 식사의 자리에 참여해도 될지 말지 고민하며 다소곳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자 보아스는 친절하게 그렇게 있는 룻을 식사 자리에 초대합니다. 14절은 보아스에게 “이리로 가까이 오라”라고 말하는데요. 이것은 밭의 주인인 보아스에게 가까이 오라는 것으로 룻을 상석으로 안내한 것을 뜻합니다. 외인에다가 그저 자신의 하녀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이삭을 주운 룻임에도 보아스는 자신과 같은 상석에서 함께 식사할 수 있도록 초대합니다.
앞에서 우리는 보아스가 룻에게 행한 엄청난 호의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이제 이삭 줍기뿐만 아니라 룻에게 자신과 같은 위치에서 함께 식사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친절하게 빵을 식초에 찍어서 먹도록 권하고 직접 볶은 곡식을 건내주어 그녀가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합니다. 심지어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음식은 룻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정도라고 합니다. 이것은 룻을 향한 보아스의 호의가 너무너무 컸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제 보아스의 호의가 끝날만도 한데, 룻을 향한 그의 호의는 멈출줄을 몰랐습니다. 15절에서 룻이 다시 식사 후에 이삭을 주우러 갔을 때 보아스는 하인들을 시켜 룻이 곡식단 사이에서도 줍게 하라고 지시합니다. 이는 앞서 룻이 7절에서 추수꾼들에게 부탁한 것이기도 합니다. 곡식단에서 줍게 하는 이유는 곡식을 쌓아놓은 곡식단 사이에는 다른 곳보다 바닥에 이삭이 많이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룻에게는 외지인인 자신이 다른 곳보다 이삭이 많이 떨어져 있는 이 곡식단에서 이삭을 줍는 것이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녀는 그저 이삭을 줍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그녀에게 이삭을 많이 쥐어주기 위해 곡식단 사이에서도 줍도록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 곡식단에서 룻이 이삭을 주울 때 하인들이 눈치를 주거나 굴욕감 혹은 모욕감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하인들에게 신신당부하며 그렇게 하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
심지어 보아스는 16절에서 이미 추수한 곡식 다발들 사이에서 이삭을 뽑아서 버릴 것을 하인들에게 지시합니다. 룻에게 직접적으로 이삭을 주면 룻이 부담스러워하거나 보아스를 향한 미안함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도록 보아스는 룻이 모르게 이렇게까지 행했을 겁니다. 룻은 유독 보아스 밭에만 이삭이 무더기로 떨어져 있는 것을 영문도 모른 채 주웠을 겁니다. 룻을 향한 보아스의 배려가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룻은 보아스 밭에서 주운 풍족한 이삭들을 가지고 나오미가 있는 집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보아스 덕분에 삶의 밑바닥에 있었던 룻과 나오미의 삶은 회복되고 위로를 받았을 겁니다.
그들이 이러한 호의를 받을 것을 기대하고 베들레헴으로 온 것은 아니지만, 보아스 한 사람을 통해 룻과 나오미가 회복됩니다. 고작 한 사람을 우연히 만난 것이지만, 그 사람을 통해 위로가 이들에게 전해집니다. 더 나아가 이 모든 과정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아스를 통해 룻과 나오미를 위로하셨습니다. 가난한 그들을 채우셨고, 자신의 날개로 이들을 보호하셨습니다. 보아스 한 명을 통해 하나님은 풍족하게 채우셨습니다.
이들에게는 예상치 못한 우연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이들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그모스가 아닌 여호와를 믿고 의지하겠다는 룻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그녀를 먹이고 위로하셨습니다. 비록 이방 여인이지만 자신을 믿고 의지하려는 그녀에게 그녀의 비참한 삶을 구원해줄 보아스라는 구원자를 보내심으로 그녀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룻과 보아스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이며 하나님의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 있다는 것이 이토록 큰 위로를 가져다 줍니다.
오늘 우리에게 오늘 이 말씀을 한번 비춰봅시다. 오늘 말씀에서 제가 제일 많이 말한 단어는 “호의”입니다. 하나님께서 룻에게 보내신 구원자 보아스는 룻에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가 룻에게 이렇게 하도록 명령한 자도 없었으며 그에게 이런 의무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가 룻에게 행한 것은 순전히 그의 호의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율법에 약자를 위해 소출을 남겨놓을 것을 명령하신 것을 보아스가 지킨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행한 것은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곡식단 사이에서 줍게하고, 더 나아가 추수한 곡식 다발에서 이삭을 땅에 버리게 하고, 심지어 식사 자리 상석에 초대하여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식구처럼 대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이 엄청난 호의를 하나님께서는 룻의 구원자 보아스를 통해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이 룻보다 더 큰 호의를 우리는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우리를 죄라는 비참한 상태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할 의무가 전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곡식 다발에서 이삭을 버리게 하는 것 같은 과할 정도의 호의를 우리에게 베푸셨습니다. 바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기까지 말입니다. 나중에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보아스는 그리스도의 조상입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아스의 호의가 완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심으로 자신이 보아스 중의 보아스, 참된 보아스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참된 보아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성찬이라는 식사의 자리에까지 초대하십니다. 우리에게 가당치도 않은 그 교제의 자리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한없는 호의를 베풀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이 룻과 같이 비참해질 때, 우리가 낙망하고 지칠 때 그리스도께서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우리를 구제하여 위로하십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 그리고 우연처럼 보일지라도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한없는 호의를 우리가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우리도 결코 가만있지 못하고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호의를 우리 주변에 있는 자들에게 베풀게 될 겁니다.
세상은 하지 않아도 될 호의를 결코 베풀지 않습니다. 자신이 받은만큼 돌려주면 주었지, 그 이상 베풀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냐며, 내가 왜 손해를 보면서까지 그렇게 해야 하냐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다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큰 호의인 그리스도를 선물로 받았기에 룻처럼 “나에게 왜 이렇게까지 해주지”라는 의아해 할 정도의 호의를 베풀게 될 겁니다.
그렇게 할 때 그 호의를 받은 자가 같은 동료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서 보호를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서로가 명확하게 경험하는 순간이 될 것이며, 불신자라면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라는 최고의 호의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이 가장 큰 호의를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룻과 같이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는 우연처럼 보이는 것들로 하나님께서 지탱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 룻기를 통해 살펴본 하나님의 호의가 룻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룻과 같이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 절하며 감사하는 삶을 일생동안 사는 우리 모든 새순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함께 오늘 이 말씀을 두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이 시간 한 가지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룻이 보아스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호의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호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받은 그리스도의 호의에 감사하며 우리가 먼저 호의를 받은 자들로서 우리 주변에 있는 자들에게 우리가 호의를 베풂으로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경험하는 놀라운 일이 생기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날개로 보호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날개가 우리에게 실현되는 놀라운 일이 생기도록 이 시간 함께 이 기도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