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사랑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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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0년도 수학능력고사를 치룬 날이자, 2학기 캠퍼스 모임의 마지막 날이에요. 고3학생들에게는 그동안 노력의 결실을 맺는 날이며 우리들에게는 2020년도의 결실을 맺는 날이죠. 물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죠. 매년 돌아오지만 매번 돌아오기에 우리가 신경 쓰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죠.
날짜는 지났지만 11월 13일이 저의 생일이었어요. 뭐, 강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생일은 축하받고 사랑받을 수 있는 날 중에 하나이죠. 저도 예전의 제자들이나 학생들에게 축하를 받으면서 참 감사하고 사랑받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여러분 그렇다면 사랑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여러분, 여러분은 사랑이 뭔지 아세요? 아.. 여기 아는 사람이 없을려나? ㅎㅎ 네이버 사전이 만능은 아니지만 제가 잘 애용하고 있는데 사랑의 사전적 정의는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으로 인류에게 본편적이며 인격적인 교제, 또는 인견 이외의 가치 이외의 가치와의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힘” 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럼 사랑의 사전적 의미가 저렇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최고의 본질이자 기독교인의 가장 큰 덕목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필수적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요한일서에서 언급한 두번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는 고백은 성경에서 나오는 말 가운데서 가장 엄청난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는 말이 사람들이 가장 오해하는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잘못된 개념들이 주위에 가시 울타리처럼 자라나 그 참된 의미를 시야에서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가시 덤불을 잘라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본문의 참된 의미가 이해된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라는 말을 쉬이 들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특히 요한일서 4장 16절 앞부분에 적혀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는 사랑들도 참 아름답고 멋진 사랑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할 것 입니다. 신약에서는 이러한 사랑에 대해 아는 것이 특별한 사람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이이라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럼 잘 모르는 사람인 우리들은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닌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물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그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알고 그것을 체험하는냐 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정의하고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먼저 오늘 우리가 읽었던 요한일서에서 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2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성경에 근거해서 볼 때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따로 떨어져 있는 추상적인 정의가 아니라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을 우리들의 입장에서 요약한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나머지 기록을 전제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고,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으며 아브라함을 부르사 나라를 이루게 하셨고 정복과 사로잡힘과 포로 생활을 통해 자기 백성을 연단하셨으며,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고, 믿지 않은 이스라엘을 내버리시고 요한이 이 글을 쓰기 직전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셨으며 언젠가 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다. 라고 말이죠.
우리가 오늘 기록한 요한의 말을 오해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그 말을 요한의 다른 저술서인 요한복음을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사마리아 여인이 가지고 있던 개념, 곧 제대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장소는 한군데 밖에 없다는 마치 하나님이 지역적으로 제한을 받기라도 하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이 잘못 되었다고 깨우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고, 유형적 존재가 아니기에 지역적인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받아들여질 만한 참된 예배의 조건은 우리가 직접 예루살렘이나 사마리아나 다른 어떤 장소에 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반응하는 것이 예배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에게는 몸이 없습니다. 방금 말했듯이 하나님은 공간과 거리의 모든 제약을 초월하시며, 편재하십니다. 야고보서에는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고”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연적 과정의 모든 제한으로부터 자유하시며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입니다. 또한 인간과 다른 감정 체계를 가지고 계시기에 영이신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처럼 변덕스럽고 동요가 심한 것이 아니며,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어떤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기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어떤 것도 일단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를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그리스도인과 관련해서는 완전한 진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그분이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모든 것에서 표현되는 것을 의미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모든 것에서 표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해당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위안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 개개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약속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몇가지 일이 아닌 모든 일은 하나하나 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며,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촉진하기 위한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매순간, 매일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대해 알고 관심을 가지고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하셨는지 알지 못할 때라도 우리는 그 안과 배후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것들이 잘못되고 있을 때라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지 알아보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며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개념을 6가지로 설명을 하겠습니다.
첫번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발휘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란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35절에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히시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이나 악한 자들에게까지도 인자하시고 도와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왕국시대에 보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에 각각 한명의 가장 큰 악한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인 아합은 이방여인 이세벨과 결혼하여 바알을 숭배하고 남의 포도원을 탐내서 사람을 죽인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남유다의 가장 악한 왕인 므낫세는 이교도들이 벌이는 가증한 일을 하고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건축하여 바알을 섬기고 우상을 숭배했던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추후에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고 용서를 구하며 기도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관대하심과 자비하심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선하심은 하나님 안에 있는 완전함으로 “하나님으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을 관대하고 친절하게 다루도록 촉구하는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각이 있는 피조물 자체에게 느끼는 애정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발휘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은혜와 자비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했으며, 하나님 보시기에 본성이 부패했고, 정죄를 받아 하나님의 앞에서 추방당해 마땅한 이성적인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보통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랑이란 사랑할 만한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죄인들을 즉, 보시기에 사랑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그것이 심히 아름답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내가 저들을 창조한 것을 후회한다고 하실 정도로 사랑스럽지 못하게 되었고 사랑스럽지 않은 피조물인 우리를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신다. 물론 그 사랑을 불러 일으킬만한 조건은 단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자유롭고 자발적인 것으로, 어떤 것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기로 하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인 선한 기쁨 이외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어떤 이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세번째로는 하나님의 사랑은 개개인의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발휘된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누구에게나도 향하지만, 특정하게는 아무에게도 향하지 않은 막연한 선의가 아니입니다. 본질상 그 대상과 결과 둘 다를 분명하게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은 에베소서 1장 4절에 기록하기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복 주려는 자들을 택하고 뽑으신 것과 그들에게 주어질 유익 및 그 유익을 획득하고 누릴 수단을 지정해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기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에 언급하면서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때가 이르러 개개의 죄인들을 향하여 발휘되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이 영원 가운데 정하신 목적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네번째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의 복지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상대방에게 참여하는 것은 모든 사랑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아들이 곤란을 당하는데도 아버지가 계속해서 유쾌하게 아무 걱정없이 지낸다거나, 아내는 비탄에 잠겨 있는데도 남편이 태연하다면, 우리는 즉시 그들의 관계에 과연 사랑이 존재하는지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상대방 역시 참으로 행복할 때만 행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사랑을 쏟으심으로써 자신의 궁극적 행복과 밀접하게 관련시키셨다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자기 백성의 사랑 많으신 아버지와 남편으로 말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런 것으로 볼때, 하나님의 행복은 그분이 사랑하시는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 곤경에서 벗어나기까지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기 전에는 사람이 없이도 지내셨지만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사랑을 쏟으셨다. 하지만 인간들이 죄를 지었을 때, 그냥 멸망하셨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사람들이 죄를 지었음에도 그들을 사랑하셨다. 이것이 뜻하는 내용은 이들이 하나님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그들 모두 저 천국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실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만이 아니라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도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하신다. 누가복음 15장 10절에 기록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기쁨이 되느니라” 라고 한 것처럼 왜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 자신의 기쁨이 되는지를 설명해준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며 믿기 어렵지만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러하다는 사실이라고 이야기 한다.
다섯번째로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아들을 선물로 주셔서 그들의 구세주가 되도록 하신 것에 의해 표현된다. 일반적으로 사랑을 측량하는 기준은 얼마나 많이 주는가에 따른다. 하나님의 사랑의 양은 자신의 독생자가 인간이 되어 죄를 위해 죽고 그럼으로써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가는 유일한 중보자가 되도록 그분을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드러난다. 사도바울이 에베소서 3장 18절에 이야기 하기를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 우리의 지식을 초월한다. 이러한 큰 희생을 치르며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본 적이 있나요? 바울은 이 최고의 선물이야말로 다른 모든 것을 보장해 준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었던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계속 말하면서 9절, 10절에 이야기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언약 관계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즐기도록 해줌으로써 목적에 도달하게 합니다. 언약 관계란 두 당사자가 서로 섬기고 의지하기로 영원히 서약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관계의 조건이 처음 이야기 나온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보이셨고 그에게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창세기 17장이었습니다. 바울이 기록하기를 그리스도인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해 이 약속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하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에 대한 참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행하시는 것 곧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최선의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우리를 지금도 영원토록 헤아릴 수 없는 복으로 가득 찬 관계에 들어가게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제가 말한 것이 여러분들에게 어떤 의미로 들려집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느끼신 하나님의 사랑이 지금까지 말한 내용이라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학기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가 1년 동안 캠퍼스에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곳 가운데 보내신 이유를 살펴보았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속성 중 사랑에 대한 마음을 갖길 원하셨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곳 캠퍼스에서 사랑을 내 마음에 품고 캠퍼스를 바라보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신 상황 가운데 투덜거리며 불만과 원망을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어쩌면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에게 이렇게 살면 안된다 라고 이야기 하시는 것 같아 많이 찔렸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온전하게 하나님만이 차지하신 것이 아닌 나의 욕망과 이기적인 마음으로 나뉘어져 하나님이 내 마음 전체를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것들이 무엇인지 찾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사랑하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할텐데, 우리는 어린 시절에 배운데로 우리의 머리속에 창조한 하나님의 모습을 인간의 잣대로 제 보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다른 모습을 보고 어쩌면 놀라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는 모습들 가운데 인간의 이성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이 아닌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그 하나님을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우리 캠퍼스 학생들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이시간 함께 오늘 말씀 가운데 생각나는 것을 가지고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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