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 사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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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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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님들, 앞에 보이시는 사진을 보고 바로 떠오르는 게 뭐세요? (숲 사진)(질문)
네, 아마도 10명에게 이 사진을 보여 주고 떠오르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숲이 보인다” 혹은 “나무가 보인다” 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어느 대상을 보고 모두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게 내가 자라온 환경에 따라 다를 것이며, 또는 문화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데요,
오늘 나눌 본문 속 이야기도 이와 같습니다.
이 시간 나누고자 하는 주제는 아이들입니다. 주제를 보면, 한편으론 “나눌게 있나?” 할 수도 있고요, 또는 “그렇지 정말 중요하지” 하실 수도 있어요. 어느 생각을 하셨든 나무를 보셨던 분은 새로운 시야가 열리길 소망하고, 숲을 보셨던 분은 숲 너머까지 상상하게 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제가 어릴 때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장차 피어날 꽃이자 나라의 미래를 짊어 지고 갈 일꾼이다” 당시 어렸던 저는 이해를 못 했지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이 말을 다 이해하셨을 거예요.
“비록 지금은 능력 없는 어린아이지만 성장해서 꽃을 필 나이가 되면 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만큼 능력 있는 일꾼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오늘날 국가 미래의 걱정은커녕 어린아이들이 점점 줄어 들고 있는 실정 아닙니까? 결국 인구 감소가 시작됨과 동시에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 들었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재밌으면서도 슬픈 사진 하나를 봤는데요, 같이 보실까요, (버스안 사진) 어느 지역 버스인지는 모르겠지만 젊은 사람이 맨 뒷 자석에서 승객 분들의 헤어스타일이 다 똑같아서 찍은 사진이에요, 그런데 사진 속에는 어린아이는 고사하고 청년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파마를 하신 어르신 들이예요. 그런데 일상 속 거리만 봐도 어르신들이 더 많이 보이지 않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보이는 큰 문제는 바로 “고령화”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가 교회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죠, 교회의 문제임과 동시에 사회문제입니다. (고령화 표 1)
지금 앞에 보이는 표를 표시면 고령화가 얼마나 급속하게 빨라지는지 보여주고 있는데요, (고령화 표2) 표에 보여지는 노령화 지수는 15세이하 아이들 100명대 노인인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2023년만 봐도, 아이들 100명이 있을 때 노인인구는 163.4명이 있는 거죠. 결국 아이들이 더 많아야 하는데 노인 인구가 63.4명이 더 많다는 것은 인구 –가 시작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럼 교회의 실정도 어떤지도 봐야 겠죠, 2013년 부터는 1% 남짓 오르던 그래프가 2020년을 지점으로 가파르게 오르고 있는데요, 22년, 23년에는 26%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성도 수 100명 중에 65세 이상인 분들이 26명이라는 건데 이게 결코 적은 수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들부터 노인까지 합쳐서 나온 비율이니까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비록 시골 이였지만 전체 교인 수가 200명 가까이 되었구요, 교회에 아이들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심지어 학급 반보다 많았습니다. 제 기억으론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약 35명 정도로 기억하는데 중, 고등학생까지 친다면 45명 정도 됐을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더 좋아지고 편해졌음은 틀림 없지만 지역교회를 놓고 보면 초등부터 고등까지 50명 정도 되는 교회가 흔치 않고요, 대형교회도 어린이 부서부터 청소년 부서까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자 그럼, 이런 문제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부에서 여러 방안을 놓고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지만 유지는 고사하고 오히려 점점 더 악화가 되어 가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뭘까요? 솔직히 국가에서 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을 여기에 모인 우리가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우리는요, 저출산 문제를 해결 할 수 없고, 초고령화에 진입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 하지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방법을 찾고 실천할 수 있고요,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방법을 찾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충은교회 성도 여러분,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실천 방향을 찾아보고 고민하고 생각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자, 오늘 말씀은 너무나 익숙한 말씀이죠. 설교로도 많이 듣고, 그림으로도 많이 보고, 심지어 액자로도 많이 보셨을 겁니다. 이렇듯 예수님이 어린 아이들을 안으시며 웃고 계신 모습은 아주 익숙한 장면일 겁니다.
자, 그럼 익숙한 이 장면을 상상해 볼까요? 예수님이 왜 어린아이를 끌어 안으셨을까요? 구지 제자들이 못 오게 말리는걸 그들을 꾸짖어 가며 왜 아이들을 안으셨을까요?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 때문에? 아니면 그 아이들이 불쌍해서? 복수적인 의미가 있겠지만 이 상황을 좀 더 깊게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회는 로마가 다스리던 시대였습니다. 빈부격차도 심했을 거고요, 심지어 말씀을 알고 가르치는 지식인 계층은 이미 정권에 빌붙어 부를 누리고 있었고, 유대인들이 따르던 토라의 복지 또한 이미 더렵혀 져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자, 이런 상황에서 일반 백성들의 삶은 어땠을까요? 더 나아가 과부와 병자와 거지 등 사회로부터 배척받는 이들의 삶은 어땠을까요? 당시 시대는요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을 수밖에 없는 과부만 봐도 아주 잘 드러나 있습니다.
당시 성전에서 제일 저렴하게 파는 제물은 비둘기였습니다. 가난한 자의 부담을 덜고자 했던 게 비둘기를 바치는 거였죠. 자, 그럼 이런 제도가 있었음에도 왜 누가복음 21장에 과부는 두 렙돈을 넣었을까요? 제일 저렴한 비둘기를 샀으면 됐을 텐데 말이죠.
이유는 뻔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성전의 환율을 올려 비둘기 한 마리를 9만원에 팔았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2.500원이 전부였고, 어쩔 수 없이 그 전부를 넣은거죠.
예수님은 그들의 욕심과 타락을 보시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죠.
자, 이 배경만 봐도 우리는 과부와 거지와 병자와 어린아이들이 당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최소한의 종교 행위도 못하고, 사회로부터 아무 혜택도 받지 못하는 그야말로 살아도 산 게 아닌 그런 삶 이였습니다. 아마도 본문에서 예수님께 다가가는 사람들도 두 렙돈을 헌금한 여인과 비슷한 삶의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우리 13절 함께 읽겠습니다.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네,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가고 있네요, 예수님께 향하는 목표는 뚜렸하죠? “예수께서 만져 주시는 것” 단 하나입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어린 아이는 몇 세부터 몇 세까지를 이야기하는 걸까요? 우리가 흔히 그림으로 봤던 어린 아이일까요?
예수님께서 아이들에 대해 축복한 내용은 마가복음 외에도 마태와 누가에도 나오는데요, 먼저 마태복음 19:13절을 보면
13.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 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마가복음과 마찬가지로 “어린 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누가복음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8:15절을 보면
15.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 네, 누가복음에서는 어린 아기라고 표현하고 있네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어린 아이”로 쓰인 원어 『파이디온』은 반쯤 자란 소년, 소녀, 처녀를 뜻하지만 누가복음에서 쓰인 『브레포스』는 원래 태어나지 않은 태아를 뜻하나, / 유아기까지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는 약 12세까지일듯 해요.
그렇다면 예수님께로 온 사람들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죠, 남편을 잃어 홀로 아이를 키우는 과부들과 병을 얻은 아이들, 그리고 앞으로 출산을 앞둔 여인들이 예수님께로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막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기관도 아니고, 바리새인도 아닌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죠.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을 따라 다니면서 스승과 가치관도 다르고,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도 다른데요,
예수님은 지금 자신에게 오는 사회적 약자들을 끌어 안으시지만, 제자들은 일반 대중들과 똑같습니다. 남들이 저들을 막듯이 제자들도 똑같이 막아 서고 있어요, 마치 자신들이 뭐라도 되는 양 말이죠.
제자들의 행동에 예수님은 “노하였다”고 하시는데요,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들의 행동이 얼마나 한심했을까요? 입이 마르게 가르치고, 발이 닳도록 행동으로 보이시는데 여전히 세상과 똑같이 살고 있는 제자들을 보시며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만약 예수님께서 지병이 있었다면 딱 하나 있었을 것 같아요. 화병이요.
그런데 저는요, 이 말씀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온 이 엄마들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 본문에서 “만지다” 라는 원어 “합토마이”는 축복, 축사의 의미도 있지만 “아프토”에서 파생된 단어로 “치료하다”는 의미를 함께 갖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5:24절-29절까지의 내용으로 혈류병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을때에 쓰인 단어도 같은 단어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에게 다가갔던 엄마들은요, 자식들이 자신들과는 다른 인생을 살길 바라며 음지에서 양지로 나왔을 것입니다. 이 혈류병 여인 처럼요. 본인들도 자신들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라는 것을 충분히 알았을 거예요.
사람들은 죄인 보듯 자신들을 보며, 옆을 피해다니고, 또는 욕도 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죠.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것이 더 중요했어요. 왜냐면 내 자식이 달려 있기 때문이죠.
아마 그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내 자녀는 이 사람처럼 컸으면 소원이 없을거야” , “지금 내 뱃속에 아기는 장차 이 사람처럼 컸으면 소원이 없을거야” 이런 생각 말 이예요.
여러분, 오늘날 교회에서 아이들이 줄어드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정말 저출산 문제로 인해서 교회에서 아이들이 줄어든다고 생각하세요? 물론 영향을 받겠죠. 학교도 폐교되는 실정이니 말 이예요.
그런데 정말 큰 이유는 부모에게 있습니다. (교회 처음 나온 시기 표) 자 표를 보시면요, 교회에 출석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보면, 처음 교회에 나온 시기는 태어날 때부터, 그러니까 모태신앙이라고 하죠, 그리고 초등학교 이전, 초등 시절, 중학교 시절까지가 제일 중요한 시기임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건 중학교를 앞 두고 교회에 나가는 확률이 무려 94.4%라는 겁니다. 이게 뭘 말해주나요? 아이가 중학생이 되어서 교회에 나갈 확률은 굉장히 적다는 거죠.
이 시기에 교회에 적응 못하면 신앙생활 하기가 힘들어 진다는 거예요.
결국 신앙의 기초는 이 시기에 형성되며 잡히기 시작하는데, 제일 중요한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여러분, 요즘 아이들은요 / 저희 때처럼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두지 않습니다. 그런 친구들은 많지 않아요. 일반적으로 주일만 왔다가 가는 경우가 많고요. 주일 조차도 여러 가지 이유로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일주일에 한번 1시간을 1년 52주로 치면 총 52시간을 교회에서 보내게 됩니다.
담임 목사님이 아이들 신앙 말씀 하실 때 항상 하시는 말씀이 뭔지 아세요? “아이들 신앙은 부모에게 달렸다”입니다. 성도 여러분, 1년은 8.760시간입니다. 그중에서 52시간을 빼면 8.708시간이에요. 아무리 자녀랑 얼굴 볼 시간이 없다고 한들 교회에서의 시간 보다 없겠습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음지에서 양지로 나온 여인들입니다. 사람들의 시선, 욕설. 갖은 무시 등을 다 이겨내고 예수님께로 나아온 여인들이에요. 그 이유가 뭐였습니까? “내 자녀를 위해서” , “내 자녀의 축복을 위해서” 였습니다.
물론 신앙에 대한 부분은 교회에서 이뤄져야 할 부분이 분명하게 있고, 교회의 몫도 무시할 순 없지만, 그 만큼 교회 못지 않게 중요한 곳이 가정이라는 것이죠. 부모라는 것입니다.
제가 할머니 헌금을 가져가서 무지하게 혼났 다는거 말씀드렸죠? 여러분, 저는 단순히 돈을 가져갔다고 혼난 게 아니었어요. 당시 저는 처음 이였고, 액수도 몇 만원도 아니고 5천 원이었습니다. 솔직히 좀 도둑도 훈방으로 끝나는 경우가 있지 않나요?
그런데 저는 도둑은 고사하고 5천 원 가져갔다고 걷지도 못할 정도로 혼났습니다.
그 처벌의 쟁점은 헌금을 가져갔다는 거예요. 할머니가 다리미로 열심히 다려 가면서 성경책에 따로 챙겨둔 그 헌금을 저의 욕심을 위해 하나님의 것을 가져 갔다는게 화를 불러 온 것입니다. 성도님들, 신앙교육은요 말씀을 가르치고 Q.T를 하게끔 만드는 게 신앙교육이 아닙니다.
신앙의 기본이 되는 자질을 가르치고 인도 하는 게 신앙교육 아니겠습니까? 성경을 일독하고 찬송가를 많이 안다고 신앙이 좋은 건가요? 예배의 준비가 뭔지, 예배의 순서와 내가 왜 이 자리에 와 있는지, 왜 먼저 헌금을 구별하고 내가 남은 것을 써야 하는지 아는 게 먼저 아니겠습니까?
신앙교육은요 모두에게 해당 되는 것입니다. 내 자녀가 성인이 되었어도 신앙이 약하다면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이고, 내 자녀가 아니라 손자, 손녀 또는 조카일 지라도 그 영혼을 위한다면 신앙에 대한 교육은 필이 해야 하는 것이죠.
저는 어릴 때 가정교육을 굉장히 엄하게 받았는데요, 말 대꾸하면 혼났고요, 밥 숟가락 먼저 들면 혼났고, 밥을 앞에서부터 안 먹고 뒤에서부터 먹거나, 젓가락으로 먹으면 혼났습니다. 심지어 젓가락질을 하루 만에 터득했어요. 이 모든 교육은 제가 8살이 되기 전에 다 이뤄 진거예요.
그런데 교회를 다니면서 범위가 더 확장되더라고요. 와, 이게 굉장한 스트레스였어요. 이제 하나가 막 끝났는데 새로운 교육이 또 시작 된거죠. 그런데 이건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제 몸에 배어야 한다는 게 중요하더군요. 바로 신앙교육 이였습니다.
예배는 무조건 최소 10분 전에 가서 앉아야 했고, 교회에서 봉사는 최소 하나 이상 해야 했고, 교회 갈 때 슬리퍼나 반바지 입으면 안됐으며, 행여나 떠들거나 졸거나 늦으면 굉장히 혼났습니다. 그리고 헌금도 제일 깨끗한 돈을 빼서 드려야 했어요.
그런데 여러분, 이제는 이런 게 좀 과하다고 여겨지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특히나 헌금을 깨끗하게 다려서 낸다거나 새 돈을 내야 하는 게 정답은 아니지요. 하나님은 다려서 낸 돈과 새 돈은 받으시고 헌 돈은 받지 않는 분이 아니시니까요.
그런데 성경은요, 우리의 구별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과 마음 가짐을 갖고 나가야 하는지 말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라고 말합니다. 신앙의 기본 자세, 그게 중요한 것이죠.
제가 우리 청소년부 아이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자주 하는데요, “와 나도 꼰대가 되었구나” 정말 요즘 친구들은 이해 불가 할때가 한 두번이 아니에요. 그 친구들 보면 이것도 말하고 싶고, 저것도 말하고 싶은데 그거 말하다 보면 예배 시간이 끝나거든요. 정말 그런 제 모습을 볼 때면 “꼰대도 이런 꼰대가 없구나” 생각합니다.
아마 자녀들을 보며 저와 같은 생각을 모두가 하실 것 같아요. 그런데 성도님들, 다른 부분에선 몰라도 자녀들의 신앙에선, 손자, 손녀 또는 조카들의 신앙에서는 꼰대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게 정말 사랑 아닐까요?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 말 이예요.
물론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네, 좋습니다. 너무 이쁘고 사랑하니까요.
그러나 신앙에서 만큼은 구별된 자세를 가르쳐 주어야 겠죠, 그게 이 시대의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할 길이 될 것입니다. 아멘 이시죠?
네, 그럼 계속해서 15절 함께 보겠습니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 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5절 말씀에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다” 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어린아이는 약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과부와 여성과 어린아이들이 예수님에게 온 거잖아요,
마태복음 25:40절 말씀으로
40.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라며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듯이
지금 예수님 앞에 모인 자들은 모두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자 들이예요. 즉 이들을 맞이하는 자, 환대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못 들어간다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오늘날은, 예수님 시대처럼 사회적으로 무시 받고, 천대받는 어린 아이들은 없지요, 그리고 그런 대우를 받는 이혼한 여성들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맞게 다시 생각해 보면요, / 어린 아이들을 대할 때 그 아이 존재 자체를 이해하고 맞이해야 함이 맞을 겁니다.
오늘날 청소년들과 청년이 교회를 떠나는 큰 이유 중 하나가 어른들이 색 안경을 끼고 판단하는 이유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로 “저 아이 집은 OO래” , “저 아이는 과거에 이랬데”, “쟤 부모님은 이래서 이혼했데” 등 아이 한명 한테 수 없이 많은 수식어를 붙여서 판단해 버리는 거죠.
여러분, 교회는요 정상적인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고요, 성공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도 아닙니다. 언제 부턴가 교회에는 사회에서 한 자리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요, 또 언제 부턴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성공해야 한다는 심리가 작용해서 붐을 이루었던 시기가 있었어요,
이런 인식 속에서 오늘날 교회는요, 남는 자들만 남은 그들만의 모임이 되어 버렸습니다. 더 이상 새로운 사람들이 교회에 오려고 하지 않아요. 그들이 들어오기에는 교회 문턱이 너무 높거든요. / 특히나 내가 가진게 없다면, 내 배경이 좋지 못하면 / 더 못 오는 곳이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너무 다르지 않나요?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라고 하셨습니다. 사회적으로 약하거나, 배경이 좋지 못하거나, 마음이 상한 자들을 용납하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과연 교회 안에 그런 분들이 얼마나 계십니까? 우리는 이런 분들을 얼마나 포용하고 있습니까?
심지어 부모님과 같은 교회 다니는 것을 불편해 하는 친구들도 아주 많습니다. 학생 때는 어쩔 수 없이 다녔어도, 성인이 되고 나서는 다른 교회로 옮기거나 심지어 다니는 않는 경우도 많고요. 왜 그럴까요? 판단 받으니까. 나에 대해서 많은 걸 아는 교회가 싫은거예요. 즉 구설수에 오르는게 불편한 거죠.
결론
여러분, 다음 세대를 길러 내는 방법은 결국 용납하고 수용하는 거예요. 그들의 약한 점, 지나간 과거, 부족한 배경까지 우리가 끌어 안고 가는 것이 다음 세대를 길러내는 사랑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요,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분입니다.
우리도 이 모습 본 받아 천하보다 귀한 영혼 구해야 하지 않겠어요?
오늘 이 시간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이 각자의 자리에서 천하보다 귀한 영혼 구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자녀가 있으신 분들은요, 자녀의 신앙을 보며 가르치고 인도해 주는 교사가 되길 소망하고요, 손자 손녀가 있으신 분들은 그 손자 손녀를 사랑으로 가르치길 소망하며,
교회 공동체에서는 약한 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예수님이 어린아이를 끌어 안고 축복하셨듯이 우리도 그들을 극진히 사랑으로 끌어안는 주님의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작은 실천이 모여 다음 세대를 길러내는, 복음의 일꾼이 생겨나는 은혜가 자리가 되길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사랑』 찬양 할 텐데요, 우리 함께 찬양할 때에 우리의 과거도 배경도, 약함도 보지 않으시고 내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그 사랑을 고백하며 찬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