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설교 240808 목 [에스겔 3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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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240808 목 [에스겔 30장]
새벽설교 240808 목 [에스겔 30장]
본문: 에스겔 30장
본문: 에스겔 30장
에스겔 29장에서 32장까지 애굽에 관한 심판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네 장의 단락을 읽지만, 어제 우리가 나누었던 것처럼 그 내용은 일곱개의 예언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각 예언은 29장 1절처럼 그 말씀이 예언자에게 주어진 시기를 알리며 이렇게 시작하지요. “열째 해 열째 달 열두째 날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래서 우리는 장별로 본문을 나누어서 읽기는 하지만, 내용이 꼭 장별로 떨어지진 않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30장 20절에는 새로운 예언이 시작됨을 보이고 있습니다. 반면에 그 앞의 본문인 30장 1-19절은 29장 17절에서 시작된 예언에서 이어지는 단락임을 알 수 있지요. 29장 17절은 이 예언이 ‘스물일곱째 해 첫째달 초하루’에 주어졌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예언 단락들마다 그 날짜를 한번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애굽에 대한 첫번째 예언은 29장 1절에서처럼 ‘열째 해 열째 달’에 전해졌습니다. 대략 기원전 588년 즈음으로 바벨론이 유다의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함락시키려했던 아주 급박한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두 번째 예언을 다루고 있는 에스겔 29장 17절부터 오늘 30장 19절까지는 29장 17절에서 전하는 것처럼 스물일곱째 해, 그러니까 대략 기원전 571년 즈음에 전해졌습니다. 이 때 예루살렘은 이미 멸망했지요. 에스겔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사로잡혀와 포로로 생활하던 시기입니다. 국제적으로는 29장 17-21절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바벨론이 남쪽의 큰 나라 애굽을 정복하려고 그 길목에 선 두로를 함락시키려 먼저 전쟁을 일으켰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은 시기였습니다. 유다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바벨론이 주춤하던 때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첫번째 심판 예언과 두번째 예언 사이의 시간을 계산해보면 대략 16년간의 간격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예루살렘에 남은 유다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비추어졌을까요? 과연 에스겔의 예언은 어떤 메시지로 다가왔을까요? 우리가 어제 보았던 것처럼 29장 6절은 유다 사람들이 애굽을 어떻게 여겼는지, 애굽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잘 나타냅니다.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 애굽은 이스라엘의 지팡이, 말하자면 의지할 존재였다는 것이지요. 유다와 이스라엘 역사에서 애굽은 항상 큰형님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집트가 지닌 그 자리를 넘볼래야 넘볼 수 없고, 흠씻 두들겨 맞고 가진 것 빼앗기는 적 많았지만, 이스라엘과 유다가 북쪽에서 밀려내려오는 앗수르나 바벨론을 대항할 때는 또 애굽이 뒷배가 되어 후원을 받기도 했던 것이지요. 유다가 마지막으로 멸망할 때도 애굽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작은 나라인 유다가 큰 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꿈꿀 수 있었던 것도 애굽의 뒷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바벨론에 멸망한 후에도 유다 사람들에게 남은 애굽의 영향력은 상당해서 예레미야서에서 보는 것처럼 남은 자들의 다수가 애굽으로 도망쳐 정착하기도 하지요. 그들에게는 애굽이 끝까지 의지할 수 있었던 존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그것은 ‘갈대 지팡이’이지요. 의지할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두 번째 예언을 볼 때 그 심판 예언이 벌써 16년이나 미루어지지 않았습니까? 더군다나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라고 말씀하시는데, 애굽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두로를 칠 때도 시원찮아 보입니다. 그러니 유다 백성들이 그 16년간 정세들, 현실들을 살펴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예언자의 허튼 소리를 믿느니, 차라리 오랫동안 우리가 의지할만한 든든한 큰 형님, 뒷배가 되어주었던 애굽에게 손 내미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하진 않았을까요? 16년의 시간이 점점 그들의 마음이 다시 애굽에 기울기에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절입니다. “그 날이 가깝도다.” 인생에 16년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지요. 그정도로 지체되면, 대충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겁니다. 사람들이 현실을 살펴보고, 지혜를 짜내어서 무엇이 이득인가, 무엇이 최선인가,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 중에 더 나은 것은 무엇인가, 주변을 둘러보니 성취될 것 같지도 않은 말씀에 겁먹고 오래 뒷배가 되어주었던 애굽과 관계를 끊는 것보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다시 그들과 손 잡는 편이 더 낫겠다 생각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 날이 가깝도다.’ 애굽을 심판하실 날이 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가 임박했다는 것이지요. 여전히 애굽이 매력적인 선택지로 비추어질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될 때면 먼지처럼 흩어질 헛된 희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때가 오면 사람들 보기에 지혜로웠던 결정이 말씀을 신뢰하며 인내하지 못한 가장 어리석은 일이었음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성도에게도 이 땅의 삶을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식이 필요하고 능력이 필요합니다. 실력이 필요하지요. 우리는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을 면밀하게 살피고, 깊이 통찰하고, 그 안에서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예측하며 분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과 같은 예언자들 모두가 그저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만 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히고 섥힌 국제 정세를 깊이 관찰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은 우리에게도 그런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그러나 예언자들은 가장 면밀하게 자신들의 현실을 통찰했던 사람들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내린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영성은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지만, 그 자양분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주어졌습니다. 때문에 성도들에게는 지혜와 더불어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 너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심을 알고 거기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말씀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이전과는 다르게 보게 만듭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지체되는 것 같고, 애굽이 매력적인 선택지 같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믿음은그 어리석음과 헛됨을 보게 하고, 하나님이 말씀으로 들려주신 청사진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지요.
간혹 믿음은 우리를 어리석게 만들기도 합니다. 눈에 비치는 현실 속의 모든 증거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 귀로 들릴 뿐인 말씀을 허탄한 것, 말도 안되는 것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줄곧 선포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온 우주의 창조자이자 통치자라고, 그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귀에 들리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고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귀로 들려오는 그 말씀을 믿음으로써 우리의 삶을 새롭게 보고, 도무지 소망이 없어보이는 현실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소망을 길어 올릴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기도제목/마침기도
기도제목/마침기도
말씀을 생각하며
사람의 지혜와 지식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지레 겁을 먹거나, 교만하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 말씀,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우리의 소망을 두어 옳은 길 가는 성도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늘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소서.
교회를 위하여
다음주 주일 오후예배는 권사회 헌신예배로 드립니다. 강사로 오시는 홍인호 목사님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함께 나누게 하시고, 우리의 헌신을 새롭게 다짐하는 시간되게 하소서.
8월 중에 선교사역비전예배가 있습니다. 황반석 선교사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함께 보게 하시고, 교회는 함께 선교를 위해 동참하는 기회가 되게 하소서.
담임목사님과 재직들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