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이요…? 제가요…?
Notes
Transcript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죄인이라는 말을
섣불리 누군가에게 꺼냈을때
반가워할 사람은 없을겁니다.
만약에
당신은 죄인입니다. 라는 말을 건넸을때
어머! 그런 극찬을 :) 오히려 좋아!
라고 반응하는 사람이 있다면
되도록 멀리하시기를 강력 추천합니다.
그런데 크리스천들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자신을 향해서
죄인이라고 고백을합니다.
주님,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세요.
아니 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러는지…
심리학에는
내적귀인과 외적귀인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내적귀인은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내탓으로 돌리는거에요.
그렇다면 외적귀인은 뭘까요?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남탓으로 돌리는 겁니다.
내적귀인과 외적귀인은
적절하게 조화를 이뤄야할 필요가 있어요.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문제가 됩니다.
외적귀인을 너무 과하게 하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서
평생 남탓만 하는 사람이 되고
내적귀인을 너무 과도하게 하면
모든 걸 다 자기 잘못이라고 탓하며
우울감과 자괴감의 늪에서 평생 허우적거리게 되죠.
그래서 저는 크리스천들이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할때마다
그냥 이 내적귀인의 끝판왕들,
내탓의 끝판왕들이 크리스천들이구나
진짜 매력없다. 라고 느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궁금했었던 것 같아요
크리스찬들을
왜 자기 자신에게 죄인이라고 말할까?
그리고 죄에 대해서 연구하고 파고 파다보니
끝도 없이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더라고요
오늘은 죄가 가진 수많은 의미 중에서
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나누는 죄에 대한 이야기가
죄에 대해서 100퍼센트를 말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크리스찬들이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고백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담고 있는지
충분히 대답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자주 고백하는
기도문에 등장하는
죄에 대해서 한 번 말씀을 나눠봅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여기에서 사용된 ‘죄’의 헬라어는
스트롱 맹 히브리어 헬라어 성경 원어 사전 ὀφείλημα
ὀφείλημα
옾헤일레마입니다.
그리고 ‘용서하다’의 헬라어는
스트롱 맹 히브리어 헬라어 성경 원어 사전 ἀφίημι
ἀφίημι 아피에미
앞히에미입니다.
옾헤일레마는 ‘빚’을 의미하고,
앞히에미는 ‘탕감’, ‘면제’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을 이렇게 바꿔볼 수 있겠죠
“우리가 채무자의 빚을 탕감해주었듯이, 우리의 빚을 탕감해주시고”
즉, 빚을 면제해줬다는 뜻입니다.
죄는 빚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빚을 진 사람입니다.
채무자입니다랑 동일한 말이 될겁니다.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한 번
더 깊게 다뤄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거의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큰 개념은
‘능력주의’입니다.
과거에는 신분제도가 거의
모든 나라를 지배하는 이념이었죠
노예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노예이고
귀족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귀족이었습니다.
평생을 집안 대대로 노예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당신이 노력한 만큼, 당신이 능력만큼
살아갈 수 있데! 라고 말한다면
노예집안에게는 굉장히 큰
기쁨의 소식일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능력주의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굉장히 공평한 말처럼 들려집니다.
우리가 노력한 만큼 우리가 가진 능력만큼
우리가 적절한 보상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런데, 능력주의에는 오히려 더 큰 함정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노력한 만큼 우리가 가진 능력만큼
우리가 적절한 보상을 받으며 살아간다.
이 말에서 허점을 한 번 찾아보세요.
맞습니다.
우리가 노력한 만큼, 능력만큼입니다.
우리가 각자 가진 능력이
공평한가요?
그리고 또 하나 질문할게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여러분이 스스로 만들어낸건가요?
아니면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건가요?
저희 집안에 형제가 4명입니다.
4명의 형제들조차도 능력이 제각각이에요
누군가는 뭘 해도 항상
빠르게 흡수하고 척척 발전하는 반면
누군가는 뭘 해도 항상
느리고 오래걸리고 천천히 발전하거나 멈춰있어요.
이래도 능력주의가 공평한걸까요?
그리고 또 하나,
이 사회는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여서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경제적으로 뒷받침이 되지 않는다면
그 재능이 개발되고 인정을 받는 것은
분명히 한계점이 존재합니다.
그와 반대로 자본이 막대하다면
재능이 아무리 부족해도
얼마든지 개발해낼 수 있죠.
쉽게 비유하자면
게임에 캐시지르는 겁니다.
현질하는거에요.
즉, 여러분에게 너무나 미안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 사회는 애초에 태어나면서부터
출발선이 공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어요
사회가 불공평하다고 시위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주의가 가진 진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무엇이냐면
능력주의가 맞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회는
사람을 능력으로 평가한다는 겁니다.
쉽게 예를 들면
여러분이 대학교를 가게 될때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대학을 갈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될겁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논란이 많았던 전형은
농어촌 전형이었어요. 지역균형 선발제도이죠.
애초에 서울과 지방은 사교육의 질도
차이가 굉장히 많이 날 뿐더러
농어촌에 있는 친구들은 교육의 기회조차
수도권과 천차만별입니다.
그런 친구들도 얼마든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주어야 하기에
일정 비율은 농어촌 전형으로 학생을 뽑습니다.
많이 뽑는 것도 아니고 아주 일부만 뽑아요.
그런데 그것조차 비난하기 시작했죠.
누구는 열심히 학원에서 밤새고
사교육비 들여서 서울대 가는데
누구는 농어촌에서 태어났다고
서울대를 쉽게 보내주냐 이건 말이 안 된다.
이 말조차도 이미
능력주의에 쩌들어 있는거죠.
농어촌에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공부를 한 학생이 있고,
수도권에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공부를 한 학생이 있다면
둘에게 공평하게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이
결코 큰 잘못은 아닐건데
능력주의에 쩌들어 있으면
이를 잘못이라고 생각하죠.
이미 능력으로만 사람을 평가하는
안타까운 사회가 되었습니다.
공평과 공정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있는 능력주의는
오히려 불공평과 이기주의에 물들어 있죠.
그리고 능력주의가 가진
가장 큰 문제는 이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정말 열심히 해서
내가 이뤄낸 성취에 대해서
감사하거나 고마워하거나
내가 사회에 갚아야 할 빚으로 생각하지 않고
내가 능력이 있고, 노력했기 때문에,
얻어낸 결과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능력이 없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능력주의는
아주 소수의 성공한 사람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개념이에요.
정리하자면,
능력주의가 가진 문제점,
첫 번째는 사람을 능력으로
평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두 번째는 감사를 잊고 살아간다.
이러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성경은 “우리는 죄인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죄는 빚이라고 말했죠.
빚은 내 힘으로 할 수 없어서
누군가에게 빌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빚을 내 힘으로 갚을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우리는 내 힘으로 갚을 수 없는 빚이
분명하게 존재해요
빚을 너무 많이 졌거나
갚을 수 없는 빚이 있다면
우리는 빚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빚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자면
우리 모두는 부모님들에게 빚을 졌습니다.
여러분이 지금은 스스로 밥도 챙겨먹고
스스로 샤워도 하고 스스로 똥도싸고
스스로 노력하고 공부도 할 줄 알지만,
여러분이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게끔
최선을 다해 헌신해주신 누군가가
계셨기 때문에 지금의 여러분이 있는것입니다.
이 빚을 안은채로 우리가 태어났고 자라왔습니다.
그리고 부모님들보 마찬가지로
부모님들의 부모님에게 빚을 졌습니다.
그리고 부모님들은 이 사회에 빚을 졌습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먹는 음식, 내가 입는 옷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지불하는 돈으로
마땅하게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수고와 헌신과 흘린 땀들을
내가 가진 2천원 3천원으로
마땅하게 취하는 것이 옳은가?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나에게 팔아주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거고요.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농사를 지으시는 분들
옷을 만드시는 분들이 없다면
우리는 의식주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죄인이다” 이 말은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빚을 진 존재이고,
우리는 이 빚을 갚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오늘 광복주일을 맞이한
우리 모두는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에게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헌신하신 분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모든 걸 누릴 수 있는거에요.
우리는 그분들에게 빚을 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빚진자에 대한 의식을 거슬러거슬러
올라가다보니까 그 끝에 하나님이 계시는거에요.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1910년, 본격적으로 일제의 지배가 시작되어
35년간 우리 민족이 굉장히 큰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 고통의 시간동안 꿋꿋하게 나라를 지켜온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빚진 자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들에게 직접
빚을 갚으며 살아갈 순 없기에
우리는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아름답게 만들어가며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이 사랑의 빚을 흘려보내주는 자로 살아가야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광복의 기쁨을 맞이했지만,
더 어두운 분단이라는 그림자가
우리의 현실을 둘러싸게 되었습니다.
남과 북이 갈라졌기에
우리는 일제의 치하에서 벗어났지만
아직 온전한 의미의 광복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나라가 통일되었을 때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천박한 자본주의와 능력주의가
북한 땅에 스며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죄인입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이
북한 땅에 스며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 말은
오늘날 사회는 능력주의가 당연히 맞다고 생각하는
능력주의 사회인데,
크리스찬들은 거기에 선뜻 동의해주지 않고
우리는 누군가에게 빚진사람으로써
의식하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이 자본주의와 능력주의라는
거짓에 속아 양적으로만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서로에게 감사함으로
인생의 두께를 두껍게, 깊게, 풍성하게
인간의 본연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게 되길 소망합니다.
북한 사람들에게
너희도 너희 능력으로
잘 벌어먹고 잘 살 수 있어!
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빚진자고,
우리 이웃들에게 빚진자이기 때문에
서로서로 감사하며 살아가야해.
그것만이 이 땅을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해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고,
우리에게 삶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