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청년부 여름 수련회 1일차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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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11–32 NKRV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서론
본문은 “탕자의 비유”라고 불리는 성경의 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비유 이야기입니다.
당시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하게 되신 배경은 이렇습니다.
PPT
예수님이 당시 세리들,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세리들은 로마에 속한 관리인데, 세금을 걷는 자들이에요.
이 자들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아주 미움을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로마의 앞잡이처럼 느껴지잖아요. 세금 걷어가니까. 자신들 돈을 빼앗아가서 로마에 세금을 바치지 않습니까?
그래서 미워하는거죠.
죄인들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주로 사회적 약자 계층이나 혹은 이방인과 교제하는 유대인들을 죄인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마도 사회적 약자 계층이었던 자들이 대부분 이방인들과 교제를 하게 될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라고 하면 장애인이나, 병자, 혹은 직업적으로 정결하지 못하게 여겨졌던 유대인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입니다.
죄인들과 세리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이들은 사회에서 도태된 흔히 말하는 아싸라는 겁니다.
주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적응 자체가 불가능한 자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계셨고요. 유대인들은 그것이 아니꼬왔던 것입니다.
그러던 가운데 유대인들 중에서도 유대인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리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소외된 계층들의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영접하는 것만으로도 유대인 사회에서는 그 사람을 죄인, 세리 취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수군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비유 이야기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비유 이야기가 바로 “탕자 이야기”입니다.
탕진하다 라는 의미의 ‘탕’자가 쓰이는데, 여기서 탕진하다라는 의미는 “씀씀이가 헤프다”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말씀하시고 싶은 것은 탕진하는 아들이 아닌, 탕진하는 아버지에게 초점이 맞춰져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렇다면 무엇을 탕진하고 있을까요? 그 아버지가 어떤 자길래 씀씀이가 헤프다고 할 정도로 탕진하는 아버지일까요?
오늘 이 비유를 통해서 복음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하길 소망합니다.
본론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두 아들 중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돌아가시지 않았는데도 요구하고, 그것을 받아 집을 나갑니다.
그런데 그 유산을 집을 나가 유흥과 즐길 거리에 모두 탕진해버립니다.
이제 그 유산을 다 잃고 빈털터리가 된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이 사죄를 구하며, 이제 자신을 아들로 대우하지 않고, 종으로 대우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극진히 대우하고, 잔치를 엽니다.
그 아들이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요.
첫째 아들은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 것으로 화를 내지만,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돌아온 것만으로 기뻐할 일이라고 얘기하는 것이죠.
이 이야기는 2막으로 이루어졌습니다.
PPT
1막은 “잃어버린 둘째 아들”
2막은 “잃어버린 첫째 아들”입니다.
둘째 아들 이야기
(1) 둘째 아들의 무례함
여러분 둘째 아들은 우리의 입장으로 봤을 때도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무례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줄 유산이 있는데 그것을 가불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이나 알바를 하다가 다음 달 월급을 가불받는 것도 사실 쉽게 말하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받게 되는 유산을 가불해달라는 아들은 도대체 뭘까요....?
옛날 어른들이었으면 천하의 후레자식이라고 욕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응은 더욱 충격적입니다.
당시 사회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부장적 사회였습니다. 부모를 향한 존경과 경의가 중요한 가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한번의 꾸지람도 없이 그 유산을 나눠줍니다.
당시 재산은 대부분 땅입니다.
이 땅을 팔아서 그 아들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 지방의 어떤 자들도 아들의 행동도 이해가 안되겠지만, 아버지의 행동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아버지라도 그 아들을 혼내고 내쫓아버리는 것이 상식적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 속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사랑을 거부당한 고통을 당했을 뿐 아니라, 명예 훼손까지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그 모든 것을 견디고, 참아냅니다.
(2) 둘째 아들의 참회와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
둘째 아들은 집을 나갑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어떻게 됩니까?
누가복음 15:13 NKRV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그는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며 그 재산을 모두 낭비해버립니다.
그리고 그의 신세는 돼지와 같아집니다.
누가복음 15:15–16 NKRV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풍년이 들고, 그 아들은 돼지를 치다가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 없어 돼지가 먹는 열매를 먹습니다.
거지꼴이 따로 없죠.
그에게 있던 아버지의 재산은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아버지의 집에서 따뜻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렸던 삶은 돼지밥을 먹는 거지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들은 염치 불구하고 결정하게 됩니다.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가기로요.
그리고 계획을 세웁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아들의 신분이 아닌 품꾼의 신분으로 돌아가기로요.
당시 이 아들이 탕진한 행위는 집안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전체의 수치였습니다.
그 지역사회의 규범을 어기면 사죄뿐만 아니라 배상까지 해야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품꾼으로 돌아가기 위한 이유는 자신으로 인해 생기게 될 배상의 책임을 조금씩 일을 해서라도 갚겠다는 아들의 최선의 예의였습니다.
아들은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품꾼으로요.
그리고 아버지에게 쥐어터질지는 않을지, 혹은 완전히 없는 자식 취급하여 다시 쫓겨날지 모르는 상황에 갈 곳 없이 집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이 보이자마자 달려갑니다. 중동의 가부장적인 어른들은 밖에서 달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기품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자신의 체면을 뒤로한체 아들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 아들을 향해 달려가기 위해 긴 옷을 입고 있던 아버지는 옷을 올리고 자신의 맨살을 드러내고 체면을 구기는 것을 신경쓰지 않은체 아들에게 달려갑니다.
그리고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들은 깜짝 놀랍니다. 예상치 못한 아버지의 행동에 당황한 것이죠.
그리고 품꾼으로 집안으로 들어갈 계획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얘기를 할 시간조차 주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외칩니다.
“빨리 가장 좋은 옷을 이 아들에게 입히라!” 라고요.
가장 좋은 옷은 아버지가 가진 옷 중 가장 좋은 옷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품꾼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가장 귀한 아들로 둘째 아들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속마음은 이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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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거다. 뼈 빠지 게 노역을 다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겠다. 네 힘으로 자격을 얻어서 이 집안에 다시 들어오는 게 아니다. 내가 그냥 너 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지위와 명예의 옷으로 네 헐벗은 톰과 가난과 누더기를 덮으련다. ’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명하고 잔치를 엽니다.
우리가 예상하듯 이 아버지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값없이 맞아주신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었든, 어떤 신분이었든,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모든 자들을 자녀로 받아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여러분을 향해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그분은 그 아들이 방탕한 생활을 하며 죄를 짓고, 아버지는 마음에도 없이 모든 것을 탕진하다 돌아왔을지라도 그 아들의 행색을 보며 마음 아파하시고, 얼른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옷인 예수님의 의로움의 옷을 덧입히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이전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든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그를 용납하시고, 받아주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도 합니다. 무슨 신이 돌아오는 모든 죄인들을 그냥 받아주냐고요. 아무런 위엄도 없다고 말합니다. 아무런 멋있는 모습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그 순간 사회적 체면과 외부의 평가를 다 내려놓고 돌아오는 모든 자녀를 그의 진심으로 맞아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2. 첫째 아들 이야기
이제 둘째 아들의 이야기가 끝나고 첫째 아들을 볼 차례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둘째 아들의 관점에서 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이야기는 ‘두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형이 집에 들어오자 종으로부터 소식을 듣게 됩니다.
동생이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왔는데도 아버지는 동생을 다시 아들로 극진히 맞이하고, 잔치까지 벌였다는 소식을요.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가기 전 했던 행동은 당시 사회에서 아버지를 모욕한 행위였습니다.
이제 형이 아버지를 모욕합니다.
형은 잔치 자리에 들어가길 거부합니다. 잔치의 주최자가 자신의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직접 가지 않는 것은 주최자에 대한 모독입니다.
형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잔치에 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요?
형은 직접 입을 열어 자신이 화난 이유를 말합니다.
누가복음 15:29–30 NKRV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동생은 재산의 1/3을 탕진하고 거지꼴로 돌아왔는데 살진 송아지를 잡았는데, 자신을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하나 잡은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형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기고,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다고요.
그런데 아버지의 재산을 가불하고, 아버지의 명예도 모욕하고 집을 나가 재산을 탕진한 동생을 위해서는 이런 잔치를 마련하는지 모르겠다고요.
형은 이렇게 공공연한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욕하게 됩니다.
잔치에 들어가지 않고, 아버지가 한 일에 대하여 무례한 행동으로 아버지를 모욕하는 겁니다.
당시 사회상을 보면 이런 자리에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말 그대로 호적을 파서 없는 아들인셈 칠 수도 있겠습니다.
자신의 권위를 무너뜨린 아들을 용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응은 당시 사회의 모습과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누가복음 15:31 (NKRV)
31 아버지가 이르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는 그 아들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얘야”라고 부릅니다. 더 부드럽게 번역하면 뭐에요?
“아들아”라고 부릅니다.
이 짧은 호칭 하나에 담겨진 아버지의 말투는 따뜻합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신을 모욕하고, 치부를 드러낸 아들을 향하여 “아들아”라고 따뜻하게 불러줍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너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나를 모욕하였어도, 너는 내 아들이란다. 같이 함께 잔치로 들어올래?”라는 잔치를 향한 초대장인 것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만 사랑했던 잘못된 사랑의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신을 모욕함에도 불구하고, 동생이 돌아온 기쁨을 함께 나누기를 바라는 여전히 첫째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였습니다.
여전히 진심으로 그 아들을 사랑하는 아들로 대하는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3.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은 누구인가?
이 이야기 속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우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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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살았던 라이프 스타일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첫째 아들에게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한 길은 도덕적 순응의 길이었습니다. 자신이 속한 곳에서 자신의 도덕적 기준에 맞춰서 순응하며 살아가고, 그 길을 열심히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에게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한 길은 자아 발견의 길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서 자신이 가진 힘으로 모든 도전을 해보는 길입니다.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찾기 위해 전통, 편견, 권위를 뛰어넘는 자유를 찾는 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찾기 위해 이 두 가지의 길 중 하나를 택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시기 위해 여러분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어떤 분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 안에서 적절한 순응을 해나가며, 할 수 있는 것 한에서 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가실 겁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불가능하게 만드는 모든 편견과 관습을 깨는 자유를 추구하며 살아가실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는 이 두 가지 방법 모두가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방식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두 방법은 방법은 다르지만, 그 마음은 본질적으로 같음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원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유산을 사회적 규칙에 따라 돌아가신 후에 받아야한다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그 규칙을 깨고, 독립을 선언합니다. 결국 그는 그의 행복을 얻기 위한 아버지의 재산을 원했습니다.
첫째 아들이 원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아들은 그 집 안에서 사회 규칙에 순응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도 아버지에게 반감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명을 어기지 않았을 뿐 결국 그도 아버지의 재산을 원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 나오는 두 아들을 통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성에 대해서 말해주고 계십니다.
그 죄는 결국 행동은 다르지만 같은 마음의 죄. 즉 자신을 하나님 자리에 두는 “이기심”이 전제된 죄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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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의 가장 큰 문제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 자기 중심적 죄성이었습니다.
형은 그가 도덕적으로 순응하였지만 결국 그 목적은 자신의 이익을 위함이었습니다.
동생은 그가 자아 실현을 위해 자유를 찾아 떠났지만 결국 그 목적은 자신의 이익을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간의 죄성이라고 얘기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두 라이프 스타일 중 어떤 형식을 따르든 우리는 자기 중심성이라는 죄성에서 결코 멀어질 수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4. 둘 다 틀렸으나 둘 다 사랑받는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아버지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십쇼.
그 아버지는 다른 방식 그러나 같은 자기중심적 죄성으로 잘못 행하였지만, 아버지는 둘 모두를 사랑의 잔치로 초대합니다.
이 얘기는 무엇을 말하나요?
결국 예수님이 전해주신 복음은 둘 다 틀렸지만, 사랑의 관계로 틀린 모두를 초청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아버지는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사랑을 누리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두 아들을 향해서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을 언제나 기다리시고, 그들이 돌아왔을 땐 언제나 두 팔 벌려 뛰어갈 준비가 되어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자유를 추구하든, 순응을 추구하든, 무종교적이든, 종교적이든 그것은 죄성으로 인해 자기 중심적 죄를 짓게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두 방향과는 다른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언제가 기다리시며,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맞아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요.
5. 두 아들의 진정한 형인 예수가 오셨다.
이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한 가지의 이미지를 더 알리십니다.
만약 두 아들 중 형이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여, 그 사랑으로 아버지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사모하는 형이었다면 동생이 돌아왔을 때 어땠을까요?
아마 아버지와 함께 그 형은 동생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고, 잔치에 참여하여 먹고 마시며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야기 속 형은 그 마음에 아버지와의 인격적인 관계가 아닌 재산을 추구하는 자기 중심성이 있는 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 속에 나타나지 않는 진정한 형이 계십니다. 아버지와의 사랑의 관계를 영원히 누리며, 모든 동생과 같은 자들 혹은 그 형과 같은 자들까지도 하나님과의 사랑을 누릴 수 있도록 진정한 형이 오셨습니다.
그 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해야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누려야 하는지 삶을 통해 알려주십니다.
심지어 그 형은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이야기 속 형, 동생과 같은 자들을 위해 죽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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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형은 바로 그 이야기의 숨은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형과 같은 자들, 동생과 같은 자들을 부르시기 위하여 삶을 통해 아버지와의 관계를 보여주시고, 그 관계를 회복시키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을 잘 보면 그 형이 잔치의 초대에 응했는지 결말이 나오지 않는 흔히 말하는 열린 결말로 끝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열린 결말은 언제 닫힐까요?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에서 닫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향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어떤 상황이든, 어떤 삶을 살아왔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자비를 베푸시기 원하고, 그 자비가 잔치가 되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그 길을 우리의 진정한 형이신 예수님께서 만들어놓으셨습니다.
그 사랑의 잔치로 나아가는 길의 걸음을 오늘 한발자국 떼서 가시기 원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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