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출발점
Notes
Transcript
2024년 8월 14일 수요2부 예배 설교 요한복음 21장
본문: 요한복음 21:15-19
제목: 새로운 출발점
찬송가:
귀한 찬양 감사드립니다.
옆에 계신 분과 인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성도님들은 실패의 경험이 있으십니까.
어느 누구나 실패의 경험이 한 번쯤은 있으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면 성도님들은 실패를 좋아하십니까?
누구나 실패를 경험하지만 실패를 좋아하시는 분은 없으실 것 같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큰 실패는 실패한 영역에만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가정 안에서 큰 실패와 어려움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의 사회 활동의 영역에도 부정적 영향을 받기도 하고,
사회 활동에서 큰 실패를 경험하게 되면
가정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외적인 부분에 있어서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가장 깊은 곳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부분까지 부정적 영향을 미칠 때가 많습니다.
좋은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에 실패하면
인생 전체가 실패하는 것일까요?
아니죠.
그런데, 때로 우리들은 좋은 대학에 입학하지 못하면,
인생 전체가 실패한 것으로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취업은 어떻습니까?
내가 생각하는 회사에 취업하는 것을 실패하면,
인생 전체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까?
아니죠. 그런데도 취업에서 실패할 때,
인생 전반에 걸쳐서 큰 데미지를 입게 되는 모습을 봅니다.
얼마전에 이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하나 보았는데요.
취업을 실패했거나, 이직 과정에서 재취업을 할 수 없었던 청년들,
또 취업을 위해서 시험 준비를 하는 청년들의 삶을 조명하는 다큐였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연이 있는데요.
공기업 시험을 준비하는 한 취준생의 사연입니다.
그 취준생은 어머니와 둘이 한 집에 살고 있는데,
시험에서 몇 번 떨어지면서 사람들과 관계를 다 끊어버린 거에요.
심지어는 함께 살고 있는 어머니와도 대면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거죠.
일년동안 문을 닫고 문자로만 어머니와 대화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울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구요.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되는데, 그 문을 도저히 열 용기가 안난다.
왜냐하면 혹시 삶을 이어갈 끈을 아들이 놓아버릴까봐 너무 두렵다.
실패는 이렇게 우리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성경은 많은 사람들의 실패를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실패 모음집 같기도 해요.
모세 대단한 사람이죠. 그런데 그는 처절하게 실패했던 사람입니다.
젊었을 때 모세는 잘 나가는 이집트 왕자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민족을 구원할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던 모세의 행동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애굽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민족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애굽 왕자의 신분에서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미디안 땅에서 숨어지내며 자신의 사명을 생각치도 못하는 루저의 삶을 살았습니다
모세는 실패로 인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렸습니다.
아니 자신은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떨기나무에서 다시 사명자로 세우실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안됩니다. 사람들이 절대 나를 따르지 않을거에요.
나는 말을 정말 못하는 사람이에요.
제발 다른 사람을 보내주십시오.
왜 그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말했을까요?
처절한 실패로 인해 사명자로 살아갈 용기를 잃은 것입니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일대 850명과의 영적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제단 위에 제물을 불사르고,
바알 선지자들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처형하고
3년 6개월 동안 내리지 않던 비를 기도함으로 비가 오게 하는
놀라운 영적 승리를 경험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이세벨이 “내일 이맘때에 반드시 네 생명을 찾아 죽이겠다”는
협박 한 마디에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도망칩니다.
멀리 멀리 도망하고,
로뎀 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 죽여달라고 간구합니다.
여호와여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성경은 수많은 사람들의 실패를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오늘 요한복음도 그렇게 예수님에게 호언장담을 하던
자신감이 넘치던 한 사람의 처절한 실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예수님이 어디에 가시든 항상 함께 했던 제자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묻자, 예수님이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큰소리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누가복음에는,
그가 말하되 주여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잡히시고 십자가를 지러 가실 예수님께,
예수님이 지금 섭섭하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제까지 제가 예수님께 보였던 모습,,, 아 그거 보면 모르십니까?
아 저 섭섭합니다.
저는요, 예수님 저는요,
예수님이 감옥에 간다고 하면 제가 따라가서 주님을 모실거구요
죽으러 간다고 하시면, 나도 따라 죽을 겁니다.
정말 다시는 저에게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저 섭섭합니다. 정말.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처절하게 실패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셔서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으시는 그 현장에서
멀리서 지켜 보았습니다.
그리고 작은 여종과 사람들이 당신은 예수의 제자가 분명하다고 할 때,
무서워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3번 완벽하게 부인하였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그 부인하는 모습을 보십니다.
누가복음 22장 61절,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하되 세번이나 철저하고 완벽하게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베드로와 눈이 마주치셨던 것 같습니다.
성경은 지금, 베드로는 철저하게 실패한 제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실패는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두 번이나 찾아와서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하셨지만,
그는 자신이 실패했다는 좌절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웠을까요?
자신이 닭이 울기 전에 세번째 예수님을 완벽하게 부인하는 그 모습을
예수님이 보셨고, 예수님이 그 모습을 보실 때, 눈이 마주쳤어요.
바로 몇 시간 전에 옥에도 따라가고 죽는데까지 따라가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자신의 말이 오히려 그에게는 더 큰 좌절감을 갖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이나 예수님이 자신과 제자들을 찾아오셨지만,
그는 그의 실패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의 놀라운 기적을 눈으로 생생히 보고
그 분의 음성을 듣고 함께 시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신의 실패로 인한 좌절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당장 사명을 되찾고 부활을 증거하는 증거자의 삶을 살아야 할 것 같은데,
그게 안됐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을 보십시오.
요 21:1 , 그 후에.
성경이 시간을 가리키는 표현은 항상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그 후에, 어떤 사건 후를 말하는 것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두 번이나 그들을 찾아오신 그 놀라운 부활 사건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던 도마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하셔서
도마가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라는 엄청난 신앙고백을 한 후에,
그들은 여전히 실패자처럼 살고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기대처럼 광장에 뛰쳐 나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한심하기 그지없는 모습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 하니,
거기에 있던 다른 여섯명의 제자들도 우르르 함께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누가복음안에 베드로에게 소명을 주시던 사건을 기억해보십시오.
놀라운 기적 앞에서 주여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고백하던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사명을 주셔서
그 사명을 가지고 살았던 베드로가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정말 이제 본격적으로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할 그 시점에,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부활하고 두 번이나 찾아갔는데,
그렇지 않아도 내 눈 앞에서 나를 세번이나 부인하고 도망친 제자인데,
그래도 두 번이나 또 찾아갔는데, 다시 물고기나 잡으러 가겠다고 하는 제자,
자기만 가면 되지 다른 제자들까지 우르르 데리고 간 제자, 또 찾아가겠습니까?
저같으면 절대로 그렇게 안할 것 같아요.
몽둥이를 들고 쫓아가거나, 아니 그냥 포기하고 버릴 것 같아요.
에라이 됐다 그랴. 그냥 그렇게 그런 꼬락서니로 살다가 죽어라.
너 아니면 사람이 없냐.
그런데 오늘 성경은
두려워 벌벌 떨고 있는 제자들을 두 번이나 찾아가셨던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님의 위로를 받고도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을
또 다시 찾아가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때, 찾아가신 그 때, 제자들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한 때, 잘 나가던 어부였으니,
몇 년 만에 다시 그물질을 해도 그 실력이 남아 있겠지 하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밤새 수고했어도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없이 사는 그들의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고 얼마나 소망없는 삶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 불쌍한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한심한 제자들을 긍휼의 눈으로 보십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의 제자가 바로 그 분이 누구인지 알아챘습니다.
주님이시네.
그 말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바로 가고싶어서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참 죄송해요. 부끄러워요.
그런데 실은 참 주님을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앞에 철저하게 실패했던 모습을 보여드렸기에
양심상 사명을 감당할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한 것입니다.
저는 참 잘 알 것 같아요.
제가 그렇거든요.
주님이 저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셨다는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진리 앞에서 감격하여
주님 이제 저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고백하죠.
그런데, 실상은 어떠합니까?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말을 하고도
예전의 부끄러운 모습을 떠나지 못하고 반복해서 실패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실망합니다. 그리고 제 스스로 절망합니다.
아이고, 나는 도저히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없는 사람이구나.
나는 안되는구나.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에 너무 부끄럽습니다.
십자가 사랑을 안다고 말하면서,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고 말하면서,
내가 드러나기를 바라고 내가 높아지기를 바라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고 야 됐다 그만 해라. 하는 생각이 너무나 많이 듭니다.
하지만, 그런 실패와 좌절 가운데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 우리의 지혜, 우리의 능력으로는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단 한발자국도 땔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실패하고, 좌절하고, 낙심하여 쓰러지는 우리들에게
무엇이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아침마다, 그래 결심했어.
오늘은 주님의 뜻대로 살거야!!!
아자 아자 아자!!! 아침마다 세번 외치고 살면, 새롭게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까?
우리의 새로운 출발점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들이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매일 매일 경험하지 않습니까?
아니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그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우리는 새로운 출발점을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누가 새로운 출발점을 만드십니까?
매일 쓰러지고, 처절하게 실패하여 스스로 실망하여 무너진 우리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징징대는 우리들을
너무 너무 사랑하셔서 먼저 찾아와 주시고, 먼저 말을 걸어주시고,
먼저 다시 놀라운 일을 우리의 삶에 보여주시고,
먼저 우리를 회복시키기를 원하시는 우리의 구주 예수님만이
우리의 새로운 출발점을 만드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주님의 열심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실패는 삶의 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실패했다고 우리 인생이 끝장나지 않는다구요.
따라서 성도의 삶의 실패는 결단코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실패의 자리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의 열심으로 우리들이 회복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실패의 자리는 절망의 자리가 아니라
은혜를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강력하게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단 한 마리의 물고기를 잡지 못했던 제자들이 철저하게 실패를 경험했던 그곳에서
우리 예수님은 놀라운 능력으로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게 하십니다.
실패의 자리가 기적의 자리가 된 것입니다.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실패는 우리 주님의 사랑의 실패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은, 우리 주님의 능력은
오히려 그 때 더 강력하게 역사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팀 켈러 목사님도 투병기간 가운데 이러한 고백을 하셨습니다.
“내가 잘 나갈때보다 절망의 시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열배는 더 강력하게 경험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캐나다에서 박사공부를 5년이나 하고도 성과 없이
박사 공부를 마무리 해야 하는 시점에서 가장 큰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가장 큰 좌절감을 경험했습니다.
나는 안되는구나.
나는 아무것도 못하겠구나.
삶을 살아갈 자신감 마저 잃을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삶의 자신감을 잃었는지,
뭘 했는지 아십니까?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큐브, 돌려서 색을 맞추는 거 아시죠.
내가 저거라도 하나 성공해야 하겠다.
그래서 유튜브를 보면서 그거를 막 맞추었어요.
그런데 성도님들, 하나님은 팀켈러 목사님의 간증과 같이,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 같이
저에게도 동일한 간증을 할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인생의 가장 큰 은혜를 언제 경험하셨습니까.
묻는다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의 인생 가운데 가장 큰 실패가 있었던 그 시간들이
저에게는 가장 큰 은혜의 시간들이었습니다.
말씀을 읽으면 읽는대로 주님의 은혜로 채워졌습니다.
예배를 드리면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눈물로 주님께 예배를 드리게 만드셨습니다.
박사공부를 마무리 하는 일년 동안 하나님이 엄청난 은혜를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저 뿐 아니라, 저희 가족에게 동일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돌이켜보니, 그 실패로 인해, 다시 목회의 자리로 오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목사가 되겠다고 하나님께 고백했을 때부터
교회를 섬기는 목사가 되겠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저의 신학공부의 길을 중단하게 하시고 은혜를 부어주시고
다시 회복시켜주셔서 교회를 섬기는 목사의 자리로 다시 오셔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실패의 자리는 주님의 사랑의 실패의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실패의 자리는 주님의 사랑이 온전해지는 자리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깊이 깊이 경험하게 되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있어서 실패와 어려움은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입니다.
성도의 실패는 삶의 끝, 절망의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의 새로운 출발점은 바로 그 실패의 자리,
아니 은혜를 깊이 경험하게 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롭게 열리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출발점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확인하시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의 스펙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혜가 아닙니다. 우리의 인맥이 아닙니다.
오늘 베드로에게 주님은 새로운 출발점에서 무엇을 물으십니까?
요 21:15 절 말씀 보십시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서 이 질문을 하십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실패했던 자리에서 물으십니다.
지금 예수님과 베드로는 예수님이 피우신 숯불 곁에서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1:9 절에 나온 숯불이라는 단어는 요한복음 18:18 절에
예수님이 심문을 받는 자리에 사람들이 피운 숯불이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 단어는 요한복음 21장과 18장에서 단 두번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의도적으로 성경은 베드로의 실패의 자리와 회복의 자리를 연결하고 있는 것이죠.
사람들은 어떤 노래를 들으면 특정한 어느 시점을 기억하고,
어떤 향기를 맡으면 어때요, 특정한 사람을 기억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아마도 숯향이 진하게 나는 그곳에서,
또 추위 가운데 온기를 주는 숯불 앞에서,
그의 실패를 또렷이 기억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그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회복됩니다.
그 때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누구 누구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박사 공부를 중단하고 한국에 와서 제가 가장 존경하는 목사님을 찾아 갔습니다.
제가 유학하는 7년의 기간동안 꾸준히 저를 믿고 후원해주시던 목사님이었습니다.
그것도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렇게 저를 믿고 후원해주셨는데, 결국 결과를 내지 못하고 돌아와서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왜 그랬느냐? 무엇이 부족했느냐?
현실적으로 이제 어떻게 하는게 좋을찌 저에게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저에게 목사님이 물으신 것은 하나였습니다.
정목사님, 우리 주님이 지금 목사님에게 물으실 것은 하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정목사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오랜 시간을 허락해주었는데, 그것밖에 못했느냐?
너의 한계가 그것이냐? 왜 그렇게 밖에 못했느냐? 가 아니라,
우리 주님은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을 통해 단 한가지를 저에게 확인하셨습니다.
석훈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이 우리에게 이시간 물으십니다.
다시 주님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기도하시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