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64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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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의가 될 수 없는 선행

제62 그러나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가 온전한의 혹은의 의한 부분이라도 될 수 없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소 앞에서 용인 될 수 있는 의는 절대적으로 완전 해야 하고 모든 면에서 신적 법에 합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생에서는 우리가 하는 최선의 행위도 모두 불완전 하고 죄로 더럽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제63 아니, 그렇다면 우리의 선행은 공로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선행에 대해 이생과 내 생에서 보상 하지않으십니까?

이 보상은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제64 그렇다면 이 교리는 사람들을 소홀하고 불경스럽게 만들지 않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된 사람들이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은 불가능 하기 때문입니다.

해설

우리의 의가 될 수 없는 선행

1.우리의 선행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가 될 수 있는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내세를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궁금해 합니다.
유명 포탈의 서치엔진 데이타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초당 200회 이상 동일한 질문이 검색 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Is God real?” 하나님은 진짜 있나요?
인류는 이 질문에 대해 수 많은 해석과 해결책을 논의해왔습니다.
최근 끝난 프랑스 파리 올림픽이 현재 유럽과 서구 사회가 어떤 상태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고 보는데요. 그것은 탈 기독교 입니다.
지금 현재 서구권과 일부 아시아 선진국을 지배하는 사상이 바로
D.E.I(Diversity, Equality, Inclusion)
이슬람교, 힌두교, 동양종교 등등
다른 모든 것들은 다 받아들이는 “다양성”
모든 종교와 가치가 동등하게 대우 받아야 한다는 “평등”
모든 것을 “포용 해야 한다는 사상 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기독교에 대한 배제가 담겨 있습니다.
최근에 벌어지는 영국의 폭동사태, 미국남쪽 국경의 불법이민자와 마약문제, 유럽전체를 뒤흔드는 난민 문제 등등은 기준 없이 포용하는 급진적인 사상의 결과이고 앞으로도 큰 분열과 무질서를 가져 올 것입니다.
오래전 부터 이런 급진적인 생각들은 인간의 구원의 문제도 다뤘는데,
산의 정상은 하나이지만 오르는 길은 여러 가지라는 논리를 펼치며 기독교에만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 입니다. 종교다원주의
신적 존재는 하나이고 어떤 종교든 잘 믿고 선하게 살면 구원이라는 정상에 오르게 된다는 주장 입니다.
오직 예수만이 구원에 이르는 이름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이런 주장이 문제 인가?
산의 정상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 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정상과 우리가 아는 구원 이라는 정상은 다릅니다.
예를들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8,848미터
산 정상에 가면 갈 수록 산소가 부족하고 극심한 추위와 강한 바람으로 오르기 힘든 산으로 유명합니다. 최정상 산악인도 정상 근처에 이르면 5미터를 가는데 30분이 걸린다고 합니다.
이 산은 1953년에야 처음으로 정복이 되었고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는 고 고상돈 씨가 1977년에야 세계에서 네번째로 등반 성공했습니다.
만약에 누군가에게 구원이 에베레스 라고 생각한다 하여도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산의 정상이 8,848 미터 보다 더 높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두배로 높다면 아니 세배, 네배로 높다면 어떨까요?
아니, 지구가 아닌 저 먼 화성이나 다른 행성에 그 구원의 산 정상이 존재한다면 인류 중에 구원의 산을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선의 경지가 에베레스트 라면
하나님의 의는 그와는 비교가 안되는 높이와 난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고 비난을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성경의 진리를 부인하고 기독교의 경전정도로만 인정하려는 인간의 교만에서 온 주장에 불과 합니다.
하나님은 기독교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우주의 창조주 이심을 믿으면 모든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 됩니다.
인간사의 수많은 영웅들을 잘 들여다 보면,
갖가지 선한 뜻과 대의명분을 들어 상대를 해하고 나라를 침략하고 제국을 건설 하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은 히틀러, 알렉산더 대제나 징키스칸과 같은 한 개인의 정복욕에 그 기반을 두고 미사어구로 포장되어 있을 뿐 입니다. 그들의 결정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삶의 터전을 잃고 한 세기가 전쟁의 화마 속에 불타버렸습니까?
인간 중에 그 누구도 선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진리 입니다.

2.공로가 아닌 은혜로 보상

할아버지가 병원을 운영 하시고 집안 대대로 의사 집안이라서 손주를 의대 보내게 이 할아버지의 목표 입니다. 이 손주가 어느 정도는 성적이 나오는데, 의대 갈 정도로 더 이상 오를 기미가 안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1억짜리 과외도 시켜보고 유명하다는 선생님은 다 모셔다가 공부를 시켜 보아도 더 이상은 안오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일타 강사라는 사람을 불러다가 점검을 가르쳐 보니,
이 손주가 의대가야 한다는 압박감에 문제를 필사적으로 외우기는 하는데 그 원리에 대해 생각해보고 푸는 방법을 연구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잘 외우고 성적이 어느 정도 나오니, 당장 부모와 할아버지에게 칭찬은 받지만 진짜 공부는 아니었고 공부를 즐기지를 못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은혜를 깨달아 하는 신앙생활과 공덕 쌓고 치성 드리는 차원의 신앙이 있습니다.
공통점은 이 두가지 모두 감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치성 드리는 신앙은 조건부 감사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은혜를 깨달은 신앙은 나의 모든 것이 나의 공로가 아님을 알고 원래 내가 받을 것이 아닌 것을 값없이 주셨다는 것에 대해 감사함으로 살아간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어떤 공덕을 쌓아서 치성을 드려서 열심히 신앙생활의 탑을 쌓아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순서가 바뀐 것입니다.
선하게 살아서 신앙생활 잘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았기에 감사하여 선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라는 책도 있습니다.
왜 쉬울까요? 좋아하기 때문 입니다.
수학이든 영어든 원리를 알고 그 원리를 응용하고 전반적인 이해가 있고 공부하는 기쁨이 있는 아이들은 자꾸 문제를 풀어보고 싶고 풀이법을 찾게 되어있습니다. 결국 성적도 나오기 마련 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를 기뻐하고 즐거하는 삶을 신앙생활이라고 하지 억지로 억지로 돌탑 쌓듯 치성 드리듯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라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신앙생활 잘하면 보상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5:12 NKRV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디모데후서 4:7–8 NKRV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히브리서 11:6 NKRV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보상의 전제에는 항상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보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지 나의 공로로 받는 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여 주시는 보상 입니다.
하나님의 보상은 그래서 때론 잘 한 것이 없는 죄인에게도 주어집니다.
탕자였던 아들이 그 좋은 예이고
우리 모두가 다 그런 은혜를 받은 사람들 입니다.
어떤 이들은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부자되게 해주시면 얼마나 좋나
자식이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잡으면 얼마나 좋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 교환 할 때,
내가 원했던 예쁜 텀블러를 받지 못했다고 상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 입니다.
축복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받지 못한 다른 사람의 축복을 부러워 하면
탕자를 질투한 형이 되고
아버지 품에서 이미 받은 다른 축복을 발견 하지 못합니다.

3.이 교리는 사람들을 소올하고 불경스럽게 만드는가?

그렇다면 선하게 살 필요가 없는가?
그럴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고 우리도 선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부모가 자녀가 악하게 살길 바라겠습니까?
단테의 <신곡>은 영화 소설 연극 등등 수 많은 곳에서 다뤄졌고 두고 두고 읽어야 하는 명작으로 회자 됩니다.
신곡의 내용은 천국편 연옥편 지옥편으로 나눠져 있는데
지옥편에 보면 지옥의 모습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의 지옥은 9층으로 된 역피라미드 형태로써 각각의 죄의 무거움과 종류에 따라 나눠져 있습니다. 맨 밑의 구단에는 배신의 지옥으로 배교자들, 사탄, 매국노 같은 배신자 배은망덕한 자들이 모여 있고 불구덩이와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1층 지옥- “변옥” 경계(Limbo) 를 뜻하는 림보 였습니다.
여기에는 선하고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지옥이라고 하기에는 형벌이 없고 푸른 들판이 펼쳐져 있는 곳입니다.
평소 사람들이 만나보고 싶을만한 선인들, 철학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모두 하나 같이 하늘을 보고 한숨을 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는 동안에는 내세에 천국에 갈 소망이라도 남아있었지만 이제 변옥에 온 이상 천국으로 갈 소망은 끝이 났기 때문 입니다.
모든 면에서 지옥 같지 않지만 이 또한 지옥인 이유는 천국소망이 없기 때문 입니다.
우리가 지옥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 하는 것도 일정 부분 유익이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 할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최선은 천국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선을 쌓고 공덕을 쌓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감사하여 선하게 살고자 마음 먹고
하나님께 완전한 선을 이루지 못하는 약한 자신을 고백하고 의탁하며 사는 삶은
죄를 짓지 않고 살려고 애쓰는 삶에서 보다 기쁨과 감사의 삶이 됩니다.
림보의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은 어쩌면 천국을 소망하고 살았다기 보다 죄를 짓지 않고 선한 일을 하기를 소망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는 삶은 하나님을 아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이 예수 이름 믿어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단테의 상상이지만 산의 정상을 세상의 기준과 나만의 기준으로 파악하면 림보를 목표로 하는 삶이 됩니다.
천국을 소망한다면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선하게 의롭게 하나님의 뜻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공덕이 아닌 은혜로서 구원 받는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선으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받은 바 은혜가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 되었으니
하나님의 자녀 답게 선하게 의롭게 살게 인도 받고
또 성령을 통해 그런 마음을 수시로 부어 주십니다.
그러니 성도가 선을 행함에 소홀할 수 없고
불경한 일을 하면서도 죄책을 안느낄 수도 없습니다.

결론

이신칭의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믿기만 하면 무슨 짓을 하여도 구원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반대로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흉악한 죄인 이었으나 구원 받았다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선하게 살아간다하여도 우리의 구원까지는 이를 수 없습니다.
단지, 구원 받았으니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사고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하나
성령의 인도하심 의지하여 선하게 의롭게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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