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거룩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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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누가복음 4:31-37
“하나님의 거룩한 자”
2024. 7. 24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배척을 받으셨죠. 자기 고향에서 배척을 받아 죽을 뻔하셨어요.
오늘 본문은 그 뒤에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같으면, 방금 내가 고향에서 죽을 뻔 했다고 한다면, 무엇을 할까요? 요즘 같으면 너무 충격을 받아서, 정신과 치료도 좀 받고, 휴양도 하면서, 뭔가 나의 회복을 위해서 행동을 하겠죠. 사역을 하더라도, 먼저 내가 좀 회복이 돼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상처 받은 마음도 좀 다스리고, 털어내야 다시 힘을 내서 사역을 하죠.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런 거 없어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사역을 이어가십니다. 나사렛에서 안 되니까 그대로 가버나움으로 가셔요. 나사렛이 안 돼? 그럼 가버나움으로 가지 뭐. 아주 쿨하게 장소를 옮기셔요.
나사렛에서 가버나움까지는 거리가 약 40km 정도 됩니다. 나사렛에서 북동쪽으로 40km를 걸어가면 나와요. 이 정도면 하루에서 이틀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죠.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나사렛에서 사건이 있고 나서, 정확히 일주일의 시간공백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31절을 봐 볼까요? 31절에 이렇게 기록돼 있어요.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안식일에 가르치셨어요. 나사렛에 계실 때도 안식일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지난주 안식일에 나사렛을 떠나서, 이번주 안식일에 새롭게 사역을 하시는 겁니다. 일주일의 공백이 있죠. 안식일과 안식일 사이에 일주일 동안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루이틀이면 오실 수 있는 거리를 일주일이나 걸려서 오셨을 리는 없고, 아마도 일찍 오셔서 이곳에서 며칠간 지내시면서 기도로서 새로운 사역을 준비하셨던 것 같습니다. 나사렛에서의 실패를 전혀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역을 준비하신 거죠.
특별히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갈릴리 사역을 하시는 동안에 사역의 거점으로, 이 가버나움을 선택하셨어요. 일종의 베이스캠프가 되는 거죠. 가버나움은 지리적으로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마을이라서 배를 타고 이동하기에 용이하다는 이점이 있었고, 또 가버나움에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 다섯 명이 살고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마태. 이렇게 다섯 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가버나움이 굉장히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바로 그곳으로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옮기신 사건을 오늘 본문에는 그냥 간단하게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라고 기록을 했는데요. 마태복음은 이것을 보다 심도 있게 조명합니다.
마태복음 4장 13절부터 16절까지 한번 봐 볼까요? 마태복음 4장 13절부터 16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나사렛을 떠나 스불로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아멘.
우리가 누가복음만 봤을 때는,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셔서 그냥 가버나움으로 옮겨 가신 것으로 끝나는데, 마태복음은 여기에 예언의 성취라고 하는 의미를 부여합니다. 예수님이 그냥 단순히 사역지를 옮기신 게 아니라, 이것은 구약에 예언된 일이었다는 거예요. 특별히 선지자 이사야가 선포한 그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하여서, 가버나움으로 옮기셨다는 겁니다.
이처럼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행적 하나하나에 예언의 성취라는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반면에, 누가복음은 직접적으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증언하죠. 천사 가브리엘을 비롯해서,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에 보면요, 또 누가 예수님을 증언합니까? 귀신이 예수님을 증언해요. 예수님과 귀신이 대면했을 때, 귀신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증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우리가 이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기 전에 먼저 오늘 본문 32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32절 시작,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아멘.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놀랐어요. 여기서 놀랐다는 말이 헬라어로 “엑플레쏘” 라는 말인데, 이 말은 “깜짝 놀라다, 경악하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긍정적인 어감을 가진 말이에요. 성경에서 이 말이 총 13번 쓰였는데, 전부 긍정적인 반응으로써 놀랐을 때, 사용됐습니다.
그래서 지금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도 긍정적으로 놀란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깜짝 놀랄 정도로 너무 좋았던 거죠. 확실히 나사렛하고는 반응이 달라요. 나사렛에서는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놀랐거든요. “지가 뭔데 저런 말을 하냐” 매우 부정적으로 반응을 했어요. 하지만 가버나움에 오니까, 선지자가 고향 외에는 환영을 받는다는 말처럼, 벌써부터 반응이 다르죠. 매우 긍정적으로 반응을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때 사람들만 반응을 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뿐 아니라, 귀신도
반응을 해요. 오늘 본문 33절 34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아멘.
여러분, 참 희한하게도, 회당에 귀신이 있습니다. 회당에. 회당은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이 되는 곳이었어요.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회당에서 교제를 나누고, 회당에서 자녀를 양육했어요. 그만큼 회당은 유대인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그곳에 귀신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귀신이랑 같이 예배를 드리고, 귀신이랑 같이 교제를 나누고, 귀신이랑 같이 자녀를 양육하는 거예요. 백성들의 삶의 중심에 귀신이 들어와 있는 겁니다.
이는 이 시대가 얼마만큼 타락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는데도, 귀신이 아무 거리낌 없이 들어와 있어요. 그만큼 예배가 타락했고, 종교가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겁니다. 귀신이 회당을 그냥 자기 집처럼 들어와 있는 거예요. 여러분, 지금 이 안에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은 떠나갈 지어다!
여기는 없어요. 여기는 없는데, 예수님 당시에 회당 안에 귀신이 있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귀신이 들어와 있는 것을 아무도 몰라요. 회당장도 모르고, 서기관도 모르고, 바리새인들도 몰라요. 마치 바이러스처럼, 회당 안에, 사람 안에 들어가서 잠복을 하고 있어요.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백신이 들어오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오니까 발작을 하는 겁니다.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뭐라고 소리를 지릅니까?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귀신이 이 말을 하는 의도가 뭐겠어요? 왜 왔냐는 거죠. 우리가 아무 상관이 없는데, 여기를 왜 왔습니까? 이런 말이에요. 여기는 내 영역인데, 전문용어로, 내 나와바린데, 당신이 여기에 왜 왔냐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지금 이 말이요. 귀신이 할 말은 아니죠. 오히려 예수님이 하셔야 할 말입니다. 회당은 예배를 드리는 곳이에요. 그러면 그곳에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마치 자기 영역을 예수님이 침범하신 것처럼 말을 하고 있어요.
주객이 전도됐죠. 귀신 지가 와서는 안 될 곳에 와 있으면서, 회당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불청객 취급하고 있어요. 마치 도둑이 남의 집에 들어와서 주인행세를 하면서, 주인을 못 들어오게 막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도둑이 주인행세를 해도, 주인이 경찰을 데리고 오면,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공권력 앞에서 도둑이 뭘 할 수 있겠어요. 쇠고랑 차고 가야죠.
지금 예수님이 오셨는데, 예수님이 그냥 오신 게 아니에요. 공권력. 아까 32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예수님이 권위를 등에 업고 오셨어요. 이 권위는 성령의 권윕니다. 누가복음 4장 14절에 보면,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오셨죠. 성령의 능력, 성령의 권위가 함께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선포하시는 말씀 앞에서, 귀신이 쫓겨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이 함께할 때, 말씀에 능력이 일어나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귀신은 쫓겨나는 거예요. 34절을 다시 보면, 귀신이 쫓겨날 때 또 무슨 말을 하죠. 뭐라고 합니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사렛 예수 당신이 우리를 멸하려고 여기 온 것 아니냐고 물어보고 있어요.
여러분, 예수님이 회당에 왜 오셨습니까? 아니, 근본적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에 그 답이 있어요. 누가복음 4장 18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사야서를 통하여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 19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윱니다. 바로 이러한 사역들을 하시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그 중에서 특별히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사역이 있는데, 바로 여기에 가장 핵심적인 예수님의 사명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어요. 죄와 사망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풀어주시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오늘 본문에 회당에 오신 이유도 바로 그러한 일환으로 오신 거예요. 회당에 귀신으로 인하여 자유를 상실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기 위하여서, 특별히 회당에 오셨어요. 이것을 귀신은 “자신들을 멸하러” 오신 것으로 판단을 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게 틀린 게 아니에요. 정확한 판단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자유를 주시는 것과 귀신을 멸하는 것은 일맥상통합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사역이에요. 그래서 요한일서 3장 8절에 보면,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한일서 3장 8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아멘.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이유가 뭡니까?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마귀의 속박 가운데 눌려 있던 사람들이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죠. 자유만 주시는 것도 아니고, 마귀만 멸하는 것도 아니고, 이 두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 하나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마귀가 놀랍게도 그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어요. 또 그러면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도 정확히 압니다. 34절 후반절에,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이 예수님이 누구인 줄 알고 있어요. 이때 안다고 하는 말이, 헬라어로 “오이다” 라는 말인데요. 이 말은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 그냥 소문만 듣고 아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 사람과 밥을 먹고 교제를 나누고, 함께 생활함으로써 그 사람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게 되었을 때, 그럴 때 “오이다” 라는 말을 쓰는 겁니다.
마태복음 6장 8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아멘.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때 아신다는 말이 바로 “오이다”예요. 우리의 모든 것을, 내가 굳이 말을 안 해도 다 아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을 지금 귀신이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당신이 누구인지, 목적이 무엇인지, 어떤 의도로 여기에 왔는지, 자기가 다 안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은요.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알고 싶을 때는, 뭣 때문에 알고 싶어할까요? 그 사람에게 호감이 있어서, 그 사람과 친해지고 싶어서 알려고 하겠죠. 저 사람은 뭘 좋아할까? 취미는 뭘까? 뭘 잘 먹을까? 사소한 것까지도 알고 싶어요.
그런데 귀신은 그게 아니죠. 귀신은 예수님을 넘어트리기 위해서, 적군을 무너트리기 위해서 적군에 대한 정보를 파헤치듯이, 예수님에 대해서 파헤치고 연구한 겁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패, 우리가 예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아내자.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이길 수 있다.’ 이런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을 연구하고, 알게 된 겁니다.
여러분, 이처럼 귀신은 예수님을 이기기 위해서 끊임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 그 이상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또 알아내기 위해서 연구하고 있어요. 반면에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까? 안다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혹시 그냥 소문으로 들은 정도로만 알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 37절에 가서 보면, 예수님의 소문이 근처 사방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모르던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됐어요. 혹시 우리도 딱 그 소문을 들은 정도로만 예수님을 알고 있지는 않은지, 나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귀신보다 예수님을 몰라서야 되겠어요? 우리는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그래서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한편, 귀신은 예수님을 알았고, 그 분의 정체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칭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귀신을 “더러운 귀신”이라 했어요. 반면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 더러운 귀신과 거룩한 자. 완전히 반대되는 두 진영으로 나눠지죠.
이미 귀신 자신부터가 예수님과 자신을 이처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귀신도 아는 거예요. 예수님과 우리는 어떤 식으로도 공통분모가 없다는 것을. 절대로 친해질 수도 없고, 융합될 수도 없고, 앞으로도 계속 원수로 지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겨보겠다고 예수님을 연구하는 거예요. 약점이 뭘까?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이길까? 알아내려고 하는 거죠.
그러나 여러분,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귀신은 예수님의 그 권위 앞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용을 써봐야 안 돼요. 그리고 그것을, 사실은 귀신 자신도 알고 있습니다. 귀신이 하는 말 속에서 우리가 알 수가 있어요.
34절을 다시 봐 볼까요? 34절을 우리가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여기서 저 노란 글씨,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이 말에 이미 자기들이 패배하리라고 하는 생각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만약에 그게 아니었다고 한다면, 귀신이 뭐라고 말을 했어야겠어요?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이게 아니라 “우리랑 싸우러 왔나이까” 이렇게 말을 했어야 맞겠죠. “우리랑 싸우러 왔나이까? 그래, 한번 붙어봅시다” 이렇게 자신있게 외쳤어야 맞아요.
그런데 귀신이 그렇게 외치지 않고,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애초에 예수님하고 싸울 의지가 없어요. 예수님이 온 것만으로도 자기가 패배하리라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자기들이 멸하게 되리라고 체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생각대로, 예수님이 너무나도 쉽게 귀신을 제압하십니다. 오늘 본문 35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아멘.
예수님은 귀신과 맞서싸우시지 않았어요. 그냥 꾸짖기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꾸짖는 말씀만으로도 귀신이 벌벌 떨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뒤에 하시는 두 가지 명령을 그대로 순종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잠잠하라”고 명령하셨어요. 잠잠하라. 이 말은 헬라어로 “피모오” 라는 말이에요. 피모오. 이 말은 “재갈을 물리다, 입막음시키다” 이런 말입니다. 마치 짐승 입에 재갈을 물리듯이,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때부터 귀신이 아무 말을 못하죠.
이어서 두번째로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즉시, 사람에게서 귀신이 나왔어요. 그 동안에 사람 안에 들어가서 안식일이든 무슨 날이든, 마음껏 회당 안에 들어갔다 나왔다, 활개를 치던 귀신이 예수님의 꾸짖는 말씀 앞에서, 복종합니다.
그런데 귀신이 복종을 하기는 하는데, 마지막으로 한번 반항을 해요.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오면서,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시도마저도 실패하죠.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예수님을 공격할 수 없으니까, 사람이라도 상하게 하려고 사람을 넘어뜨렸습니다. 만약에 이때 사람이 다쳤다면, 예수님의 입장이 조금 난처할 수 있어요. 괜히 귀신을 쫓는다면서 사람을 다치게 했다는 부정적인 여론이 퍼지게 됐을 수가 있거든요.
하지만 그 사람이 다치지 않았죠. “상하지 아니한지라” 마지막까지 귀신이 얕은 수를 썼지만, 그마저도 실패합니다. 귀신의 모든 시도는 아무런 효력이 없어요.
반면에 예수님의 말씀은 엄청난 효력이 있죠. 말씀 한 마디면, 귀신이 물러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놀라는 거예요. 오늘 본문 36절에 보니까,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예수님 앞에서 귀신이 떠나는 것을 보고,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여기서 놀라다는 말이 헬라어로 “탐보스” 라는 말인데요. 이 말이 성경에 딱 세 번 나와요. 오늘 본문에서 한 번 나오고, 두 번째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힌 것을 보고 놀랐을 때 사용됐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베드로의 말씀에 힘입어 일어나 걷게 된 것을 보고 놀랐을 때 사용됐어요.
이처럼 “탐보스”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목격하고 놀랐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지금 회당에 있는 사람들이 그래요. 말씀 한 마디에 귀신이 떠나는 기적을 보니까 놀란 거예요. 지금까지는 누구도 말씀 한 마디로 귀신을 내쫓은 적이 없거든요. 아니, 아예 귀신이 자기들 가운데 있는 줄도 몰랐어요.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회당에서 우리랑 같이 예배 드리던 사람이 귀신 들린 사람이었다니?’ 깜짝 놀랐겠죠.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이 간파하시고, 말씀 한 마디로 해결을 하시니까 입이 안 다물어져요. 세상에 이런 일이!
그러면서 서로 말하는 거예요.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와서 가르치셨을 때, 그 말씀의 권위에 한번 놀랐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그 말씀으로 기적이 일어나니까 또 한번 놀라는 겁니다. 이 말씀이 단순히 잘 가르치고, 듣기 좋은 차원이 아니라, 능력이 있다는 것이죠.
이때 능력이 헬라어로 “두나미스” 라는 말이에요. 이 말은 “강력한 힘”을 의미합니다. 이 두나미스에서 나중에 “다이너마이트”라는 말이 나왔어요. 폭발적인, 아주 강력한 힘이죠. 이런 엄청난 힘이 예수님의 말씀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 한 마디 던지면, 마치 다이너마이트를 던진 것처럼, 폭발력이 있어요.
그것을 사람들이 눈앞에서 목격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언제 이런 걸 봤겠어요?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이게 혼자 보기 아깝거든요. 그래서 사방으로 소문을 퍼트립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말씀을 가르치는데, 말씀도 좋고, 그 말씀에 권위와 능력이 있어서, 귀신도 떠난다더라!’
이런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나가요. 오늘 본문 37절에 보면,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여기서 소문이 헬라어로 “에코스”라는 말입니다. 영어 에코가 여기에서 나온 말이에요. 소리가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메아리치듯이 반복되면서 퍼져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 소문이 어찌나 빨리 퍼졌는지, 밑에 40절에 가서 보면, 이날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이며 귀신들린 자들을 데리고 와요. 고쳐 달라고. 그래서 예수님을 그들을 다 고쳐주십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대로,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를 자유롭게 하는 사역을 마음껏 펼치십니다. 어디서요? 가버나움에서.
본래는 이것을 나사렛에서 하셨어야했지만, 배척을 받으셨기 때문에 가버나움에서 하셨어요. 나사렛의 입장에서는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죠. 예수님을 받아들였더라면, 병자들도 치유받고, 귀신도 쫓아내고, 그러면서 땅값도 오르고 말이죠.
예수님을 배척하는 곳에서는 비록 말씀이 선포되더라도, 그 능력이 발휘되지 않습니다. 그냥 말씀만 선포되고 끝이에요. 반면에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곳에서는 마침내 능력이 일어납니다. 권위와 능력으로써 말씀이 귀신을 쫓고, 병을 치유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서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어쩌면 이 안에도 귀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이 열 마리가 오든, 백 마리가 오든, 말씀의 능력 앞에서는,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떠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알고, 예수는 우리를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단계를 넘어서,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신 것처럼, 우리들도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여서 더 깊이 주님을 발견하고, 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아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으로 살아냄으로써, 감히 귀신이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