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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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누가복음 4:1-13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2024. 5. 8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광야로 가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내용을 담고 있는 단락입니다.
사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본문이죠. 듣기도 많이 듣고, 읽기도 많이 읽어서 크게 새로울 것도 없는 그런 본문이에요. 그렇지만 익숙한 데서 주어지는 새로운 은혜가 있을 줄로 믿고,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이 본문에 관하여 두 가지 관점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는 마귀의 관점입니다. 왜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했을까? 마귀의 목적은 무엇일까? 이러한 마귀의 관점으로 접근할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왜 하나님은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시게 하셨을까?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일까?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이 두 가지 관점으로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겠는데요. 먼저 오늘 본문 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절 시작,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아멘.
오늘 본문이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요단 강에서 돌아왔다는 말이 이어져요. 이 말은 예수님이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강림하셨죠. 그때 예수님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셨어요. 그리고 곧바로 요단 강을 떠나서 광야로 오신 겁니다.
광야. 여러분은 광야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황량하고 삭막한 황무지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이제 막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는데, 갑자기 예수님이 아무 것도 없는 광야로 오셨어요. 지금 성령이 충만하니까 사역을 했다 하면 엄청난 역사들이 일어날 텐데, 사역을 하지 않고 광야로 오셨단 말이죠.
여러분, 왜 예수님이 광야로 오셨을까요? 그 이유는 광야에서 자신을 연단하고 사역을 준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령 충만하다고 해서 아무 준비 없이 사역을 할 수 없어요. 충분한 훈련과 준비가 필요합니다. 선교사가 선교지에 가기 전에 그 나라의 언어를 공부하고 문화를 공부하듯이, 설교자가 강단에 올라가기 전에 설교문을 준비하듯이. 그 어떤 사역이든지 반드시 준비가 필요해요.
예수님 역시도 마찬가집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금식하시면서, 기도하시면서 준비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광야로 오신 거예요.
특별히 예수님이 40일 동안 금식을 하셨죠. 성경에서 40은 시작된 무언가가 끝마치는 것을 상징합니다. 뭔가가 시작됐으면 40일 뒤에는 반드시 끝나는 거예요.
창세기 7장에 보면, 이 땅에 홍수가 일어날 때 비가 40일 동안 내렸습니다. 40일이 되니까 비가 딱 그쳤어요. 그리고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에서 40일 동안 금식을 했어요. 40일이 지나자 하나님께서 돌판에 계명을 새겨주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드는 바람에 그 돌판을 깨버리고 다시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다시 또 40일을 금식합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돌판에 계명을 받아서 내려와요. 또 뿐만 아니라, 엘리야 선지자가 이세벨 때문에 호렙산까지 도망가는데 며칠이 걸립니까? 40일이 걸렸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방황한 기간이 얼마예요? 40년입니다.
이처럼 40은 어떤 일이 완전히 끝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광야에서 금식을 하시다가 40일이 되니까 끝내신 겁니다. 자, 그런데 금식이 끝났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마귀의 시험이 시작돼요.
오늘 본문 2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아멘.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십니다. 그런데 언제 시험을 받으셨냐면, 금식이 다 끝난 뒤에 받으셨어요. “날 수가 다하매” 40일이 다하매 주리신 상태로 시험을 받으신 겁니다.
마귀는 바로 이 때를 노렸습니다. 금식이 다 끝나고,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가장 연약해져 있을 때, 바로 이 때를 노려서 시험을 시작한 겁니다.
영적으로는 성령이 충만하지만, 육신이 너무 약한 상태에 있어요. 마태복음 26장 41절에,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듯이, 마음으로는 하고 싶어도, 육신이 약하면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제자들이 그래서 기도를 못하고 잠을 잤잖아요.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에, 육신이 약하면 넘어질 수가 있습니다. 마귀는 바로 이것을 노린 거예요. 때를 틈타서 약점을 공격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하다고 해도요, 시험이 옵니다. 예수님도 시험을 받으시는데, 우리야 두말 할 것도 없죠. 아무리 기도생활 열심히 하고, 예배 잘 드리고, 성령 충만해도, 반드시 시험은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건은, 그 피할 수 없는 시험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느냐, 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시험을 이길 수 있을까. 오늘 본문에서 시험을 이기는 모범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그대로 따라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만 하면 이길 수 있다는 거예요.
자,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게 하신 목적입니다. 광야에서 스스로를 준비하고, 연약한 상태에서 마귀를 이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승리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렇다면 마귀의 목적은 뭘까요? 마귀는 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할까요? 여러분, 마귀의 목적은요.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방해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구원자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의 핵심은 구원자예요.
그러면 마귀의 입장에서는 간단하죠. 구원자가 나타나지 못하게 하면 돼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지 못하게 하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랑 싸울 필요가 없어요. 그냥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지 못하도록 막으면 되는 겁니다. 구원자만 없으면 구원 계획이 실패하니까.
그래서 마귀는 예수님이 가장 약할 때를 노려서 시험을 하는 겁니다. 그 때가 가장 승산이 높으니까. 그러데 여기서 시험이라는 말을 살펴보면요. 이 말은 헬라어로 “페이라조”라는 말이에요. 페이라조, 이 말은 “누군가가 범죄하도록 유혹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템테이션, 유혹하는 거예요.
그리고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어떤 일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시험하다”라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테스트, 어떤 일의 성사를 테스트하는 겁니다. 대체적으로 페이라조는 이 두 개의 의미 중에 하나로 사용돼요.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하셨을 때는 테스트의 의미로 사용됐어요. 과연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것인가, 안 바칠 것인가. 이 일의 성사를 두고 그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이죠.
반면에 오늘 본문에서 마귀가 행하는 시험은 템테이션입니다. 유혹이에요. 예수님의 약점을 공격해서 그가 범죄하도록 유혹하는 겁니다. 이 유혹을 통해서 마귀는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지 못하도록 막으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그런데 구원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 있어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반드시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구원자는 하나님이어야 돼요. 죄가 없어야 되거든요.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 없죠. 반드시 죄가 없는 하나님으로서의 신성을 갖고 있어야 돼요.
두번째로, 구원자는 반드시 사람이어야 됩니다. 구원은 구원자의 죽음으로써 완성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죽을 수 있는 육신을 가진 사람이어야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면서 사람, 사람이면서 하나님. 이것이 구원자의 조건이에요. 바로 여기서 마귀가 공격하는 겁니다. 이 둘 중에 하나만 사라져도 구원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마귀가 둘 중에 하나를 콕 찍어서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거예요. 무엇을 공격하는가 하면, 사람으로서의 자격을 공격합니다. 인성을 공격하는 거죠.
마귀는요, 예수님이 사람이 되시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냥 하나님으로만 계시기를 원해요. 그래서 대속의 죽음을 이루지 못하도록 하는 거예요.
바로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마귀가 총 3번의 유혹을 하는 겁니다. 자, 먼저 첫번째 유혹을 보겠습니다. 3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마귀의 첫번째 유혹은, 돌을 떡으로 바꿔보라는 유혹입니다. 40일을 금식해서 배가 고픈 사람에게 돌을 떡으로 바꿔서 먹으라는 거예요. 가장 취약한 약점이죠.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돌을 떡으로 바꿀 수 있냐 없냐가 아니에요. 저 노란 글씹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말은 예수님의 명예를 거드리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명예를 공격하는 거예요. ‘너 정말 하나님의 아들 맞냐?’는 거죠.
사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다 알아요. 왜냐면 하나님께서 직접 증언하셨거든요. 또 족보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어요. 예수님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이 맞아요. 심지어 마귀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귀는 알면서도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겁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알기 때문에 시험을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의도적으로 명예를 공격하면서 그 명예를 증명해 보라고 하는 겁니다. ‘너 진짜 하나님의 아들 맞아? 그러면 돌을 떡으로 바꿔서 먹어. 왜 바보같이 굶고 있어? 이거 너한테 아무 일도 아니잖아. 할 수 있잖아. 얼른 능력을 써서 떡으로 바꿔 먹어.’
이렇게 교묘한 말로 예수님이 능력을 사용하도록 몰아가는 것이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명예를 증명해보라는 거예요.
제가 지난 시간에 명예를 공격 받았을 때 반응하는 세 가지 유형을 말씀을 드렸었죠. 첫번째는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무시하는 것이라고 했는데요.
만약에 예수님이 긍정적으로 반응한다면 어떻게 하실까요? 마귀의 말을 받아들이겠죠. 돌을 떡으로 바꿔서 드실 겁니다. 이것이 긍정적인 반응이에요. 자, 만약에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다고 한다면, 그 뒤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육신의 괴로움을 신적인 능력으로써 해결하게 된다면, 그러면 예수님은 더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겠죠. 왜냐면, 사람은 그런 능력이 없잖아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슈퍼파워로 해결을 해버린다면, 그는 더이상 사람이 아니에요.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겁니다.
사람은 능력이 없기 때문에 사람입니다. 그리고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인 거예요. 내가 스스로 다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찾지 않죠. 내가 하나님이 되어버려요. 사람은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문제를 꿰뚫어 보셨어요. 충분한 능력이 있으시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으로서 해결하지 않으시고, 철저히 사람으로서 해결하셔요. 마귀의 공격에 긍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반응하십니다.
자,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4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아멘.
예수께서 무엇으로 해결하십니까? 기록된 말씀으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어요.
분봉왕 헤롯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르죠. 헤롯은 세례 요한에게 명예를 공격받았을 때, 똑같이 부정적으로 반응을 했지만, 자기가 가진 권력으로 해결을 했습니다. 요한을 감옥에 가둬버렸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으로 해결하셔요? 말씀으로 해결하십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8장 3절에 기록된 말씀인데요. 이 말씀은 모세가 광야에서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험을 언급하면서 한 말씀이에요. 신명기 8장 3절 한번 봐 볼까요? 신명기 8장 3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배가 고파서 원망을 했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셨어요. 그런데 만나를 왜 주셨는가 하면, 아주 중요한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는 교훈을 알게 하려고 주신 겁니다.
다시 말해서 먹고 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거예요. 떡으로 배를 채우는 것보다,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만나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교훈을 알게 하기 위해서 만나만 주신 게 아니죠. 먼저 뭘 하셨어요? 백성들을 낮추시며 주리게 하셨습니다. 먼저 백성들을 연단하시는 거예요. 광야에서 백성들을 낮추시고 주리게 하시며 연단하시고, 이후에 만나를 주시는 과정을 진행하신 겁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때로는 우리를 낮추시기도 하고, 주리게도 하시고, 그러면서도 또 우리를 높이시고, 먹이신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우리의 목자 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그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이유로 만나를 주신 겁니다. 단순히 백성들이 배고프다고 난리치니까 주신 게 아니란 말이에요.
마찬가지로, 지금 예수님도 그 연단의 과정에 계셔요. 하나님이 그를 주리게 하셨어요. 성령의 이끌리심을 따라 40일 동안 금식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는 성령의 이끌리심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마가복음의 경우에는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셨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몰아내셨다. 이는 곧, 예수님이 연단을 받으시는 모든 과정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서 그곳에서 낮추시고, 주리게 하시고, 그리고 시험을 받도록 하신 겁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승리를 위해서.
과거에 첫사람 아담이 뱀의 시험에서 패배함으로 말미암아, 죄의 노예가 된 온 인류에게, 둘째 아담인 예수님을 통하여 마귀에게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승리의 기쁜 소식과 소망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은 예수를 광야로 내모신 겁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은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승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가 아니라, 온전히 사람으로서 거두는 승리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도 마귀를 이길 수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예수님도 이기셨는데, 우리라고 못 이길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과 똑같은 사람이신 예수님이 이길 수 있다면, 우리들도 이길 수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충만한 사람에게도 시험은 옵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한 사람은 그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충만하신 예수님이 이기셨기 때문에. 승리의 모범을 보이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대로만 따라하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시험을 이기셨어요. 자기 스스로 충분히 해결할 능력이 있으셨지만, 그것을 절제하고, 여전히 배가 고프신 그 상태 그대로 인내하며, 마귀의 연속되는 시험들을 하나하나 격파하셨습니다.
두번째 시험, 세번째 시험, 각각 형태는 다르지만 사실상 본질은 같아요. 모두가 예수님의 사람됨을 막으려는 시험들입니다.
두번째 시험은 뭡니까? 천하만국을 보여주면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는 유혹이었어요. 오늘 본문 5절부터 7절까지 내용인데요. 5절부터 7절까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마귀가 지금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죠. 천하만국이 마귀 겁니까? 하나님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그것을 넘겨 받았대요. 그리고 나에게 절을 하면 그것을 주겠다는 겁니다.
지금 이 유혹은 태초에 뱀이 아담에게 했던 것과 똑같습니다. 뱀이 뭐라고 했죠?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렇게 거짓말을 했어요. 자기가 선악과를 먹어보지도 않아놓고, 하나님과 같이 될지 안 될지 어떻게 압니까? 그냥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갖다가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마귀가 하는 말도 똑같은 말입니다.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아니, 자기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준다는 거예요?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마귀는 자기가 한 말을 지킬 생각도 없고 능력도 없어요. 남을 속일 수만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분별해야 됩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홀라당 속아넘어 가는 거예요. 마귀는 보이스피싱하고 똑같애요. 아무나 걸려라 하고 거짓말을 술술 내뱉습니다. 거기에 혹하면 넘어가는 거예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은 배가 고파서 힘든 중에도 정확하게 그것을 분별하셨어요.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말씀으로 시험을 이겨내셨습니다. 무슨 말씀으로요? 오늘 본문 8절에 보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아멘.
이 말씀은 신명기 6장 13절의 말씀을 인용한 말씀이에요. 이 말씀으로 천하만국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리셨습니다.
마지막 세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시험은 죽음에 대한 시험입니다. 예수 네가 사람으로서 죽을 준비가 되었느냐는 질문을 담은 시험이에요.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되죠. 그런데 지금 그 준비가 되었느냐는 거예요.
예수님도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그래서 죽음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셨어요. 겟세마네에서 그 마음이 드러나잖아요.
그럼에도 그것을 다 이기고 죽을 수 있을 것인가가 이 시험의 핵심입니다. 너는 진정으로 십자가에서 죽을 각오가 되었는가?
자, 마귀가 정확히 뭐라고 시험을 하는지 오늘 본문 9절부터 11절까지 봐 보겠습니다. 9절부터 11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밭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마귀가 이번에는 전략을 바꿔서 말씀을 가지고 공격을 합니다. 그것도 두 개의 말씀 구절을 가지고 공격을 해요. 이 구절들은 각각 시편 91편 11절과 12절입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갖고 와서 공격하는 거예요.
지금 이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보호하신다는 겁니다. 마귀가 공격하는 포인트가 바로 이거예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맞다면, 네가 여기서 떨어져도 하나님이 너를 지키실 것 아니냐? 그러니까 속 시원히 떨어져 보라는 겁니다.
사실 이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맞이하는 시험입니다. 죽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다 살고 싶죠. 그래서 누구나 하나님이 진정으로 나를 보호하시고 살려주시리라는 증거를 얻고 싶어합니다.
머리로는 알아요. 나를 살리시리라는 것을. 하지만 그것이 마음으로 확실하게 믿어지지가 않는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도 그런 확실한 믿음이 없으셨다면, 예수님도 확실한 증거를 보기를 원하셨겠죠.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이 험난한데, 과연 내가 사명을 끝마칠 때까지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실까? 이러한 마음으로 확실한 증거를 보기 위해서, 성전에서 뛰어내리게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어요? 이번에도 예수님은 동일하게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오늘 본문 12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아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여기서 시험은 테스트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키실까 안 지키실까를 테스트하는 겁니다.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테스트했어요. 백성들이 맛사에서 물이 없어서 원망하면서,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를 시험했죠. 여호와가 계시면 물을 주실 것이고, 안 계시면 안 주실 것이고.
이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시험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보세요. 물 갖고도 그러는데, 죽음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오죽하겠습니까? 당장 저만 해도 사역을 하다가 큰 병에 걸린다든지, 사고를 당해서 큰 상처가 나게 된다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하게 될지 몰라요. ‘하나님 정말 계신 게 맞습니까? 혹시 바빠서 한눈 파셨습니까?’
이렇게 하나님께 대들 수 있다는 겁니다. 뭐 저만 그럴까요? 사람은 다 똑같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하나님의 성전에서 발을 떼고 뛰어내리게 되어 있어요.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같은 잘못을 하게 돼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의 고리를 예수님께서 끊어버리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인가를 알고 계셨어요. 그리고 그 죽음을 위하여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도 다 아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죽음은 피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맞이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두려워서 하나님을 시험한다고 한다면, 이미 예수님은 구원자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겠죠.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피하지 않아셨어요. 죽음이 두려워서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실지언정, 결코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도 왜 두렵지 않으셨겠어요? 두려우셨을 거예요. 그럼에도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말씀을 통하여 승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첫번째로, 생명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 건강의 문제, 물질의 문제, 이 모든 것은 다 생명이 달린 시험입니다. 이것을 말씀으로 이기셨어요.
두번째로, 영광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천하만국,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는 유혹을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세번째로, 죽음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이는 나를 기다리는 죽음 앞에서 내가 살기 위하여 하나님을 시험할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이 역시도 예수님은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이 모든 시험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써 오직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어요. 예수님은 성령 충만하셨습니다. 여러분, 성령이 충만할 때, 말씀에 능력이 일어납니다. 육신이 연약하고, 환경이 초라하고, 모든 것이 부족할지라도, 성령과 말씀을 붙잡는다면, 마귀가 주지 못하는 참된 평안이 넘쳐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과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비록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후에 떠나갔지만, 그것은 잠깐에 불과해요. 오늘 본문 1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마귀는 얼마 동안만 떠나가요. 금방 다시 돌아옵니다. 실제로 예수님도 계속해서 시험을 받으셨어요.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 종교지도자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시험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않고, 말씀에서 벗어나 살면, 언제든지 마귀의 시험에 넘어지고 맙니다. 한 번의 승리에 도취되어서는 안 돼요. 한 번 이겼으면 두 번 이기고, 두 번 이겼으면 세 번 이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모든 시험을 이기고 마침내 십자가 앞에서 죽음을 맞이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시험을 담대하게 맞이하여, 성령과 말씀으로 그것을 격파하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