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척을 받으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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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누가복음 4:16-30
“배척을 받으시더라”
2024. 6. 26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배척을 받으시더라”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사실 오늘 제목은 지난 시간의 제목과 연결이 되는 제목입니다. 지난 시간 제목이 뭐였습니까? “칭송을 받으시더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백성들이 예수님을 칭송했어요.
그런데 오늘 제목은요, “배척을 받으시더라” 칭송을 받으시던 예수님이 갑자기 배척을 받으시는 겁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누가복음 4장 14절과 15절을 설교하면서, 수미쌍관 구조에 대해서 잠깐 설명을 드렸었는데요. 동일한 단어나 동일한 문장, 혹은 동일한 내용을 앞뒤에 배치하고, 그 사이에 들어있는 중심 내용을 강조하는 구조가 바로 수미쌍관 구조라고 말슴을 드렸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런 수미쌍관 구조에 기반한 단락이에요. 14절과 15절이 머리 단락이고요. 저 뒤에 42절부터 44절까지가 꼬리 단락입니다. 두 단락의 내용이 동일해요. 둘 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셨다는 내용이 담겨 있고요. 그리고 또 예수님이 백성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으셨다는 내용이 같이 담겨 있습니다.
갈릴리 사역과 갈릴리 사역, 긍정적인 반응과 긍정적인 반응. 동일한 두 단락이 앞, 뒤에 배치가 됐어요. 그러면 당연히 이 두 단락 사이에 들어가 있는 중심 내용에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겠죠. 문학구조상 그렇게 돼있어요. 과연 이 중심 사건이 어떤 내용인가, 자연적으로 집중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앞에서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고, 뒤에도 동일하게 긍정적인 반응이 나온다고 한다면, 당연히 그 사이에 들어가는 내용도 긍정적인 내용이 들어가야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칭송을 받으셨다. 구체적으로 이러이러한 사건들이 있었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칭송을 받으셨다. 이렇게 돼야 자연스러운 수미쌍관 구조가 되거든요.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이 두 단락 사이에 너무나도 부정적인 내용이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에요. 어떤 사건입니까? 오늘 말씀 제목처럼, 배척을 받으신 사건이죠. 그것도 그냥 좀 무시하고 외면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예수님을 밀쳐서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한, 무시무시한 사건입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이 칭송을 받으셨다고 했으면, 그 뒤에는 당연히 ‘어떤 일들을 하셨길래 칭송을 받으셨을까’ 하고, 독자들은 기대를 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 기대를 와장창 깨버려요. 예수님이 백성들 때문에 죽을 뻔 하셨다는 거예요.
자, 이 내용을 이제 자세히 살펴보겠는데요. 먼저 오늘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부연설명을 또 하자면, 오늘 본문은 크게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눠집니다. 똑같은 단락이 세 번 반복돼요.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고, 그 말씀에 사람들이 반응을 하였다. 이 내용이 세 번 반복됩니다.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이런 거죠. 예수님의 말씀과 청중의 반응 원, 예수님의 말씀과 청중의 반응 투, 예수님의 말씀과 청중의 반응 쓰리. 이렇게 원투쓰리, 세 번 동일한 사이클이 반복된다는 겁니다. 이해가 되시죠?
자,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서, 16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6절 시작,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아멘.
지금 이 말씀은 오늘 본문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사건의 장소, 사건의 시간을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어요. 장소가 어딥니까? 나사렛이죠. 특별히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이라고 설명을 덧붙이고 있어요.
우리는 이미 누가복음 1장, 2장, 3장을 읽으면서 나사렛이 예수님의 자라신 곳이라는 사실을 잘 알아요. 그래서 굳이 이런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누가는 굳이 “예수께서 자라나신 곳”이라고 말을 덧붙여요. 이렇게 덧붙이는 이유는 이곳에서 일어날 사건을 더욱 충격적인 사건으로 보이도록 하는 장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배척을 받아서 죽으실 뻔 했는데, 세상에 거기가 예수님이 자라나신 곳이었다, 라는 거예요.
여러분, 나사렛은 아주 작은 동넵니다. 고고학적인 발견에 따르면, 나사렛의 인구가 약 200명에서 400명 정도 됐으리라고 추정을 합니다. 한 집에 가족이 5명이라고 치면, 약 40가정에서 80가정 정도 됐겠죠.
그래서 동네에 누가 사는지, 숟가락 갯수까지 서로 다 알 정도로, 아주 작은 동네예요. 심지어 예수님은 그곳에서 서른살이 될 때까지 사셨어요. 그러니까 딱 봐도 예수라는 것을 다 알죠.
오늘 본문에도 보면, 사람들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라고 하면서 다 알아보잖아요. 그런데 세상에, 어려서부터 자라는 것을 보면서 같이 생활한 같은 동네사람을 죽이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충격이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지금 이 사건이 벌어지는 날이 무슨 날입니까? 안식일이죠. 안식일에는 사람을 죽일 수 없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형벌 집행도 할 수가 없고, 재판도 할 수가 없어요. 사형수라도 안식일에는 죽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지금 안식일에 아무 재판도 없이, 화가 난다는 이유로 같은 동네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율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16절을 다시 보면요. 사실 사건의 시작은 굉장히 평화롭습니다.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렀고요. 마침 그 날은 안식일이었어요. 그래서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오히려 기대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과연 예수님이 이 좋은 날, 고향 회당에 들어가서 어떤 대단한 가르침을 주실까?’ 이런 기대를 하게 되는 거죠.
자,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셨어요. 그랬더니 누군가가 예수님께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렸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회당장이었을 겁니다. 회당장이 이사야서를 드렸어요. 그것을 받아들고 책을 펴셨습니다.
일반적으로, 회당에서는 그날 읽을 본문이 정해져 있습니다. 어, 나 오늘 이사야서 말고 예레미야서 읽을 건데요? 이럴 수가 없다는 거예요. 본문이 정해져 있어요. 주는 대로 받아서 읽어야 됩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마치 예수님이 자기 마음대로 본문을 정해서 펼치신 것처럼 번역이 됐지만, 헬라어 원문상으로 보면 그렇지 않아요. 미리 정해져 있는 본문을 찾으신 겁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 읽을 본문이 이사야 61장 1절, 2절이었어요. 이사야 61장 1절, 2절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시작,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아멘.
지금 이 말씀은 메시야의 사역에 대한 예언의 내용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그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고,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셔서 여러 사역을 하게 하신다는 내용이에요. 이 내용을 오늘 누가복음 본문 18절, 19절과 대조를 해보면, 문장의 서순이나 사용된 단어상의 차이가 조금씩 있고, 또 예수님이 읽지 않고 그냥 넘어간 문장도 있긴 합니다. 특히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이라는 문장을 빼고 안 읽으셨어요. 이런저런 차이점들이 있는데요. 하지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차이점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굳이 살펴보지는 않을 거예요.
중요한 것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고향에 와서 처음 읽으신 본문이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한 예언을 읽으신 거예요. 여러분, 이것은 우연히 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예요. 예수님이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 들어오셨을 때, 그 읽으실 본문이 이사야 61장 1절, 2절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겁니다.
여러분, 세상에 그 무엇도 우연은 없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이루어지는 필연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한 예언을 읽으신 것 역시도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에요. 필연적으로 이 본문을 읽으신 거예요.
이 본문을 읽으신 예수님은 회당의 관례에 따라서 책을 덮어 맡은 자에게 주시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보니까,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 여기에서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세 개의 똑같은 사이클 중에 첫번째 사이클이 끝나는데요. 예수님의 말씀과 청중의 반응 원이죠. 예수님이 이사야서를 읽으셨고, 이것에 반응해서 청중들이 주목하여 보았어요.
여기까지는 분위기가 좋아요. 보통 회당에서 성경을 봉독한 사람이 봉독이 끝나면 자리에 앉아서 해당 본문에 대한 해설을 하거든요. 그래서 지금 사람들이 예수님의 해설을 듣기 위해서 주목하고 있는 겁니다. ‘과연 저 사람이 어떤 해설을 할까?’ 기대감을 갖고 주목하고 있는 것이죠.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어요. 분위기가 좋습니다.
그런데 이 다음부터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두번째 사이클부터 분위기가 이상해져요. 두번째 사이클, 오늘 21절, 22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21절, 22절 시작,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예수님의 말씀과 청중의 반응 투인데요.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다시 말해서, 너희가 귀로 들은 이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말이에요.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청중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놀랍게 여겼어요. “놀랍게 여겨 이르되” 여기서 놀랍게 여기다는 말이 헬라어로 “타우마조”라는 말인데요. 이 말은 “깜짝 놀라다” 이런 뜻입니다.
지금 청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란 거예요. 그런데 놀란다는 것이, 좋은 쪽으로 놀라는 경우가 있고, 안 좋은 쪽으로 놀라는 경우가 있거든요. 이 두 경우에 똑같이 “타우마조”를 씁니다. 그래서 이것을 해석할 때 상황에 따라서 해석을 해야 돼요.
그러면 과연,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좋은 쪽으로 놀랐을까요? 아니면 안 좋은 쪽으로 놀랐을까요? 이것에 대해서 학자들 간에 의견이 달라요. 좋은 쪽으로 놀랐다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고, 안 좋은 쪽으로 놀랐다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좋은 쪽으로 놀랐다고 말을 해요. 왜냐하면 그들이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거든요.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사람들이 들은 말이 은혜로운 말이었기 때문에, 좋은 쪽으로 놀란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기대 이상으로 너무 좋았기 때문에 놀랐다는 것이죠.
하지만 여러분, 은혜로운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다 은혜를 받습니까? 똑같이 말씀을 들어도 은혜를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대적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
저는 지금 이 장면에서, 나사렛 사람들이 말씀에 대적을 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안 좋은 쪽으로 놀랐다고 생각을 해요.
특별히 갈라디아서 1장 6절에 보면, 바울이 깜짝 놀라서 쓴 말이 있는데요. 갈라디아서 1장 6절에 보니까,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떠난지 얼마 안 돼서 사람들이 이상한 다른 복음을 따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는 겁니다. 개역개정에는 “타우마조”를 “이상하게 여기노라” 라고 번역을 했는데요. 영어성경으로 보면, “astonish”라는 말로 번역을 했어요. “I am astonished” “내가 경악을 했다, 내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런 뜻입니다. astonish가 본래 라틴어 “엑스토나레” 라는 말에서 유래한 말인데요. 엑스토나레는 “벼락이 치다” 라는 말이에요. 이 말에서 astonish라는 말이 나왔어요. 그러니까 벼락이 쳐서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바울이 그 정도로 놀랐다는 거예요.
이런 뉘앙스를 살려서 본다면, 지금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바울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고 생각을 해볼 수가 있겠죠. 예수님의 말씀 자체는 참 은혜롭고 좋아요. 하지만, 그 말씀을 한 사람이 예수라고 하는 사실이 너무나 경악스럽다는 것입니다.
21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보면, 메시야가 오리라는 예언이 너희에게 성취되었다는 말씀이거든요. 이 말씀의 의미를 풀어본다면, “너희 앞에 있는 내가 바로 메시야다” 라는 말이 돼요.
너희가 그토록 기다리고 갈망하던 메시야. 그가 지금 왔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죠. 굿 뉴스, 좋은 소식이에요. 이것보다 더 은혜로운 말씀은 없어요. 이 은혜로운 말씀을 나사렛 사람들이 들었는데, 하필이면 이 말씀을 요셉의 아들이 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동네에서 나무 깎아다가 의자나 만들던 가난한 목수집 아들이 말이죠. 자기 주제도 모르고 자신을 메시야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경악스럽다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 이때로부터 사람들의 반응이 부정적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못하고, 사람의 아들로만 보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은혜로운 말을 귀에 들려줘도 소용이 없어요. 익숙함에서 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 와서 말씀을 전했다면, 믿었을 거예요. 하지만 너무나 익숙하고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믿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반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까지가 두번째 사이클입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사이클이 시작되는데요. 예수님이 사람들의 반응이 부정적으로 변해 가는 것을 감지하셨어요. 그리고 곧바로 상당히 긴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23절부터 27절까지 말씀인데요.
우선 23절을 보겠습니다. 23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예수님이 저들이 할 말을 먼저 하셨어요. 너희가 나에게 반드시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할 말을 선수쳐서 하시는데요. 그 말은 하나의 속담을 인용한 말이었습니다.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이 속담은 남에게만 베풀지 말고 너와 관련된 사람들에게도 베풀라는 의미로 하는 말이에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자기 집은 안 돌보고 어디 다른데 봉사활동만 하고 다닌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이 속담을 말해주는거죠.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남 좋은 일만 하지 말고 너희 집이나 먼저 돌봐라. 이런 의미가 담겨있는 겁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바로 이 속담을 인용하면서 예수님께 요구할 일이 있다는 거예요. 23절 뒤에 보니까,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이런 요구를 하리라는 겁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예수님이 갈릴리에 오시기 전에 약 1년 동안 먼저 유대 사역을 하셨었다고 말씀을 드렸었는데요. 그때 사실 유대 땅에서만 사역을 하셨던 것은 아니에요. 갈릴리 가나에도 와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고, 그 뒤에는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잠깐 내려가서 며칠 동안 머무셨어요. 아마도 이때 잠깐 머무시는 동안 여러 이적을 보여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 내용이 성경 전체 어디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과연 어떤 이적들을 보여주셨는지는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 일을 나사렛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더라는 거예요. “예수 네가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우리가 들었다. 그러니까 남의 동네에서만 행하지 말고, 네 고향 여기서도 좀 행해봐라. 의사야 너 자신을 고쳐라” 이런 말을 하리라는 것이죠.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는 전혀 인정하지 않지만, 그가 가버나움에서 이적을 일으켰다는 소문은 들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는 겁니다. ‘예수를 인정하기는 싫어. 하지만 이적은 보고 싶어’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마음을 단번에 꿰뚫어보셨어요. 그래서 곧바로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시는데요. 24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아멘.
선지자가 다른 데서는 다 환영을 받는데, 유일하게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우리나라 속담으로 바꿔본다면, 이런 속담이 알맞을 것 같아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친한 사람이 잘되면 같이 좋아해줘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 오히려 시기질투로 배가 아프다는 거예요.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도 일맥상통합니다. 동네에서 선지자가 나오면 좋아해야 되는데. 오히려 배척을 해요. “내가 쟤를 아는데, 쟤가 어떻게 선지자가 돼? 차라리 쟤보다 내가 낫지” 이러한 못된 심보가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 안에 이런 못된 심보가 생겨날 수가 있습니다. 같이 예배를 드리다가 누가 은혜를 받아서 눈물을 흘리면서 뜨겁게 기도를 하면, 믿음의 동역자 된 도리로, 그를 축복해주고 격려해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그를 안 좋게 생각하고, 유난을 떤다고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는 안 되겠죠.
누가 잘되면, 함께 기뻐해야지, 시기질투를 해서는 안 돼요. 나사렛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시기질투를 했어요. 동네에서 제일 못살던 목수의 아들이 메시야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선지자를 배척하는 자들의 결말에 대하여 두 가지 예시를 들어서 말씀을 하시는데요. 첫번째 예시는 사렙다 과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25절, 26절이죠. 25절, 26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아멘.
이 이야기는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내용인데요. 엘리야 시대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안 와서 큰 흉년이 들었어요. 이때 엘리야가 시돈 땅에 이르러 한 과부에게 음식을 좀 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과부가 본래는 자기 아들하고 마지막으로 음식을 해먹고 자살을 하려고 남겨뒀던 마지막 곡식가루와 기름을 가져다가 엘리야를 위해서 음식을 해주었습니다. 자기가 먹고 죽으려고 했던 소중한 것을 선지자를 위해서 섬긴 겁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이 과부에게 통에서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물질의 복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두번째 예시를 말씀하셨어요. 27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아멘.
이 이야기 역시도 의미는 같습니다.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지만, 그 중에는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이방 땅 수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만이 깨끗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열왕기하 5장에 나와요. 엘리사가 얼굴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요단 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말만 전달을 했을 때, 나아만이 처음에는 그 말을 듣고 화를 냈지만, 결국에 그 말에 순종하여 요단 강에서 일곱 번 씻음으로 말미암아 나병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두 가지 예시가 전하는 메세지는 명확합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찾아오는 은혜를 배척하면 받지 못하고, 반대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 은혜를 환영하면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은혜는 그것을 사모하고, 그것을 갈망하며, 그것을 환영하는 자에게 임하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에,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할렐루야. 침노한다는 말은, 힘을 다하여 달려든다는 말입니다. 천국을 바라는 자는 천국을 얻기 위하여 힘을 다하여 달려들어야 돼요. 밭에 보화가 들어 있으면, 가진 재산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사듯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됩니다. 그래야 남에게 빼앗기지 않는 거예요.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물질의 복을 빼앗겼어요.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도 치유의 복을 빼앗겼어요. 나사렛 사람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빼앗겼습니다. 자기들에게 가장 먼저 왔지만, 빼앗겼어요. 왜요? 배척했기 때문에.
갈릴리 땅 어디에서나 환영을 받고 칭송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그들이 배척했기 때문에, 영영 그분의 말씀을 다시 듣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전체 복음서를 종합해보면, 예수님은 나중에 나사렛에 한 번 더 방문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총 두 번 나사렛에 방문을 하신 거죠.
하지만 누가복음상에는 두번째 나사렛 방문이 나오지 않아요. 누가는 의도적으로 두번째 방문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배척을 받으신 뒤에 다시는 나사렛에 돌아오지 않으신 것처럼 기록을 했어요.
이것은 주님을 배척하는 자에게는 두 번의 기회가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어요.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잡지 못하면, 영영 놓치는 겁니다. 기회라고 하는 것은 흔하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죠. 인생에 3번의 기회가 찾아온다는 말도 있지만,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가 오직 한 번의 기회만이 있으리라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은혜 못 받으면, 내일 받지 뭐.’ 이게 아니라. 반드시 오늘 내가 은혜를 받고야 말리라는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 오늘 드리는 예배가 내 인생의 마지막 예배인 것처럼 드려야 합니다.
예배뿐일까요? 기도, 전도, 봉사,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들이지만, 내 인생에 더이상 이것들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위기의식을 갖고 살아야 돼요. 이것을 신학적으로, 종말론적인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종말론적인 신앙. 언제든지 내 인생에 종말이 찾아올 수 있다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갑자기 죽어서 주님을 만나게 된다면, 내가 주님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을 것인가? 내가 과연 주님께 칭찬을 들을 수 있을 것인가? 이처럼 우리가 인생의 끝을 생각하며, 이 끝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어요.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다 못해, 예수님을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고까지 했습니다. 이것이 세번째 사이클에서 보여지는 반응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8절 29절, 같이 읽어볼까요? 28절 29절 시작,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세번째 청중의 반응은, 그들이 다 크게 화가 났다는 것입니다. 크게 화가 났다는 말이 헬라어로 “튀모스” 라는 말인데, 이 말은 “강렬한 분노, 광란” 이런 뜻입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정신이 광란 상태에 빠질 정도로 강렬하게 분노하게 되었어요.
처음에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기대를 하고 주목을 하였었습니다. 그 뒤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깜짝 놀라게 되었다면 이제는 주체가 안 될 정도로 화가 터져나오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했어요. 한 동네에서 자란 이웃집 청년을 안식일에 죽이려고 한 겁니다.
예수님이 괜히 고향에 왔다가 죽임을 당하게 됐어요. 그런데 여러분, 이것마저도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고향에 오면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모르셨을까요? 이미 다 알고 계셨어요. 다 알고 계시면서도, 오신 겁니다.
여기에 오면, 자신이 배척을 받고, 심지어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곳에 오셔야만 했기에, 오신 거예요. 이곳은 예수님이 자라신 곳입니다. 이곳에서 30년을 사셨어요. 400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동네, 어느 집에 누가 사는지, 한 사람 한 사람 다 알아요. 그 사람들을 다 죽게 내버려둘 수 있습니까?
저들이 나를 배척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한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한 번의 기회는 줘야 되지 않겠어요? 나중에 누가복음 10장 3절에 가서 보게 되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실 때,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여러분, 이것이 제자가 가는 길입니다. 그 길이 이리가 득실거리는 곳이라 할지라도 가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리 가운데로 오신 거예요.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한 번의 기회를 주신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바로 이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리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돼요. 예수님이 전해주신 은혜로운 말씀을 전하고, 그들을 제자 삼아야 합니다. 그들의 반응이 어떠하든지, 어떤 배척을 하든지, 두렵고 떨릴지라도, 우리가 가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의 가족들, 여러분의 친구들, 여러분이 아니면 누가 구하겠습니까?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우리가 우리 주변을 먼저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라신 곳으로 오신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 주변을 돌아보고, 내 가족들, 친구들, 직장동료들, 내 소중한 사람들을 살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를 배척하는 그곳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사렙다 과부와 같이, 수리아 사람 나아만과 같이 믿음으로 반응하여 구원함을 받는 놀라운 역전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