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세우신다
Notes
Transcript
<새벽설교>
예레미야 52:28-34
“여호와께서 세우신다”
2024. 7. 12
조 정 수
오늘 본문을 놓고 “여호와께서 세우신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로써 마침내 예레미야 강해가 다 끝이 납니다. 공교롭게도 오늘이 딱 200번째 예레미야 설교를 하는 날인데요. 일부러 맞춘 것도 아닌데, 희한하게 딱 200번째에 예레미야서를 마치게 됐어요.
제가 날짜를 보니까, 2022년 3월 22일에 처음 예레미야 설교를 했더라고요. 벌써 2년 3개월 전이네요. 예레미야 1장부터 52장까지 꼬박 2년 3개월이 걸려서 끝을 내게 됐습니다.
오늘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는데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예레미야 전체를 간략하게 간추려보고, 그 뒤에 오늘 본문의 메세지를 살펴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예레미야라고 하는 인물에 대해서 되짚어 보면요. 그 이름이 “여호와께서 세우신다” 라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세우신다. 본래 예레미야는 제사장 가문 출신이죠. 그래서 30세가 되면 자연적으로 제사장이 될 운명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제사장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선지자로 세우십니다. 그때가 약 스무살쯤 됐을 때였을 것으로 봅니다. 학자들마다 적게는 열여덟 살부터, 많게는 스물다섯까지 보기도 하는데요. 대부분은 스무살 정도로 봐요. 그가 스무살이 되었을 때, 그 이름처럼, 여호와께서 그를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그것을 거부해요. 예레미야 1장 6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이런 말을 하나님께 해요.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나는 아이라서 사람들 앞에 나가 말씀을 선포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 말을 우리가 예레미야의 겸손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지금 겸손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일종의 체념적인 말입니다.
“나 같은 것이 말씀을 선포해봤자, 누가 듣겠습니까?” 이런 뜻이 담겨있는 것이죠. 예레미야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도, 사람들이 듣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았어요. 왜냐하면, 그가 아나돗 출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나돗은 예루살렘에서 약 4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성읍입니다. 거리상으로 예루살렘과 굉장히 가까워요.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굉장히 멀리 떨어진 변방입니다.
과거 다윗 시대에, 다윗의 네번째 아들인 아도니야가 반역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는데요. 다윗의 첫째 아들인 암논도 죽고, 둘째 아들인 길르압도 죽고, 셋째 아들인 압살롬도 죽는 바람에, 넷째 아들인 아도니야가 후계순위 1순위가 됐어요. 그래서 그가 당연히 자기가 왕이 될 것으로 생각을 하고, 섣부르게 군사를 일으켜서 왕이 되려고 한 겁니다. 이때 대제사장인 아비아달이 아도니야를 지지했어요.
그러나 결국에 아도니야가 반역에 실패하여 죽임을 당하고, 아비아달은 대제사장직을 박탈당합니다. 그리고 그를 대신해서 사독이 대제사장이 돼요. 그래서 이때부터 사독 계열이 대대로 대제사장직을 역임하게 됩니다.
한편, 아비아달은 자기 고향으로 추방을 당하게 되는데, 이때 추방된 곳이 바로 아나돗이에요. 그래서 아나돗은 추방당한 자의 땅, 몰락한 자의 땅, 이런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실제적으로 아나돗이 예루살렘과 4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그러나 정치적인 거리는 범접할 수가 없는 머나먼 곳이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아나돗 출신 제사장은 절대로 중심권력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아나돗 출신이라고 하면, 모두가 다 색안경을 끼고 봐요. 그것이 꼬리표가 되어서 정치권력의 중심에 들어가지 못하고 변두리 시골에만 머물러야 됩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나돗 출신에, 그것도 제사장 가문 출신의 젊은 청년이 어느날 갑자기 예루살렘에 나타난다고 생각해보세요. 예레미야라는 이름을 가진 그가 스스로 선지자라고 하면서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예레미야를 보는 시선이 어땠겠어요? 좋을 수가 없죠. “쟤는 뭔데 나타나서 난리를 쳐? 아나돗의 제사장 가문 출신이라 정상적으로는 우리 중심부로 들어올 수 없으니까, 요상한 소리를 지껄이면서 관심을 끌려고 하는구나”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선지자가 되기 싫었던 거예요. 내가 아무리 말씀을 외쳐봐야,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고 편견을 가지고 나를 볼 텐데, 말씀을 듣겠냐는 말이에요. “나는 아이라서 말을 할 줄 모른다”는 말이 바로 이런 의미를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놓아주지 않으셔요. 예레미야 1장 17절에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 예레미야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 이 말씀에 힘입어서 예레미야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사람들 앞에 당당히 서서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말씀은 유다 백성들이 듣기에 굉장히 거북스러운 말씀이었습니다. 나라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바벨론 왕을 섬길 것을 강요하는 매국노스러운 말씀이었거든요. 그래서 대적자들로부터 갖은 압박과 투옥과 살해 위협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예리미야는 그 역경 속에서도 뚯뚯하게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요시야 왕 때부터 시드기야 왕 때까지 활동을 했는데, 총 다섯 왕의 시대 동안에 활동을 한 것이죠. 연도로 보면, 주전 627년부터 나라가 멸망하는 586년까지, 약 40년 가량을 활동한 겁니다. 스무살에 시작해서 40년을 했으니까 60세가 될 때까지 사역을 한 거예요.
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유다에 남겨진 백성들과 함께 애굽으로 갔습니다. 자기가 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니라, 백성들이 억지로 끌고 간 거예요. 그래서 그가 애굽에 가서도 말씀을 선포했는데,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성경에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전승에 따르면, 그가 애굽에서 말씀을 전하다가 분노한 백성들에게 돌에 맞아 죽었다고 그래요.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예레미야의 말년이 순탄치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40년 동안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눈물 흘리며 최선을 다해서 사역을 하였지만, 끝내 나라의 멸망을 막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내야 했던 예레미야를 생각해보면, 사역이라는 게 정말 보통 정신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어쨌거나 예레미야가 예언한 그대로, 나라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만약에 백성들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죄악과 우상들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면, 하나님도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을 것이지만, 끝내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에 성벽이 무너지고, 성전이 무너지고, 모든 삶의 기반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어요. 이것을 우리가 “바벨론 유수”라고 불러요. 유수가 “유배되어 갇히다” 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가서 보게 되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의 숫자를 기록해 놓았는데요. 총 세 차례에 걸쳐서 끌려간 수를 기록했어요. 먼저 오늘 본문 28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28절 시작, “느부갓네살이 사로잡아 간 백성은 이러하니라 제칠년에 유다인이 삼천이십삼 명이요”
느부갓네살 제칠년에 유다인 3,023명을 잡아갔어요. 이것은 제2차 바벨론 유수 사건을 가리킵니다. 1차는 느부갓네살 원년에 발생했죠. 이것을 오늘 본문에는 기록을 안 했어요. 1차는 빼고 2차부터 기록을 했습니다.
1차 바벨론 유수로부터 6년 뒤에, 제칠년에 3,023명이 잡혀갔습니다. 그리고 밑에 29절에 보면, 느부갓네살 열여덟째 해에 832명이 잡혀가요. 이것은 3찹니다. 이때 남유다가 멸망했어요.
그리고 또 밑에 30절에 보면, 제이십삼년에 또 745명을 잡아 갔는데요. 이것은 4차 바벨론 유숩니다. 이 4차는 다른 성경에는 안 나와요. 오직 여기에서만 4차 유수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마 이 사건은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 총독으로 세운 그다랴가 암살을 당한 일에 대한 보복으로써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가 죽고, 나라가 풍비박산이 나니까, 구심점을 하나 만들어서 나라를 유지하게 할 필요가 있었거든요. 그래야 농사도 짓고 해서 조공을 바치지 않겠어요? 그래서 그다랴를 유다 총독으로 세웠어요. 그런데 총독이 된지 두 달 만에 암살을 당했어요. 그러니까 느부갓네살 입장에서는 화가 나죠. 자기 권위에 반기를 든 것 아닙니까? 그래서 군사를 보내가지고, 안 그래도 지금 쑥대밭이 되어 있는 나라를 다시 휘젓고, 그나마도 있던 백성들 중에 745명을 또 잡아간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잡아간 포로가 총 4,60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숫자는 1차 포로는 제외한 숫자고요. 그리고 여자나 어린이는 뺀, 성인 남자만 계수한 숫자일 겁니다. 왜냐면 너무 적어요. 열왕기하 24장에 보면, 2차 때 잡혀간 숫자만 해도 18,000명이거든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2차, 3차, 4차를 합쳐서 4,600명 밖에 안 돼요. 숫자가 너무 적어요. 그래서 성인 남자만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겁니다.
어쨌거나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바벨론에 잡혀갔어요. 싸울 수 있는 남자들이 씨가 마르고, 성벽도 무너져 있다 보니까 스스로를 보호할 수가 없습니다. 농사를 지어도 강도들이 쳐들어와서 빼앗아 가요. 희망이 없는 것이죠. 지금 이 땅에서는 미래를 꿈꿀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희망이 비추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 31절부터 마지막 34절까지 그것을 말씀하고 있어요. 희한하게도 예레미야서의 마지막 단락은 포로로 잡혀갔던 여호야긴 왕이 감옥에서 풀려나, 좋은 대접을 받았다고 하는 내용을 기록해 놨습니다.
여호야긴은 시드기야 바로 앞에 왕이에요. 시드기야의 조카죠. 그가 열여덟 살에 왕이 되었는데, 왕이 된지 3개월만에 바벨론에 2차 포로로 끌려갔어요. 그리고 끌려간지 37년 만에 감옥에서 풀려납니다. 오늘 본문 31절인데요.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에윌므로닥 왕의 즉위 원년 열두째 달 스물다섯째 날 그가 유다의 여호야긴 왕의 머리를 들어 주었고 감옥에서 풀어 주었더라.” 아멘.
여호야긴이 37년만에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에윌므로닥 왕의 즉위 원년이었어요. 에윌므로닥은 느부갓네살의 아들입니다. 아들이 바벨론의 새로운 왕이 되자마자 여호야긴을 풀어줬어요. 왜 풀어줬을까요?
이것은 그가 아버지와는 국가운영에 있어서 정책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느부갓네살은 전쟁을 하고 정복을 하는데 집중을 했어요. 그래서 당연히 다른 나라 백성들에 대한 대우가 냉정하고 과격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아들인 에윌므로닥의 입장은 다르죠. 정복을 하는 것보다는 나라를 추스르고, 내실을 다지는데 집중을 했어요. 그래서 의도적으로 포로들이나 식민지에 대해서 유화정책을 펼쳤습니다. 다른 나라의 왕들을 감옥에서 풀어준다든지, 노동을 좀 줄여준다든지. 그래서 여호야긴도 이때 풀려난 겁니다.
그런데 그가 어떤 정치적 의도로 인해서 풀려났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남유다의 왕이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남유다의 마지막 왕은 시드기야였지만, 시드기야는 합법적으로 왕이 된 인물이 아니었어요. 느부갓네살이 꼭두각시로 세워논 왕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정통성을 따라 합법적으로 왕이 된 마지막 인물은 여호야긴이에요. 그런 정통성을 가진 왕이 자유를 얻고 회복된다는 것은 장차 유다 전체가 회복되리라는 것을 예표하는 상징적인 사건이 됩니다.
비록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땅에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70년의 기한이 차면, 포로들이 풀려나고, 흩어졌던 자들이 돌아와, 다시 이 땅에서 집을 짓고, 밭을 일구고, 다시 성전을 세워서 예배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약속하셨어요. 그리고 그 때에는 말씀을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포로로 끌려가 희망이 없던 여호야긴 왕에게서 죄수의 옷을 벗기고, 그가 왕의 식탁에서 평생 동안 먹으며 날마다 쓸 것을 받는 복을 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복을 주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나의 배경이 약하고, 출신이 약하고, 내세울 것이 없어서 체념하고 낙심될 때가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세우시면, 모든 것을 초월하여 당당히 세상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40년 동안 예레미야와 함께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와도 함께하십니다. 우리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우리 발을 반석 위에 두사 우리 걸음을 견고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담대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절망의 잿더미 위에서도 소망의 불씨를 남기시며, 반드시 뜨겁게 활활 타오르도록 복 주고 복 주시는 하나님과 평생토록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