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은혜

새벽기도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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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Transcript

# 서론

어떠한 사람 혹은 대상을 생각하면, 그에 대한 고유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교회’라고 한다면 가장 먼저 십자가가 떠오를 겁니다.
‘경산중앙교회’라고 한다면 자연스레 불꽃마크가 떠오릅니다.
제가 이전에 대구경산 지역을 전혀 알지 못했을 때,
떠올랐던 이미지는 대구와 아프리카를 합친 단어 ‘대프리카’였습니다.
아프리카만큼 덥다는 표현으로. 짧게나마 8개월 정도 살아보니 맞는 말 같습니다. 하하하.
만약 여러분 ‘바울’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전 개인적으로 아래 말씀이 바로 떠오릅니다.
행 26: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이후에 이 말씀으로 설교할 기회가 있을 때 또 자세히 나누겠지만,
바울은 억울한 재판의 자리에 서 있음에도 이렇다 저렇다 다른 말을 하기보다 되레,
재판장의 영혼 구원마저 생각했던 바울이었습니다.
어제 나눴던 영혼에 대한 긍휼함이 그 누구보다 컸던 거죠.
그런 그가 쓴 빌립보서가 ‘기쁨의 편지’라는 별칭도 있지만,
‘우정의 서신’ 혹은 ‘가족 편지’라고도 불린다는 점에서 교인들을 향한 애정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 본론

그렇다면 바울은 본문에서 무엇을 권면하는가?
당시 외부적으로 거짓 교사들이 교회를 뒤흔들려 했는데, 크게 두 부류였다고 합니다.
하나는 율법주의자, 다른 하나는 완전주의자
먼저 바울은 2절에서 율법주의자들을 향해 ‘개, 악을 행하는 자’
그리고 할례 행하는 자들을 직역해 ‘절단하는 자’라고 상당히 거칠게 말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면서 4-6절을 통해 자신의 간증과도 같은 이야기를 꺼내면서
지금의 율법주의자들보다도 이전에 자신이 더 율법주의자였음을 고백한다.
이를 요약한 것이 바로 6절 하반절로, …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울 자신이 이 정도로 말한다는 건,
그 누구보다 율법주의가 아님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만큼 전심을 다해 성도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ex) 마치 그거 만지면 손대니까 절대 만지지 말라고 말하는 아이의 부모와 같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이후 바울은 뜨겁게 주님을 만나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율법주의적인 삶을 산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지, 되레 삶에 해가 되었었는지 말입니다.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본문 7-8절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의는 바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주어진 의가 결코 아니요,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선물로 주어진 의인 겁니다.
다함께 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여기에서 한 가지 표현에 잠시 집중해 보려 한다.
창세기의 아브라함 때부터 강조되었던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본문에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했는데, 이 표현은 우리에게 사실 익숙한 편이다.
그러나 한 신학자는 문법이 허용하는 선에서 이렇게 해석할 것을 권면한다.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이를 두고 비교 해볼 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적극적인 태도가 담겨 있는 반면,
‘그리스도의 성실함’이라는 표현은 하나님 중심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법상, 의미상 어떤 표현을 받아도 성경신학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원뜻을 앎에 있어 기본 관점이라 생각되기에
우리의 믿음은 내가 믿는다고 무조건적으로 다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요,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 순종하시는 주님의 신실함에 달려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우리를 더 겸손케 한다.
이렇듯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 율법주의의 문제와 한계를 선포합니다.
이어서 다함께 11-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 3:11-12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이미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구원받아 복음을 들고 열방을 향해 나아갔던 바울이었습니다.
그런 여전히 구원을 이루기 위해 달려간다고 고백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러한 그의 고백은 당시 완전주의자들의 어리석음을 무너뜨리고 있는 겁니다.
당시 완전주의자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이 땅에서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 바울은 다시금 자신의 삶을 언급하며 마치 반박하듯 설명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두고 논할 때, 이러한 표현을 자주 쓰지 않은가?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미 하나님 나라는 왔으나, 재림 때에서야 완전히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
이에 대한 개념을 전제로 바울은 온전한 부활과 아직 오지 않은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이 땅에서 하나님 주신 그 사명의 삶을 감당하고 있음을 선포합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러한 바울은 선포는 완전주의자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명백히 선포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 앞에 무엇을 느끼십니까?
그저 말뿐 아니라, 지난날의 삶을 통해 율법주의자/완전주의자들의 사상이 잘못되었음을 선포하는
바울의 이 진심이, 간절함이 느껴지십니까?

# 결론

오늘 우리는 위 말씀을 정리하며, 이렇게 고백, 결단하려 합니다.
다함께 저를 따라 고백하겠습니다.
“은혜로 살아감을 / 보여줍시다!”
율법주의는 결국 자신이 의를 얻어내려 했다는 겁니다.
완전주의 또한 결국 자산이 완전한 상태에 이르려 했다는 겁니다.
결국 자신이 무언가를 해서 얻어가려 했던 것이 그 당시 이단의 전형적인 특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은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였던 겁니다.
의는 내가 믿는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것이며,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삶 또한 그리스도께 먼저 잡힌 바 되었기 때문인 겁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은혜 아니면 설명이 안되는 것이 바울이 신약 성경 내내 말하려 했던 기초였고,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가 쓴 편지 곳곳에서 동일한 맥락 가운데 선포했던 겁니다.
롬 3:24b, …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고전 15:10,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아멘!
바라기는 바울이 이단들의 잘못됨을 자신의 삶을 통해 선포, 아니 결국 증명했던 것처럼,
여러분 각자의 삶이 “온전히 은혜로 살아감”을 이 세상에 선포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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