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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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고린도전서 1:17-25
“십자가의 도”
2024. 7. 26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십자가의 도”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십자가의 도를 설명함에 있어서, 세상적인 지혜와는 다른, 보다 고차원적인 하나님의 지혜가 십자가에 담겨 있다, 라고 설명하는 단락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 앞서서, 교회에 파당이 생겨나서 분열이 일어나는 문제를 먼저 언급을 했어요. 그러면서 내가 너희에게 보내심을 받은 것은 세례를 베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말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너희에게 온 것은,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어서 내 파벌을 만들려고 온 게 아니라, 오직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여서 너희 모두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는 거예요. 내 사람, 내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이제는 자신이 전한 그 복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해요. 오늘 본문 17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아멘.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할 때,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 라고 말합니다. 말의 지혜. 여기서 말은 헬라어로 “로고스”입니다. 내가 로고스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로고스의 지혜, 말의 지혜. 이것은 이때 당시에 헬라인들에게 유행하던 헬라철학과 현란한 수사학을 가리킵니다. 말을 얼마나 조리있게 잘하는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풀어가는가, 이것이 헬라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어요. 그래서 알맹이가 뭐든지 간에, 일단 말을 잘해야 돼요. 얼마나 포장을 잘하느냐, 이게 가장 중요해요.
그런 면에서 볼 때, 고린도교인들 입장에서는 바울이 성에 안 찼을 수 있죠. 바울은 언변이 좋지 않았거든요. 편지로 글을 쓸 때는 잘 쓰는데, 막상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면 말을 잘 못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고린도후서 10장에 바울이 그것에 대해서 썼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0절에,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교회 안에 바울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바울에 대해서 비방하기를, ‘우리가 바울의 편지들을 보면, 무게가 있고 힘이 있는데, 막상 만나보면 말이 시원치가 않다’ 이렇게 비방을 한다는 거예요. 이처럼 교인들이 대놓고 비방을 할 정도로, 바울의 언변이 별로 좋지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언변이 뛰어나고 안 뛰어나고, 이게 중요합니까? 물론 말을 잘하면 좋겠죠. 그러나 바울은 언변이며, 수사학이며, 말의 지혜가 중요하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화려한 포장 때문에 알맹이가 가려질 수 있기 때문이에요. 17절 끝에,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일평생 복음을 전하면서, 오직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에 충성했습니다. 절대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어요. 만약에 내가 말을 잘하고, 내가 언변이 좋았다고 한다면, 자칫 잘못하면 내가 부각될 수 있거든요. 사람들이 내가 전하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나만 바라볼 수 있어요. 바울이 바로 이것을 경계한 겁니다. 내 팬덤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화려한 말이며 수사학이며, 다 내버리고, 오직 복음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듣는 사람들이 복음을 시시한 것으로 여길 수가 있어요. 에이, 별 거 아니네. 뭔가 귀에 착착 감기지도 않고, 재미도 없네. 복음을 이렇게 하찮은 것으로 여길 수가 있다는 거예요. 이것을 1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8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아멘.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겁니다. 여기서 멸망하는 자들은 택함받지 못한 자들이에요. 택함받지 못한 자들은 평생 복음을 들어도, 복음의 알맹이는 보지 않고, 겉포장만 보기 때문에, 복음에 실망을 하고, 복음을 미련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도 그럴 것이, 복음의 내용이 헬라인들이 듣기에 별로 즐겁지가 않은 것이 사실이에요. 민족을 구원하려고 메시야가 오셨는데, 결국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거든요. 헬라인들은 이게 이해가 안 돼요. 하늘의 신이 이 땅에 오셨으면, 이 땅을 정복하든지, 강력한 나라를 세우든지 해야되는데, 제대로 뭘 해보지도 못하고 죽으니까, 이게 너무 미련해 보이는 거예요. 뭔가 수사학적으로 좀 그럴싸하게 포장을 해서 들려준다면 또 모르겠는데, 그냥 있는 그대로, 예수가 이러이러한 일들을 하고 배신 당해서 죽었다,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했다, 이렇게만 말을 하니까, 이게 뭐냐는 거죠. ‘이게 뭐 대단한 거야? 여기도 신 많아. 여기는 더 대단한 신화, 전설, 듣기만 하면 가슴이 뛰는 그런 대단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런데 예수는 이게 뭐야? 바보같이 배신이나 당하고, 남 좋은 일만 하다가 죽고’ 이게 뭐냐는 거예요. 이게 너무나 미련하게 보인다는 겁니다.
이것을 뒤에 23절에 다시 한번 언급을 하는데요. 23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23절 시작,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아멘.
여기는 복음을 미련하게 여기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구분해서 말하고 있는데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죠. 복음을 유대인들은 거리껴요. 여기서 거리낀다는 말이 헬라어로 “스칸달론”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혐오감을 일으키다, 불쾌하게 하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복음을 들으면 혐오스럽고 불쾌하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잖아요. 이것을 유대인들은 예수가 저주를 받아서 죽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거든요. 나무에 달린 자, 십자가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예수도 저주를 받아서 죽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저주 받은 자로 여기고,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또 이방인들은요, 복음을 미련한 것으로 여겨요. 그만큼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어떠한 감동도 주지 못합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거예요. 결코 복음의 진리에 닿지 못하고, 그냥 불쾌하게만 여기고, 미련하게만 여기고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을 통하여 구원 받는 자들이 분명히 있어요. 오늘 본문 24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아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 유대인이나 헬라인 가운데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있다는 거예요. 유대인이라고 다 불쾌하게 여기는 게 아니고, 헬라인이라고 다 미련하게 여기는 게 아니라, 그 가운데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받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있습니다. 이것을 세상적인 지혜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밑에 25절에 바울이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아멘.
여러분, 하나님의 어리섬음이 사람보다 지혜로우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한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복음이 시시한 것 같아도, 사람보다 뛰어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에.
그래서 바울은 복음에 뭘 더할 필요가 없었던 거예요. 복음 그 자체로 능력이 있고 지혜가 있기 때문에, 내 알량한 언변과 지혜를 가지고 감히 그것을 더럽힐 수가 없다는 겁니다.
나는 그저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기만 하면 돼요. 그러면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능력이 다 알아서 하십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장 6절에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아멘.
나는 그냥 복음의 씨앗을 심었을 뿐이고, 아볼로도 거기에 다시 복음의 물을 주었을 뿐이에요. 이후에 모든 역사는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있는 그대로 믿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이에요. 그냥 복음만 믿고 따라라. 복음 하나면 된다.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말을 잘하니 못하니, 스펙이 좋니 안 좋니, 이런 걸 따지는 것이야말로 헛된 일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의 도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줄로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복음의 알맹이, 진리의 말씀 안에서 십자가를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