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교회에 모이는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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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3:1-5

Notes
Transcript

서론

최근 파리 올림픽 어떻게 보셨습니까?
저는 굉장히 불편 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기독교인 청년들은 올림픽을 복음전파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장으로 활용 했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번 파리 올림픽이
혼란 그 자체의 현 시대를 잘 보여주었다고 평가 합니다.
파리 올림픽 사건과 유사한 사건이 또 있었습니다.
2022년 커먼웰스 게임 개막식에서도 바알 숭배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현대 유럽과 일부 선진국을 설명하는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DEI 입니다.
다양성 (Diversity), 평등(Eqity), 포용(Inclusion)
요즘의 세상은
분명 다양성을 옹호하고 평등을 주장하고 포용을 외치지만
그곳에는 알 수 없는 혼돈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슬람은 괜찮고 힌두교는 괜찮지만 기독교는 안된다 하는 반 기독교적 정서가 여실히 들어나고 있습니다.
너무나 이질적인 종교와 사람들이 아무 준비도 없이 몰려들어온다는 것은
큰 혼란의 시한 폭탄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까지 배워온 인류 보편의 가치와는 많은 온도차이를 보입니다.
방종과 자유가 뒤석인 미묘한 뒤틀림이 느껴집니다.
기괴한 방식의 평등과 강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발적이지도 않은 포용이 있는 시대 입니다.
일명 정치적 옳음 PC 이라고 불리는 서로 불편하고 편견의 소지가 있는 것은
아예 언급하지 말자는 암묵이 존재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조금만 진리를 강하게 말하면 편협한 사람이 되버리는 세상입니다.
이미 공공 장소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금지되는 나라가 많습니다.
우리 나라도 전도지 돌리려면 구청의 도장을 받아야 합니다. 신고들어오면 과태료 받습니다.
종교의 자유는 더 이상 믿을 자유가 아닌, 안 믿을 자유를 보장하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부딛치지 않기 위해서
서로를 옳은 길로 인도하는 것보다 서로를 방종하게 하는 쪽으로 방임 하고 있습니다.
1세기 초대교회에서도 이와 똑같은 정신이 실천 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공동체였던 예루살렘교회는
안디옥교회 라는 다양성의 교회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인정하였습니다.
그곳에서는 그 어떤 사람도 차별 받지 않았습니다.
다양성이 혼돈으로 가고
평등은 그 진정한 의미를 잃고 표류하고
진리 없는 포용으로 신음하는 이 시대를 위해
오늘날의 교회는 어떤 소명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는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1.다양한 사람을 담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 에서 안디옥 교회로 나아간다는 것이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오순절 성령 강림의 뜻에 더 가까워지는 과정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5 NKRV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오순절 상황이 성령충만히 받은 주님의 제자들이 만국 백성들 앞에 서 있는 상황 이라면
오늘 본문의 안디옥 교회는 그 만국사람들이 복음을 받고 모여 교회를 이루고 다시 나가 복음을 전파하는 상황 입니다.
안디옥에는 만국의 다양한 배경과 출신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사도행전 13:1 NKRV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바나바- 구브로(사이프러스 섬) 출신, 레위 제사장 지파, 헬라파 유대인
시므온 - 니게르(라틴어 이름으로 ‘얼굴색이 검은’을 의미). 이방인
루기오- 구레네(북 아프리카) 의 해안 도시 출신. 노예 출신. 이방인
마나엔- 폭력정치, 기독교 탄합 하던 헤롯 가문 출신
사울- 기독교 핍박의 선봉 이었던 회심자 바리새파 유대인
피부색과 출신이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괴롭히고 죽이던 원수와도 같은 사람까지 포용하는 공동체가 바로 안디옥 이었습니다.
이 공동체의 가장 큰 특징은 한가지 정확한 목적과 가치를 중심으로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종도 출신도 사회적 지휘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그 어떤 조건도 아닌 다 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진리 였습니다.
사도행전 2:21 NKRV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주의 이름 으로 구원 받았다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 받았습니다.
이전에 내가 누구였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나를 누구라 하는가?” 가 중요했습니다.
오늘,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성도”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 모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수천 가지의 다양성을 통합하는 단 하나의 진리가 안디옥 교회에서는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다양성이 혼란으로 변질 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배리 슈워츠(Barry Schwartz)는 너무 많은 선택권이 주어질 경우 소수의 선택권을 가졌을 때보다
더 안 좋은 선택을 하거나 심지어 결정 자체를 포기하기도 하는 현상을 들어 ‘선택의 역설(Paradox of Choice)’이라고 정의하며, 현대 사회가 우리에게 더 많은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지만 삶의 만족도는 더 떨어지는 상황에 주목했다.
현대의 다양성은 무엇입니까?
진리에 입각한 다양성이 아니라, 무한정 주어진 수 많은 선택사항들 입니다.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좋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선택의 물량 공세 입니다.
예전에 없던 새로운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양성 즉 남녀의 젠더에서
이제는 LGBT, LGBTQIA, LGBTQIA+
세상은 ‘그 누구도 차별 받으면 안된다’는 진리를 교묘하게 이용 합니다.
차별이나 불이익을 받으면 안되지만 특권을 누려서는 안됩니다.
예컨데, 분명 남성의 성기를 갖고 있고 남성 호르몬이 일반 남성의 수치인 권투 선수가
여성 탈의실에 들어가고 링에 올라 여성 복서를 두들겨 패서 금메달을 목에 메는 것이 진정 다양성의 인정 일까요?
평등일까요?
세상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반면에 이미 그렇게 정해진 것들이 있습니다.
인간은 산소로 호흡합니다. 질소로는 안됩니다.
바다의 물고기는 육지에 나와 어느 정도 있으면 질식사 합니다.
소는 풀을 먹고 사자는 육식을 합니다.
사자가 왜 나는 풀을 먹으면 안되나요?
왜 나는 탄소로 숨을 쉬면 안되나요?
이것은 차별 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진리를 왜곡하는 것, 과도하게 많은 선택권을 부여 하는 것은 자유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 자유를 조용히 뺏는 행위 입니다.
다양성은 곧 진리를 기반으로 해야 합니다.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진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구원의 방법은 우리의 선택이 아닙니다.
모로 가도 정상에만 가면 된다는 식의 종교다원주의는 하나님이 정한 방법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7:10 NKRV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것을 풀어버리고 기준도 없이 진리도 없이 자유를 외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15 NKRV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안디옥 교회는 누구든지 예수 이름으로 구원 받는다는 진리 아래 모였기에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질서 있고 자유로운 교회로 설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질서 있고 자유로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 독재자가 나타나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나바 아래로 모여라, 사울 아래로 모여라, 시므온 아래로 모여라가 아닙니다.
예수 이름으로 바나바도 사울도 시므온도 루시오도 마나엔도 모두 순복하여 모여라 하여야 합니다.
오직 서로 믿고 인정하는 진리 아래 모여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아래 모인 성도 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2.일 시키기 위한 부르심

안디옥 교회는 다양한 사람이 모여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여만 있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럼 왜 모였으며, 모여서 무엇을 했을까요?
사도행전 13:2 (NKRV)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
첫째로 “주를 섬겨” 와 “금식”
섬긴다 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예배하다 라는 뜻 입니다. 구약적인 관점에서는 제사장이 행하는 제사행위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여서 금식 했다고 기록합니다.
교회가 모이면 해야 할 일은 누구나 다 알듯이 예배 입니다.
구약의 제사 보다는 수 많은 절차와 희생제물이 생략 되었지만 그와 같은 단어를 사용 하였다는 것은 오늘 날의 예배도 구약의 그것보다 더 장엄하고 진실되어야 한다는 의미 입니다.
예배는 상시적으로 드리는 데 비해 금식은 아주 특별한 일을 준비하는 의식 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나바와 사울을 구별하여 세우라는 성령의 명령을 듣는 아주 중요하고 특별한 예배였습니다.
교회의 예배에는 이렇게 두가지 자세가 필요 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두 가지 예배자세>
항시 드리는 삶과 같은 예배
특별한 헌신과 다짐이 있는 영적 표현
한가지는 헌신하는 제사와 같은 예배를 항시 드려야 하고 또한 예배 드리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또 한가지는 늘 드리는 똑같은 예배가 아니라 간절히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성령의 음성을 구하는 특별함이 필요하고 그에 그에 합당한 금식과 같은 특별한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럴때, 교회와 개인의 나아갈 길을 보이시는 성령의 명령이 나타난다.
성령의 음성은 무엇이었습니까?
일을 시키십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시키실 것인지 알려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드디어 성령께서 일을 시작 하신다는 것입니다.
부름 받은 교회, 모이는 교회
교회는 부름 받은 교회와 모이는 교회로 나뉜다고 생각합니다.
모이는 교회는 일단 영적인 준비를 하는 교회 입니다.
그 교회에는 예배의 은혜가 넘칩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준비가 된 교회는 이제 모이는 교회에서 사명 받은 교회로 한 단계 나아갑니다.
이것은 교회의 나이와 전혀 상관 없는 성장과정 입니다.
얼마나 헌신 되었고 얼마나 준비 되었는가의 문제 입니다.
어떤 교회가 사명 받은 교회 이고
어떤 교회가 모이는 교회 인지 구분 하는 법은 리더를 보면 압니다.
모이는 교회는 예배와 말씀을 가르치는 리더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사명 받은 교회는 예배와 말씀을 가르치는 리더에 더하여 복음전도자 리더를 세워 주십니다.
사도행전 13:2 (NKRV)
…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안디옥 교회에는 선지자와 교사 위주의 리더들이 있었습니다.
그 리더 중에 바나바와 사울도 포함 되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3:1 NKRV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1절에서 바나바는 안디옥의 대표리더 이고
사울은 교사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2절 이후로 이 두사람은 전혀 새로운 롤을 맞게 됩니다.
“…따로 세워…”
기존의 선지자와 교사들과는 구별 시켜 새롭게 임명 됩니다.
이제는 복음전도자로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예루살렘 교회로 부터 파송되어 안디옥으로 왔던 그 공식적인 루트로
이제 역사상 최초로 교회의 공식적인 이방인 대상 선교사를 파송하는 순간 입니다.
이것이 위에 말한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이 무엇인지 드러났습니다.
모이는 교회는 예배하고 금식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과 함께 금식과 같은 특별한 결단의 표현이 동시에 드려질때, 모이는 교회는 성령의 음성을 듣습니다.
성령의 부르심은 곧 하나님이 교회에게 시키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에 합당한 일꾼을 세우게 됩니다.
이것이 사명 받은 교회 입니다.
이 땅에 수 많은 교회가 있지만 어떤 교회는 모이는 교회로 머물러 있어서 성령의 음성을 듣고자 쉼없이 예배하고 특별한 다짐과 헌신을 올려 결국은 안디옥 교회와 같이 나아가 사명 받은 교회가 됩니다.
반면에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그저 모이기만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성도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배만 드리는 성도가 있습니다. 예배와 결단의 기도를 통해 성령의 음성을 듣고자 애쓰고 힘쓰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성도가 교회에 모이는 또 한가지의 이유는
성령이 부르심을 받는 것 즉, 사명을 받기 위해서 입니다.

3.부르심에 합당한 헌신

안디옥 교회는 열심히 모여 예배하고 금식기도하고 성령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에 합당한 일꾼을 세웁니다.
드디어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역사상 첫번째 이방상대 선교사를 파송 합니다.
사도행전 13:3 NKRV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바나바와 사울을 보냈다는 것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리더를 선교지에 파견 했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 뜻은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성령이 명령한 일을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3:4 NKRV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두 사람은 교회의 파송을 받아 구브로로 갑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라는 구절 입니다.
구브로에는 행정을 맡은 위정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의 허가를 통해 그 섬의 모든 행정은 이뤄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승인이 없다면 이 선교여행은 아무 의미 없을 것입니다.
흔히들, 이 선교여행을 바울의 1차 선교 여행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여행을 안디옥교회의 1차 선교사 파송 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파송하여 안디옥 교회를 세웠고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 하였습니다.
그 후로도 안디옥 교회는 성령께서 불러 시키신 일을 충실하게 수행 합니다.
안디옥교회는 바울의 모든 선교 여행의 파송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 부르심에 합당한 일을 충실히 해내는 교회 였습니다.
뭐가 문제 이다. 이게 문제 이다.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명을 정확히 인식하고 뚝심 있게 매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교회를 떠올리면 담임 목사가 떠오르는 교회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대표되는 프로그램이 떠오는 교회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 기도 응답받는 교회로
어떤 교회는 예배가 은혜롭기로 유명한 교회
어떤 교회는 구제와 봉사가 유명한 교회가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물론 예배도 은혜롭고 기도도 뜨거웠지만
무엇보다 전도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로 유명 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 같은 전도자를 키워내는 교회로도 유명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복음 전하는 교회 라고 딱 떠오르기를 소망 합니다.
바나바와 같은 바울 같은 전도자를 키워내는 교회로 유명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중에 우리 교회를 대표하여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나와서
많은 영혼 전도하는 교회로 유명 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성령께서 우리를 불러 시키고자 하는 일은 복음 전파 이기 때문 입니다.
모든 사역의 결국은 복음 전파 이기때문 입니다.
소세지 열심히 팔고 모퉁이 사역 전심으로 하고
구제와 봉사를 아무리 잘해도 예배를 아무리 은혜롭게 잘 인도 해도 설교말씀이 아무리 좋아도
결국 잃어버린 영혼 돌아오게 전도하고 복음 전파하는 일이 최종 목적 입니다.

결론

모여서 하는 일이 무엇인가가 그 모임의 목적을 결정 합니다.
우리 교회는 모이면 예배 해야 할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모이면 특별한 결단과 헌신의 기도가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헌신하는 기도가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부르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먼 곳이 아니더라도
내 가정으로 내 직장으로 내 동네로 보냄 받아 복음을 전하라는 성령의 부르심에 순종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주일학교로 학생회로 청년회로 또한 찬양팀과 악대로 나아가 복음 전하시기 바랍니다.
모이는 교회에서 사명 받은 교회로 그리고 시키시는 일을 행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배하는 성도, 사명 받은 성도, 성령께서 불러 시키시는 일을 행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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