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설교 240129 월 [이사야 20]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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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394

본문: 이사야 20장

오늘 이사야 20장은 예언서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독특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짧은 분량의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거의 없지요. 이전의 신탁들이 주로 ‘하신 말씀’으로 되었던 것과 대조적입니다. 대신 예언자는 직접 명령을 듣습니다. 2절을 보면,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하매” 이 명령에 예언자는 말씀대로 행동하지요.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니라.”
이사야서 20장은 이 말씀이 언제 주어진 것인지 배경이 1절에 나오는데요,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다르단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때니라.’ 옛 블레셋 도시의 하나인 아스돗은 이스라엘의 언약궤를 빼앗아 안치했던 도시이기도 합니다. 지중해, 그러니까 바다에 접한 도시였는데 예루살렘에서는 정서쪽에 위치했습니다. 그러니까 머리 속에서 지도를 그려보면, 앗시리아가 북쪽에서 밀려내려오고 있는데, 예루살렘의 정서쪽, 아스돗이 점령당했으니 예루살렘 유다로서는 앗시리아 군대의 위협이 임박한 상황이라는 것이 상상이 되지요.
그래서 1절의 소식은 유다 예루살렘에게도 큰 고민이 됩니다. 북쪽에서 해변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아스돗은 점령했다는 것은, 앗수르 군대의 목적지가 남쪽 애굽임을 뜻하기 때문이지요. 앗수르의 위협에서 구원을 얻을 방편으로 애굽을 의지하고 있던 유다로서는 더욱이 큰 낭패일 수 밖에 없습니다. 5절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바라던 구스, 그들이 바라던 애굽, 그들로 말미암아 놀라고 부끄러워 할 것이다.” 유다는 남쪽, 아프리카의 큰 세력인 애굽과 구스를 의지해 앗수르의 거센 물결을 막으려 했지요.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예언자에게 임합니다. “삼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한 징조와 예표가 되어라.” 예언자는 종종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요구받을 때가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허리띠를 강가에 묻어 유다 백성에게 징표를 보이라고 명령을 받고, 에스겔은 아내가 죽어도 울지 말것과, 또 어느 날에는 390일과 40일동안 각기 왼쪽과 오른쪽으로 누워 있을 것을 명령 받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처럼, 귀로 듣는 것보다 직접 예언자의 행동을 보는 것이 더 크게 들려오곤 하는 것이지요.
벗은 몸과 벗은 발로 삼년 동안 다니라는 이사야에게 주어진 명령은 포로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4절처럼 유다가 의지한 애굽과 구스 지도자, 통치자들이 앗수르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혀갈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예루살렘 길거리에서 이사야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아마 큰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 왕궁에서 일하는 왕궁 예언자였습니다. 높은 사람이 입는 좋은 옷 입고 다녔겠지요. 그런데 삼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그것이 기괴한 광경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사야가 미쳤나보다, 생각했을 겁니다. 그야말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을 겁니다. 제국이 포로들을 사로잡아갈 때 문자 그대로 벌거벗기고 쇠고랑을 채워 끌러갔다고 하니 말이지요. 패배한 나라의 왕이든 노예든 매한가지로 벗은 몸으로 끌고 가는 일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이사야의 행동이 ‘포로의 모습’을 상징했다면, 그 역시 삼년 동안 예루살렘 거리를 그런 모습으로 돌아다녔을 겁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머리는 해치고, 쇠사슬과 쇠고랑만 차지 않았다 뿐이지요. 사람들이 볼 때 제정신으로 볼래야 볼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을 누가 귀기울여 듣겠습니까? 누가 그 행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예언자들이 상징적인 행동을 명령받을 때 동시에 침묵도 명령받습니다. 자기 행동에 대한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사야가 이 정신나간 행동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설명을 했다 한들, 누가 그의 말을 들었겠습니까? 이사야의 행동 자체가 이미 사람들에게 불편함과 불쾌함,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상행동’이니 말이지요.
어쩌면 사람들은 애굽과 구스가 이처럼 패망할 것이다,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앗시리아에 패배할 것이다, 행동으로 보이는 이사야를 보면서 콧방귀를 꼈을지 모릅니다. 이사야의 행동을 경멸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애굽과 구스를 의지하는 자신들의 마음과 결정을 정당화 하기 위해 스스로 기만하는 것일 수도 있지요. 애굽과 구스는 든든히 설 것이다, 내가 그들을 선택한 것은 옳았다, 그렇게 자기 위안을 삼으려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이사야의 모습이 너희가 의지하는 애굽과 구스가 맞이할 모습이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 그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고 믿고 그것에 우리 삶의 방향을 맞추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내 길의 등불이고 내 발의 빛으로 삼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기이한 것’으로 비추어지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오른뺨 치는 자를 향하여 네 왼뺨도 돌려대라. 너의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네게 잘못한 자는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이런 말씀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 이런 말씀을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삼고 순종하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떤 용기입니까? 그것은 나 자신을 내려놓는 용기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과 회의를 내려놓는 용기,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위기와 위험을 기꺼이 감당할 용기, 세상에서 낮아지고 연약해지고, 우리가 죽은 자로 발견된다 하더라도 이것이 참된 생명임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지요.
사도바울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에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지요.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의 일이 세상에서는,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들이 보기에는 미련한 것임을 잘 아는 바울에게는 세상에서 기꺼이 거리끼는 사람들 되고, 미련한 자 될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이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와 함께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성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요. “우리가 세상에 볼 때 무명한 자요, 죽은 자요, 근심하는 자요, 가난한 자,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우리는 유명한 자요, 살아있는 자요, 항상 기뻐하는 자요, 많은 이들을 부요하게 하고 모든 것을 가진 자들입니다.” 세상에 미련하고 어리석은 그 예수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용기로 바울은 교회가, 성도가 바로 이와 같은 자들임을 밝히고 있지요.
우리에게도 이 믿음, 이 용기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세상에서 미련해 보이고, 약해 보이고, 심지어는 우리에게도 말이 되지 않는 어리석은 것으로 비추어질 때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그 위험을 감당하는, 기꺼이 미련함에, 약함에, 어리석음에 자처하기를 다짐하는 용기가 우리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에 참 순종함이 우리에게 힘과 능력이 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오늘도 주 안에서 승리하시는 삶이 되시길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제목/마침기도

말씀을 생각하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사람들의 시선과 말과 손가락질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주님 말씀 따라 살면 내가 어리석어 보이고, 약하게 비추어질 것 같고, 사는 길 아니라 죽는 길처럼 보여도, 순종함으로 내가 죽고 주님이 우리 안에 사는 길이라면 그 길 따르는 용기를 주옵소서.
그리하여 믿음으로 날마다 승리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교회를 위하여
내일은 교역자 수련회가 있습니다. 오고가는 길에 안전케 하시고, 새 힘을 얻는 시간되게 하소서.
이번주 청년부 수련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 위에서 청년들이 소망을 얻게 하옵소서.
이번주 주일 오후예배는 자녀들과 함께하는 예배로 드립니다. 믿음으로 양육하고 다음세대를 세우는 것, 교회의 사명이자 바로 나의 기도제목임을 깨닫는 교회되게 하셔서 함께 동역하게 하소서.
담임목사님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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