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5: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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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거하시게 하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요한복음을 어려워 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나와 크게 상관이 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러저러한 문제로 교회에서 답을 얻고 싶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어쩌면 저자 요한이 살았던 1세기에는 ‘이것이 삶의 문제인가?’라는 생각조차 못하며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처럼 가장 뜨거운 대낮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물을 긷는 삶이나 9장에서 맹인으로 태어나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성전 앞에서 구걸하는 삶이나 5장에서 베들레헴 연못이 처음으로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들어가 나음을 바라며 자리를 지키는 38년된 병자의 삶도 그럴 것입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오히려 모든 것이 문제가 될 정도입니다. 말 때문에 상처를 받는건 누구나 겪는 흔한 일이 되었고 사회는 정치적으로 양립되어 서로를 죽일 듯 바라 봅니다. 그래서 공동체 속에서 나의 정치적 성향처럼 나의 생각을 숨겨야 되는 시대가 아닙니까? 철저하게 나를 집으로 그것도 내 방에 숨겨야만 하지만 그러나 가족 조차도 이해하지 못해 생긴 갈등은 큰 사회적으로 가장 큰 문제가 된지 이미 오래 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온갖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여 들어 자신이 낫기 만을 바라는 베들레헴 앞에 38년 된 병자처럼 나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딱 한 번이면 기적이 일어나듯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 그렇게 믿고 매주 교회 출석을 마일리지 쌓듯 쌓아가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출석이 한 때는 성실의 가장 대표적인 행위였던 적도 있고 여전히 그런 면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성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문제 투성인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일용할 양식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죠. 물론 말씀은 우리를 치료합니다. 그러나 삶의 변화를 이루지 않는 단기적 치료가 아니라 마치 체질을 바꾸듯 말씀으로 새로운 체계가 나를 이루어가는 과정인데 여전히 우리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나의 방식’에 맞는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고 있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에서 가장 쉬운 비유일것입니다. 누구나 초보적인 지식만 있다면 이해하는데 걸림이 될 만한 어려운 분이 없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깊은 이해까지 도달하려면 살펴보아야 할 내용은 만만치 않습니다.
첫 번째, 왜 포도나무 이야기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포도나무 이야기가 등장할 때는 대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실 때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비유할 때 이미 오래전부터 포도나무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어떤 이야기 패턴에 익숙해져 있으면 시작하는 말을 듣는 순간 ‘또 그 이야기네’하는 것처럼 포도나무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이미 ‘또 그 이야기네’한다는 것이죠. 그런가하면 또 하나는 언약의 상징으로써 포도나무입니다. 중요한 몇 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
시편 80:9–16 “9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10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11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12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13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14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15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16 그것이 불타고 베임을 당하며 주의 면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오니”
이사야 5:1–7 “1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3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이렇듯 포도나무를 심고 가꾸어 풍요로운 결실을 맺는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 그리고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약속을 구약에서 많은 곳에서 자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께서 ‘나는’ 이라고 시작합니다. 우리는 앞서 예수께서 자신을 ‘나는 무엇이다’라고 했던 말들이 기억나실 것입니다. 최근에 14장에서 ‘나는 길, 진리, 생명’이다라고 했던 구문처럼 지금 ‘나는 참포도나무’라고 선언하신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어서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말합니다.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켰다면 예수님은 ‘참포도나무’라고 말함으로 약속과 연결된 ‘참됨’과 이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포도나무였지만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책망 받습니다.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해 풍요로운 결실을 맺지 못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참’이라는 표현을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그리고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의 모습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보게 된다는 것이죠.
농부가 실패한 것이 아니고, 포도나무가 실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참포도나무가 어떻게 성공하는지를 농부는 참포도나무를 통해 실현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예수께서 참포도나무라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참포도나무를 기르시는 분이 농부인 성부 하나님이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농부와 참포도나무는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됩니다. 2절에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라는 열매 맺지 못한다는 말씀은 가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농부는 그런 가지를 제거하는 것이 농부로서 마땅하다는 것이고 이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는 목적과 잘 부합한 것입니다. 반면 우리는 본문을 읽을 때는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가 눈에 먼저 들어오죠/ 1.2절의 핵심은 ‘더 열매를 맺게하려고’ 맺지 아니하는 가지를 제거하는 ‘깨끗하게’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3절에 ‘내가 일러준 말로 너희는 이미 깨끗하여 졌다’는 말씀은 방금 우리의 눈에는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에 시선이 꽂히는 것처럼 제자들 역시 그럴 것이기에 ‘너희는’ 아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지각을 하면 이상하게 지각한 애들이 혼나지 않고 ‘일찍와 있는’ 학생들이 혼납니다. 속으로 ‘난 지각을 안했는데 내가 들을 말이 아닌데 왜 혼나고 있지’합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시면 지각한 아이들은 이미 규정을 어긴 것이기에 혼날 필요가 없이 ‘벌점’이 부여됩니다. 마치 요한복음 3:18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것이죠.
반면 지각을 하지 않은 이들을 혼내는 것이 아니라 지각자들로 인해 파급되는 분위기에 휩싸여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너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즉 ‘너희의 상태’를 알려주는 것이죠. 예로 이미 ‘가룟 유다’는 주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배반의 길을 결정했지만 아직 베드로는 배반을 얼마 앞두고 있는 상황에 주님으로 부터 경고를 듣는 것이지만 베드로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은 까맣게 잊고 ‘왜 내가 그런 말을 들어야지’할지 모릅니다. 마치 ‘난 지각도 안했는데 혼나고 있네’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참포도나무이신 주님을 통해 우리와 어떻게 연합되는가를 보여주십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아마도 흰밥에 콩처럼 계속해서 씹히는 단어가 있어야 합니다. ‘거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아버지에 대한 설명없이 자연스럽게 사용하십니다. 그러다 보니 빌립은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했던 것이죠. 그에 대한 답은 ‘오랜시간 같이 있으며 보았던’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거하신’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를 보아야 했습니다. 과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구약 출.레.민,신명기에 드러난 성막이죠. 성막의 의미가 거주하다, 거하다는 의미이고 이것이 신약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이제 예수께서 죽음이라는 현실의 부재 속에서 보혜사를 통해 우리 속에 영원토록 거하시는 것을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더 분명하게 깨닫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4절에 ‘내 안에 거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조건적인 형식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앞서 3절에서 ‘이미’라고 하시면서 관계적으로 완성된 상태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버려질 가지가 아니라 깨끗해진 가지로써 그런 것이죠. 그리고 ‘거하다’는 표현을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다는 비유로 바꿔 설명합니다. 왜 중요할까요?
그 이유는 열매 때문입니다.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인데 반면 ‘스스로 열매를 맺겠다’는 의도를 주목해야 합니다. 즉 가룟 유다처럼 말입니다. 오해가 되는 것은 뭔가를 할 수 있는데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할게’는 우리의 자주성을 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하게 앞서 ‘나를 사랑하는 자는 계명을 지킨다’라고 할 때 지키는 것은 스스로가 ‘해야 하’는 것이죠. 하지만 여기 ‘스스로 하겠다’는 것이 해야 함과 연결되어야 하는데 다른 것과 연결됩니다. 그 예가 가룟 유다요 베드로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모시고 그룹을 이루고 사람들을 선동하면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베드로는 ‘나는 우리의 리더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다’고 말함으로 예수와 전혀 ‘스스로 열매를 맺겠다’는 것이죠.
거한다는 것은 상호간에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겠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나무는 가지에 열매를 맺히게 하고 가지는 스스로 맺히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는 관계를 ‘상호 내주’를 의미하며 ‘거한다’는 의미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보혜사’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성막으로 거하셨고 그들은 늘 성막을 바라보면 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과 3년의 시간을 함께 보내시며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빌립에게 ‘오랫동안 함께 했다’고 하시는 말은 시간적 의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5절에 다시 강조합니다. ‘나는 포도나무’ 너희는 가지’ 라는 상호내주의 관계가 ‘내 안에 거하면’인데 이런 관계를 통해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결과까지 연결되는 구조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요? 6절에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즉 상호내주가 되지 않은 가지는 나무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버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문제만을 들고 매주 교회를 찾는다면 과연 ‘상호내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스스로 열매를 맺겠다’는 의도는 아닐까요?
결국 사람들은 쓸모없는 가지를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릅니다. 반면에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것은 7절에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무와 가지가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상호내주가 된 것을 연합된 상태로 말하고 ‘내 말이’ 영향을 주는데 이를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죠. 이 상태는 우리의 삶에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께서 ‘계명에 따라 옮음’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행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의미입니다.
세 번째 거한다는 것은 상호 내주로 연합의 의미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본문에 ‘많이 맺으면’이라고 기록된 것을 통해 상태를 보여줍니다. 많이 즉 ‘기쁨’이죠. 기쁨은 많기 때문이 아니라 ‘영광 받는 것’에 대한 우리의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좋은 결과를 맺을 때 부모의 기쁨인 것은 자녀 덕을 보는 것 때문이 아니죠. 부모 자녀라는 상호 관계에서 오는 최고의 상태가 ‘기쁨의 충만’인 것입니다.
관계에서 오는 기쁨은 8절에 ‘제자의 관계에서 9절부터 ‘사랑의 관계’로 이어가는 것이죠. 농부이신 아버지 하나님은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 농부의 마음처럼 그러하기 때문에 ‘마음을 쏟’는 것 즉 사랑을 쏟는 다는 것입니다. 9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죠. 요한복음 3:1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5:8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연합된 관계인 나무와 가지 그리고 상호내주의 통로에 오가는 것은 ‘그의 말씀’입니다. 부모의 말을 듣는 자녀의 관계는 어떨 때 가능합니까? 하물며 계명을 지키는 관계가 사랑의 관계일 때 사랑은 힘을 발휘해 다른 계명들을 힘 있게 지키도록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다시 사랑은 더 견고해짐으로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그래서 11절에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이르게 하는 매우 중요한 재료가 되는 것이죠. 자녀의 잘 됨이 부모의 기쁨으로 끝나지 않고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이 다시 자녀의 즐거움이 되지 않습니까?
바울은 이런 관계를 믿음, 소망, 사랑의 관계로 해석했고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던 것이죠.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믿음은 길을 가게하는 동인이고 소망은 길을 가는 동안 친구처럼 계속해서 힘을 주는 친구로 그립니다. 그리고 사랑은 마지막 천국의 문을 향하여 이끌어 주시는 주님의 손길로 영원한 관계로 그립니다. 부모가 어린 아이의 손을 힘있게 당겨 위험에서 구합니다. 때론 자기의 목숨과도 바꾸는 것이 ‘의로움’이나 그렇게 하는 정담함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도 그래서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고 하는 자기 희생을 사랑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불로 뛰어드는 소방관, 철길에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사람이나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랑했다’라고 말하지는 않죠. 하지만 그’들’의 ‘의’로운 행동에는 ‘친구를 향한 사랑’인 사람의 생명에 대한 최고의 가치를 가장 옳다고 여기는 사랑의 가치를 구현한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은 ‘한 의가 나타났다’라고 말합니다. 죄인을 대신해서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을 표현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희생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자녀를 위한 희생이 이 땅에서 보여주는 관계적 희생의 최고봉이라면 ‘친구’를 위해 버리는 희생은 한 줄기 빛처럼 어두운 세상을 밝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14절에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친구를 위해 15절 ‘알게’ 하신 것은 ‘종의 관계’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종의 관계에서 나의 문제만을 해결 받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친구가 되는 관계에서 오는 기쁨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되면 자연히 종의 관계에서 문제는 다시 보일 뿐 아니라 친구이기에 다른 시각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면서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다이어트로 보면 당장에 체중만이 눈에 보이고 중요하지만 건강하려는 시각에서 보이면 다이어트도 중요하지만 하나의 과정에 불과 합니다. 그래서 삶의 전체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충의 변화만이 기쁨이 아니고 변화된 건강은 한 부분인 허리 사이즈의 옷을 버리고 새롭게 입는 기쁨으로 일차적으로 나타나고 이를 즐기기 위해 삶의 전체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수르숨 코르다’는 라틴어는 ‘마음을 끌어 올린다’는 의미로 성찬에서 칼빈이 자주 사용한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연합한 상태를 이렇게 말한 것이죠. 주님은 제자들에게 친구라고 하시면서 자신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열매를 많이 맺는 풍성함으로 마음을 끌어 올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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