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2아들과 아빠, 누구의 고집이 더 센가?
Notes
Transcript
# 서론
# 서론
종종 찬솔이가 아내에게 혼나는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면 당연히 가슴이 아프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노무자식’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가 언제냐, 바로 아닌 것을 맞다고 우길 땝니다.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말을 하는거죠.
➟ 제가 왜 이렇게 시작하느냐, 바로 오늘 본문이 딱 그 상황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소제목을 이렇게 붙여봤습니다.
‘중2 아들과 아빠, 과연 누구의 고집이 더 센가’
본문은 무조건 자기가 맞다는, 심지어 잘했다는 식의 이스라엘과
자신의 이름을 위해, 영광을 위해 끝까지 이스라엘을 책임지겠다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 본론
# 본론
1-5절까지의 전반부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고발합니다.
1절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 받고, 유다의 허리에서 나왔다 하고,
심지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도 하고 하나님을 기념도 하면서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다?
어불성설이죠! (말이 조금도 사리에 맞지 아니함)
2절 그들은 거룩한 집안 출신이라 말하고, 바로 그 하나님을 의지한다고는 합니다.
3절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이미 말씀하셨고 사전에 경고도 하셨으나
결과적으로 어떻게 합니까? 4절 완고하게 자기 고집대로만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마음은 무시한 채, 그저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겁니다.
심지어 5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을 걱정하셨다고 합니다.
왜그럴까요? 그들이 혹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 만든 우상이 자신을 도왔다 말할까봐!
이렇듯 전반부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완고하고 어리석은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차라리 어제 심판을 선고받은 바벨론을 불러다가 되레 이스라엘을 심판해야 하지 않나 생각하게 됩니다.
앞서 제가 오늘 본문의 제목을 뭐라고 붙였다고 했죠?
‘중2 아들과 아빠, 과연 누구의 고집이 더 센가’
사실 이만큼 되었으면 아빠는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아들을 향해
‘그래, 니 맘대로 해!’라고 소리지를만도 한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6절 이전과 같이 또다시 새롭게 하실 일을 미리 말씀해주시겠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 이전처럼 여전히 동일하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겠다는 겁니다!
심지어 8절, 새번역으로 앞부분만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네가 성실하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이 어떻게 반응하실지를 다 알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또다시 중2와 같이 반응할 줄 알면서도 왜 이전과 같이 행하시는 건가?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건가? 그 이유가 바로 10절에 있습니다.
다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 사 48:10,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바로 연단하기 위해서. 그들을 훈련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겁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9절,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끝끝내 이스라엘을 멸절시키지 않으셨다!
* 적용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어찌되었든 자신의 아들을 끝까지 책임지려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처음부터 노골적이었던 하나님의 고발은 결코 이스라엘만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쓴소리이자,
더 이상 돌아가지 않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 다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 많은 선지자들과 각종 사건들이 어떠한 메시지를 남겼는지,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면서 어떻게 하셨는지,
결과적으로 그의 백성을 위해 지금도 여전히 무엇을 행하고 계시는지 말입니다.
길게는 매 주일 예배를 따라, 짧게는 매일 묵상하는 말씀을 따라
우리는 은혜를 구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묻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따라 살아가기를 늘 간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떠합니까? 결단하는 그대로, 들었던 말씀 그대로 행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니, 엄밀해 말해 잘 안됩니다.
분명히 마음은 있는데 그 마음 따라 내 몸이 움직이질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이스라엘 뿐 아니라, 우리의,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정말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기록 그대로,
그의 백성들을 결코 포기치 않고 계속해서, 한결같이 가르치겠다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삶의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를 연단시키겠다 고집 부리십니다.
바로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영광을 위하여!
그래서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이룰 것이라!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단련시키시사 우리를 사용하시겠다 말씀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 3절, 내가 홀연히 행하여 그 일들이 이루어졌느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 앞에 우리의 고백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 은혜라오’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 결론
# 결론
말씀을 정리합니다. 중2 아들과 아버지의 고집.
정말 웃기지만, 감히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렇게 비유해서 표현할 수 있다는 건,
애당초 포기치 않는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의 고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이 원리를 기억하며, 오늘도 그 고집에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