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보이는 새로운 세계(요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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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보이는 새로운 세계(요 2:1-11)
<서론>
<고글을 쓴다> 자전거를 타거나, 교회 마당 청소 등 야외활동 할 때, 이 편광렌즈 고글을 씁니다.
멋으로 쓰냐고요? 그런 면도 있지만, 멋보다는 실용성 때문입니다. 편광렌즈는 빛의 난반사를 차단해 줘서 눈부심 없이 사물을 보게 해줌으로 야외활동을 편안하게 오랫동안 하게 해줍니다.
예전에는 색안경이라고도 했는데, 이것을 쓰면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들어오는 세상을 보게 됩니다.
세계관(世界觀)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단어는 거창하게 보이지만, 사실 뜻은 별거 아닙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세계관입니다.
모든 사람은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대로 세상을 판단하고 살아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세계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보는 눈은 무엇인가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What would JESUS do?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믿음의 렌즈」로 삶을 해석되기 때문에, 「기독교세계관」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가슴에 각인된 성경말씀이 하나씩 있습니다. 저에게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이 그것입니다.
이 말씀은 제가 처음 믿음의 눈을 뜨게 한 말씀이며, 그때부터 지금 세상을 보는 창문이기도합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믿어지게 하셔서, 그냥 눈으로는 절대 보지 못했던 놀라운 세계, 새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1. 믿음은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는 눈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는 눈입니다.
그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눈을 먼저 바꾸시고자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라나선 제자들에게 제일 시급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게 하는 ‘믿음의 눈’이었기 때문입니다.
<image 요단에서 갈릴리로> 요한에게 세례 받으시고, 베드로와 안드레 빌립과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은, 요단동편에서 갈릴리로 이동하십니다(정확한 경로를 알 수 없으나, 최소 100km).
“사흘째 되던 날”(1) 주님과 일행은 갈릴리 가나에 이르렀고, 한 결혼식에 초청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혼식장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잔치 집에 꼭 있어야 할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아마 혼주가 인원 파악을 잘못했거나, 누군가 폭주해서 그럴 수 있습니다.
당시 중동에서 포도주는 생활필수음료였습니다. 마실 수 있는 물이 귀했을 뿐만 아니라, 알칼리성 석회토양 때문에 이를 중화시킬 산성인 포도주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이 좋은 날; 결혼식 연회에서 포도주가 없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손님이 집에 오면 발을 씻게 하거나,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정결 항아리」두세통(metertes 38.6리터×2~3, 80-120리터)짜리 6개에 물을 채워,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첫 이적인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다」는 것에는 특별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정결예식에 쓰는 물」은 하나님이 부정하지 않다(레 11:36)고 말씀하신,「샘물spring」에서 길어온 것으로서 히브리어로 「아인עַיִן」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아인עַיִן」은 샘물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또한 눈 eye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언어유희가 있습니다. 「아인עַיִן」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이적을 베푸시면서, 제자들이여! 이제 ‘세상을 바르게 보는 눈, 「믿음의 눈」을 뜨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초자연적인 이적을 경험한 제자들의 변화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11下)
믿음의 눈을 뜨는 것은, 우리 성도에게는 필수 불가결한 조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대, 하나님은 우리에게는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자여야 한다. 착해야 한다. 성실해야 한다. 잘생겨야 한다. 예뻐야 한다.」가 아니라, 「오직, 믿음이면」된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은혜를 누리는 대에도, 우리 스스로는 어떤 값도 치루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만」 대가로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부요함을 계속 그리고 크게 누리는 비결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도록 하는 믿음의 눈」만 뜨면 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 출애굽기에 비슷한 사건 하나를 소개합니다.
공생애를 시작한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이, 갈릴리로 향한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듯이
하나님이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에게, 첫 번째로 보이신 기적이, 그것도 「사흘」(출 11:22)만에 보여주신 기적이, 마라의 「쓴물이 단물로 변화」(출 11:25)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의 최대 관심 아니, 최대 고비는 여전히 그들의 눈이 세상만 보며, ‘무엇을 마실까?’하는 것에만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홍해를 가르셔서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들이 앞으로 들어갈 가나안에 대한 소망은 온데간데없고,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출 11:24)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미 자유인이었으나, 눈을 뜨지 못하고, 여전히 애굽에 살 때와 똑같이 노예처럼, 세상만 보는 눈이, 하나님 나라를 보는 눈으로 뜨게 하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 하나님의 계명에 귀 기울이라!’그러면 쓴물이 단물로 변화된 것처럼, 너희 눈이 치료되어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 11:26)라고 하신 말씀은, 단순히 몸의 병만을 고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만 보는 눈을 치료하여, 「믿음의 눈을 뜨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샘물’을 변화시키시며, 제자들의 ‘믿음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종(로마의 종, 율법의 종)되었던 눈을, 하나님을 향하는 자유인의 눈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눈; 세계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시며, 제자들의 눈을 열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게 하셨습니다.
이 표적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고 싶으십니까? 그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주님과 구원자로 영접한 모든 사람은, 믿음의 눈(아인עַיִן)으로 이미 임하신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을 떠서, 믿음으로만 보이는 새로운 세계, 하나님 나라를 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믿음의 눈을 떠야(변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눈을 떠야(변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결혼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예수님께 알립니다(3).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차갑습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4)
그런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행동은 의아스럽습니다. 예수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고 말합니다.
예수의 어머니는 왜 이렇게 말하였을까요? 「믿음」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아기 예수가 자신의 배에 잉태 될 때부터 이미, 예수님이 창조주이고 하나님이시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은, 주님이 빈항아리에서 포도주를 낼 것을 이미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창조주요 하나님으로 믿었음을 확인 할 수 있는 표현이, 예수께서 어머니에게 사용한 호칭 “여자여”(γύναι)입니다.
이는 「어머니! 나를 무엇으로 보고 이딴 일이나 시키는 거죠?」하며, 귀찮은 부탁이나 하는 어머니를 비하하는 호칭이 아닙니다.
이 호칭은 십자가에서도 예수님이 어머니를 “여자여”(19:26)라고 부르셨고,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4:21)에게도, 부활하셔서 만난 막달라 마리아에게도(20:13, 15) 동일한 호칭을 사용하십니다.
이 호칭은 예수님 자신을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님(하나님)으로서 어머니 마리아를 대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바라보는 어머니 마리아의 시선은 남들과 달랐습니다.
텅 빈 포도주 항아리일지라도, 새 창조의 주인, 새로운 질서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이 포도주를 내실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고 지시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는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은 예수님을 옛 창조를 상징하는 정결 예식을 위한 여섯 항아리의 물을, 근본적으로 변화 시키는 ‘새 질서의 창조자’로 소개합니다.
그렇다면 「너희도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합니다.
새 창조를 이루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불순종으로 망가진 옛 질서를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회복하신 예수를 바라봄으로 믿음의 눈을 뜨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믿음으로 새로운 세계를 보아야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새 창조를 이루시는 하나님으로 바라보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는 믿음의 눈을 뜨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도래한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정결의식”(6)은 유대의 율법과 전통에 따라, 손과 발을 씻거나 그릇을 씻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섯 개의 돌 항아리에 채워진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자, 연회장은 이전 포도주보다 더 좋은 포도주를 내어 놓았다고 칭찬합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10)
연회장의 칭찬은, 그저 좋은 내왔다 하는 칭찬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것 맛보지 못한 차원이 다른 술이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세계는, 눈으로만 보았던 지금까지의 세계하고는 전혀 다른 세상입니다.
예수님이 물을 변화시킨 포도주로 베푸신 혼인 잔치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새로운 나라가 시작되었으며, 이 새로운 나라에서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누리는 자가 누구일까요?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성도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잔치에서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반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인들도 표적을 보았고, 연회장과 하객들도 새 포도주를 맛보았지만, 이들은 표적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눈을 뜨고,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까? 예수로 보고 예수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잔치에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믿음으로 잔치에 참여하면, 우리가 비록 아직 이 땅을 살고 있지만, 천국에서나 맛 볼 수 있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에서 때로 고통이 찾아올지라도, 예수께서 이미 이루신 풍성한 기쁨의 나라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낼 수 있습니다.
종의 눈이 아니라 자유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죄에 현혹된 눈이 아니라 용서 받은 정결한 눈으로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눈으로만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성경이 보여주는 것으로 세상을 해석해내고 살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말씀으로 새 세계를 보고, 믿음으로 새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