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 것을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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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위에 것을 생각하라
본문: 골로새서 3:1-4
찬송:
제목: 위에 것을 생각하라
본문: 골로새서 3:1-4
찬송:
철학자 파스칼은 인생에 대해 정의하기를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생각하는 데에 인간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가 있다고 본 것 같습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생각하는 데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말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생각하는 자가 인간이요, 생각하지 않는 자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사람입니까? 체구가 크고 키가 크다고 해서 큰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큰 생각을 가진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품은 생각이 크고 원대하다면 외모야 어떻든지 간에 큰 사람입니다.
또 생각이 높고 깨끗한 사람이 귀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신분이 고귀하다고 해도 그 생각이 천하다면 그 사람은 천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파스칼의 정의는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그가 지닌 생각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몇 가지의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항상 실제를 생각하고 사실과 진리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진실한 사람입니다.
둘째로, 사람은 헛된 것을 생각합니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나, 지나가 버린 과거나,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셋째로, 생각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귀찮고 번거로운 마음에 아예 생각하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생각이 없다면 사람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네 번째로, 생각과 현실이 분리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생각은 생각대로, 몸은 몸대로 각각으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처럼 그 사람의 생각의 거점이 무엇인가에 따라 삶이 달라지고, 존재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인물이나 건강이나 또는 소유나 능력, 기능, 학벌 등을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마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에 속한 사람이냐 하는 소속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처음 사람을 만나게 되면 누구 집 자녀인가. 어느 가문의 손인가를 알려고 합니다.
저는 명함을 남에게 잘 주는 형이 못 됩니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 만나 인사를 하게 되면 자신의 명함을 전해주면서 인사를 합니다. 명함을 준다는 것은 자신이 어느 직장, 어느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사회적 소속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 소속이 자신을 사회적으로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생각하려는 것은 사회적 소속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소속을 말하고자 합니다. 정신적 소속의 거점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면 살고 있습니까? 내가 항상 그리는 고향은 어디입니까? 시간만 생기면 놀고자 하는 마음입니까? 또는 언제나 수입만을 생각하십니까? 또는 사람을 만나면서 이 사람이 나의 출세에 도움이 될까 안 될까를 계산해 보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생각이 무엇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까?
생각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원천적인 생각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속한 것입니다. 이것은 뿌리라고 할 수 있고,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항상 과거를 지향하는 생각이라고 한다면, 또 하나는 미래지향적인, 미래를 생각하는 생각의 거점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생각 가운데 내가 어디에 생각의 거점을 두고 있느냐에 따라 나의 인간됨이 결정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이에 관한 교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생각하라,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을 찾는 데에서 인간의 참 가치를 발견할 수 있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집에 비가 샙니다. 아버지가 높은 사다리를 받쳐놓고 지붕을 고치기 위해 올라갑니다. 지붕에 올라간 아버지는 본 어린 아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아버지에게 소리를 칩니다. “아버지, 저도 올라갈께요”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서 올라오도록 허락을 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사다리를 잘 붙잡고 위만 쳐다보고 올라오너라. 아래를 내려다보지 말아라. 다른 사람 보지 말고 아버지만 바라보고 올라오너라”라고 이릅니다. 이 아이가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중간쯤에서 문든 아래를 내려다보니 더럭 겁이 납니다. 다리가 휘청거리고 떨어질 것만 같아 불안합니다.
바로 그 때, 아버지는 또 소리를 지릅니다. “위를 보아라, 나를 쳐다보아라. 다른 것은 보지도, 생각지도 말아라.” 이렇게 하여 이 어린아이는 자기를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는 아버지만 쳐다보면서 끝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의 참 길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엣 것을 바라보고 그것만을 생각하면서 가라는 것입니다. 위엣 것을 바라보는 데에 길이 있고, 성도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위를 바라보십시다.
위엣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가 이미 죽었고”라고 말씀하듯이 우리의 옛 사람은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5절 이하의 말씀에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라고 가르칩니다.
땅에 있는 지체는 어떤 것들입니까?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용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하십니다. 이런 것들이 땅에 것들인데, 이에 대해서 “너희는 죽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뜻입니다. 관계가 끊어졌다는 말을 죽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죽었기 때문에 아무런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감각도 없고, 생각도 없고, 기대도 없습니다. 이것이 죽은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름을 가졌으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먹고 마시고, 욕심을 부리고, 쾌락을 추구한다면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땅의 것, 땅에 대해서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땅의 것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아주 무감각 합니다. 이것이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위엣 것’은 영원한 것, 미래적인 것, 하늘나라에 속한 것, 약속된 미래를 뜻합니다. 이것은 정신적이고 신령한 것만은 의미하지 않고, 미래적 생명의 현실성을 의미합니다. 죽음이 현실인 것처럼, 미래의 생명도 현실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죽음은 허상이 아닙니다. 미래에 있는 것이면서도 현재보다도 더 실제적이고 심각한 현실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돈이 있다 하여, 그 있는 것이 완전한 내 것입니까? (정주영 사망)
지금 높은 지위에 있다하여 그것이 영속합니까?(반기문 외교부 장관, 고영구 국정원 원장)
이것들은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죽는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세에 대한 문제, 하늘나라에 대한 문제가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닥치는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내세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현실에만 몰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내세의 문제는 절박하고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위엣 것을 생각하라”라고 오늘의 분문은 말씀합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땅에서 살지만, 우리의 생각과 목적과 뜻이 모두 위에 속한 것들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사랑도, 소망도 소원도, 자랑도, 기쁨도, 다 위에 있어야 합니다.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바라보고 위엣 것을 생각하되,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떠오를 때까지 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위엣 것을 계속 찾으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는 반드시 여러분을 맞아 주실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만나는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3절에 말씀합니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나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구속받은 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로서의 나, 그 아름다운 나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신비로운 내 생명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마치 약혼한 여자가 신랑을 생각하듯 그렇게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약혼한 여자는 신랑과 함께 지낼 생각으로 마음이 꽉 차 있습니다. 얼마 후에는 친정 부모를 떠나야 하지만, 그것 때문에 아쉬워 울고만 지낸다면 그런 답답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떠나야 할 세상을 바라보면서 아쉬워하고만 있다면 얼마나 답답한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약혼한 여인처럼 친정 부모를 떠나야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만날 신랑에 대한 기다림과 설렘으로 가슴 벅차하는 삶을 사는 것과 같이, 주님과 함께 하는 미래를 바라보고 기뻐하는 바로 그 순간, 거기에 우리 삶의 의미와 풍성함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18절에 보면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바울은 간증합니다. 그는 어려운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장차 자나날 영광을 생각했습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과 현재의 고난은 비교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현재의 고난을 이겨나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함께”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의미상으로는 네 번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고 했는데, 이 말은 과거와의 모든 관계가 끊어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생명을 말하는 것으로서 중생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진 현재적인 하늘의 생명을 말씀합니다.
또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는 미래의 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종합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한 내게 하나님의 생명이 담겨 있고, 장차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구하는 것, 우리의 생각하는 것이 항상 위에 속한 것이어야 합니다. 운동선수들이 그 많은 훈련을 쌓으면서 어느 순간을 생각합니까? 앞에 있는 영광, 앞에 놓은 골인지점을 생각하면서 참고 견디어 최후의 영광을 얻지 않습니까?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영광된 순간을 바라보고 그토록 많은 고통을 인내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위엣 것을 생각하면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어려움과 시련, 아픔과 괴로움을 참아내면 마침내 주님의 영광이 나의 영광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엣 것을 잊으라,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이 땅의 것을 버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땅은 하늘에 속한 것임을 분명히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땅의 문제가 땅에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농사는 땅에서 짓습니다. 흙을 갈아엎고 씨를 뿌립니다. 그런다고 싹이 나는 것입니까? 위에서 햇빛이 비치지 않는다면, 위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그 씨는 결코 싹을 틔울 수 없고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지 않습니까? 땅의 문제가 땅에서 해결되는 것입니까? 부부간에 다툼이 생깁니다. 이것이 땅의 문제로만 벌어진 일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웃간에 불화가 생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땅의 문제는 곧 하늘의 문제, 육의 문제는 곧, 영의 문제인 것입니다.
땅에 속한 문제는 하늘에 속한 문제입니다. 땅의 문제는 하늘에서 해결되는 것입니다. 명예도, 사랑도, 세상의 모든 문제들도 다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위엣 것을 찾아야 합니다. 땅을 사랑하는 자는 땅뿐 아니라 하늘도 잃어버립니다. 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 하늘을 생각하고, 하늘을 바라보는 자는 하늘 뿐 아니라 땅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사시면서 항상 하늘을 생각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5:3-10).”
예수님은 뜻을 하늘에 두고 사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늘을 얻으셨으며 땅도 얻으셨습니다.
여러분, 위엣 것을 찾으십시다. 위엣 것을 생각하십시다. 주님께서 나를 만나 주실 것입니다. 나의 나 됨의 실존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 영광 가운데 함께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