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쳇바퀴처럼 굴러간다 느낄 때 2024 0823 시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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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참조: 2023 0813 연합수련회-인생이 쳇바퀴처럼 굴러간다 느낄 때
시편 23:1–6 (NKRV)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인생이 쳇바퀴처럼 굴러간다 느낄 때,
여전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목하고 계심을 기억하라!
여전히 우리는 주님을 주목해야 함을 기억하라!

인트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좋아하는 말씀. 시편 23편. 히브리 시 문학적, 언어적 접근을 해보자. 원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확인해보자. 성경말씀의 문학적 분석은 학자들의 이야기처럼 들림. 그러나 말씀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작업. 특히 시편은 장르로 봤을 때 시 문학. 이야기식 문체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 번 읽고, 행간을 유추하고, 시인의 의도와 저작 배경 등 다양한 배경 지식을 공부하고 읽을 때 더 큰 감동이 있음. 그래서 다른 예화나 어떤 이의 경험과 간증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말씀이 되어야.

문학 작품 예시

님의 침묵. 한용운. 겉으로 보기엔 사랑 이야기. 이별을 당한 한 사람이 님을 그리워하는 모습. 이별이 슬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다시 다가올 만남에 대한 희망을 노래함. 그런데 그렇게만 해석할 수 있는가? 이 시의 저작년도는? 1926년. 한용운은? 1919년 3.1 운동을 계획하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인물. 한국의 시인이자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그의 시 <님의 침묵>. 대표적인 저항시로 알려져 있음. 님이 우리 조국, 일본에게 빼앗긴 나의 조국이라 생각하고 시를 읽으면 완전히 느낌이 달라짐.
또 하나. 내 인생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시와 드라마 등 작품들이 그냥 겉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볼 때보다 말하고자 하는 그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고 내 감정이 이입이 되면 훨씬 큰 감동이 있다. 위의 두 작품이 왜 인기가 있었는가? 내 이야기가 되기 때문. 우리 모두가 겪었던 나라 잃은 이별의 한이 있기 때문. 그리고 그 속에 누구나 품었던 희망의 끈을 시와 드라마 등으로 노래하고 있기 때문.

성경도 마찬가지. 내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오늘 시편23편의 말씀이 내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단순히 “주님이 목자가 되어주신단다, 내게 부족함이 없단다” 하고 끝나면 안 된다. 내 상황과 내 현실 속에 말씀이 적용돼야 한다. 위의 두 작품이 만들어졌던 시대적 배경, 문맥, context를 알고, 내그 내용이 깊어졌던 것 처럼. 오늘 시편23편을 함께 읽으며, 이 다윗의 고백이 내 고백이 되기를.

1절

[다윗의 시]
원문에서는 표제와 1절이 같이. 시편은 보통 표제까지 1절로 포함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다윗의 시라는 것을 알 수 있음.
시의 화자: 다윗
먼저, 이 당시의 다윗은 어땠는가? 질투심에 눈 먼 사울 왕이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던,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유대 광야를 도망쳐 다녔던 상황. 이것이 이 시편을 이해하는 첫번째 context이다. [다윗의 시]라는 표제는 단순히 다윗이 지었다. 다윗의 노래다라는 정보제공을 넘어서는 문맥적 상황이 있는 것.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히브리어 네 단어. 아도나이 로이 로 에흐싸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 유대인들 너무 거룩한 단어. 야훼라고 부르지 못함. 그래서 하쉠, 엘로힘 등 다른 말로. 보통은 아도나이. 나의 주님. 이름조차도 부를 수 없는 그 거룩한 분을 지금 나의 목자라고 표현. 우리는 이방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자로서 유대인들보다는 좀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 그러나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사실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오하고 거룩하며, 정말 말 그대로 두렵고 떨리는 존재.
그런데 다윗이 시를 통한 그의 고백에서 그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다. 라고 노래하는 것은 대단한 신앙고백임.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목자”라는 이미지로 비유함. 다윗은 목동이었기에 목자와 양의 관계를 잘 알았음. 어느 목사님이 하나님이 감독이고, 우리는 필드 위의 선수라고 표현. 골때녀를 많이 보니까 감정이입이 돼서 감독과 선수의 관계에 은혜를 받음. 마찬가지로 다윗도 자신이 목자로서 양을 케어하다보니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그렇게 비유하면서 은혜받은 것.
여기서 하나 더 히브리어 언어적 관점에서 묵상해볼 포인트는, 목자라는 단어가 성서 히브리어에서 “가까운 친구, 동반자, 동지”라는 단어와 어근을 공유함. 그 거룩한 존재를 나와 가까운 친구이자 동반자라는 뉘앙스를 가진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부분이 영어로는, I shall not want 나는 원하지 않을 것이다. 로 번역. 그러나 이것은 나는 욕망이 없이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로 잘못 해석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불교적 가르침에 더 가까움. 무소유. 그러나 한국어는 이 부분을 원어적 의미와 함께 기독교 신앙적으로 잘 번역했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들임. 그래서 우리의 감정 또한 본래는 좋은 것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질투, 분노, 욕망 등은 사실 하나님의 공의 안에서 거룩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것임. 그것이 죄 된 속성을 가진 우리가 남용하고 오용해서 문제가 되는 것임. 그래서 우리 안에 모든 감정을 충분히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기서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것은 바로 내 안의 욕망과 열정을 비롯한 온갖 감정들을 하나님 앞에 드려서 주님의 올바른 길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게 하는 것. 그래서 모든 욕망에서 자유로워져서 무소유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히브리어의 올바른 해석은 나는 부족함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임.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음. 그러나 어떤 것에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고백함.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러한 하나님임. 다윗도 그의 인생 가운데 수많은 위험에 처했음. 생명의 위협을 느꼈음. 때론 먹을 것과 물도 필요했음.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의 목자가 되시며, 그의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게 하심. 다윗은 하나님 한 분이면 된다는 비밀을 깨닫고 이렇게 노래한 것임. 그래서 무엇이라고 이어서 노래하는가?

2절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양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곳은 어디인가? 꼴을 먹을 수 있는 곳.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천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안전하게 쉴 수 있는 곳. 그곳에 도달하면 우리에게 무슨 부족함이 있겠는가? 주님은 우리를 바로 그렇게 인도하신다. 개역한글 푸른 초장. 이스라엘 푸른 초장 보고 싶나? (ppt 푸른초장 사진들+광야)
“누이시며”는 좀 부드러운 의역. 원래는 눕힌다. 눕게 만든다는 약간의 사역의 의미가 있음. 그러나 이것은 히브리어 문법상 필요한 형태이고, 그 뉘앙스는 오히려 목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귀한 장소로 초대하고 그곳에서 편히 쉴 수 있게 눕도록 초대한다는 것.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여기서 쉴만한 물 가라는 것은 단순히 저 유대 광야 가운데 오아시스를 찾았으니 쉴만한 곳이다!라는 의미보다 더 대조적 의미가 있다. 이것은 급하고 강한 물결과 반대로 잔잔하고 평온한 물 가를 의미한다. 한강. 물이 불어나면 세찬 물결이 일어남. 그곳으로 목자가 양을 인도하면 쉴만한 물 가가 아님. 오히려 해를 입을 수 있음. 그러나 목자는 우리를 잔잔하고 안전한 물 가로 인도해 우리가 진정으로 쉼을 얻게 하신다.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내 영혼은 단순히 내 영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내 몸과 혼과 영을 포함한 전 인격을 말한다. 즉 그냥 나. 목자 되신 주님의 인도함으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서는 우리의 육적인 영적인 모든 갈급함이 해결될 것이다. 우리의 갈급함의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가 예수의 은혜와 소망을 아는 자들이 왜 갈급함을 느끼는가? 그와의 관계가 친밀하지 못함에서 오는 것 아닌가? 우리는 그와의 관계 속에서 회복할 수 있다. 여기서 소생이라는 단어가 바로 그것이다. 히브리어로 슈브(שוב). 다시 되돌아 간다. 우리가 죄악으로, 곤경으로, 때로는 심적으로 육적으로 지쳐있을 때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목자로서 우리를 다시 우리가 내가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인도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느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다. 오직 주로 인해서만 만족할 수 있다. 주님만이 우리를 전인격적으로 소생시키신다. 회복시키신다.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이 바로 주님의 인도하심. 우리를 소생시키실 주님을 기대하라.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앞에서 소생시킨다는 단어가 되돌린다. 리턴. 다시 돌아오게. 그래서 현대 히브리어에서는 차 유턴. 이 단어로 표현. 우리 그렇지 않은가. 오늘 이렇게 은혜 받고 세상에 나가 다시 주님과 멀어진다. 그런데 주님은 다시 나를 되돌아 오게 하신다. 교회로. 은혜의 자리로. 오늘과 같은 수련회의 자리로. 기도의 자리로. 되돌리고 되돌리고. 돌리고 돌리고. 왜 이렇게 우리는 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걸까? 때로는 이것 때문에 정말 지치고 좌절될 때도 있다.
같은 문제와 어려움과 시험이 우리 삶에 다가올 때 우리는 왜 매번 이렇게 같은 일이 반복될까 같은 시험으로 넘어질까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에 다윗이 참 기가막힌 히브리어 단어로 표현했다.
의의 길. 마아갈레이 쩨덱크. 길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히브리어에서도 길이 여러 단어로 사용. 데렉, 크비쉬, 레호브. 대체적으로 데렉을 많이 씀. 그런데 여기서는 정말 특이하고 드문 표현을 씀. 마아갈. 어떤 의미? 아갈, 이굴, Circle 동그라미, 원. 길은 길인데 동그란 길. 그러면 로타리인가? 회전교차로? 비슷한 이미지. 그런데 한 가지가 다름.
바로 나선형 계단. 다윗은 자신의 인생길을 생각할 때, 왜 이렇게 고난과 역경이 반복되는 걸까 생각했을 것. 그의 유대 광야의 도피 생활이 1~2년으로 끝나지 않았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인생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고백할 때, 그 길을 바로 이러한 뱅글뱅글 돌아 올라가는 계단으로 표현. 자신의 삶의 패턴이 반복되고 여전히 제자린인 것 같지만, 주께서 이끄시는 그 길이 바로 의의 길. 쩨덱크. 공의, 정의, 정답의 길임을 확신하고, 나선형 계단처럼 나아가고 있음을 고백한 것.
삶의 패턴이 반복되는 것 같아 보여도,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다보면 어느 새 나는 이전보다는 높은 레벨로, 위치에 도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순히 직선적인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지만 조금씩 위로 성장하며 올라가는 길로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성장하기를, 의의 길로 나아가길 원하시면서 그러한 형태의 길로 인도하신다. 그래서 같은 문제를 만나도 더 성장하고 더 성숙한 모습으로 문제를 내려다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 인생이 왜이리 쳇바퀴 도는 것 같나, 왜 나는 같은 문제를 반복하는가, 그러한 생각으로 좌절하는가? 걱정하지 마라. 주님은 나를 당신의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계신다. 그리고 조금씩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하신다.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이 4절부터 기가 막힌 문학적 기법이 사용됨. 한글 번역에서는 이 뉘앙스가 잘 살지 않음. 바로 여기서부터 하나님을 3인칭에서 2인칭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는 것. 뒤의 지팡이와 막대기도 2인칭 소유격으로 받고 있음. 아까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어떠한 존재인지 말함. 그런 분을 당신이라고 부르고 있음.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23편을 하나의 문학, 시로서 분석한다면, 이 부분은 화자가 하나님을 더욱 더 가깝게 느끼고 있음을 표현. 그리고 우리가 당시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한다면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파워풀한 고백인가를 깨닫게 됨. 이전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하던 것이 직접적으로 당신이 나와 함께 있다라고 표현하면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대화하듯이 시를 써내려가고 있다. 3인칭으로 인식되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나와 대화할 수 있고, 나의 옆에서 나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도 이렇게 선포해야 함. 그가 나와 함께 하신다라고 표현하는게 아니라 직접적으로 하나님, 당신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주를 대면하여 이야기하듯이. 그리고 당신은 바로 나의 하나님, 나의 목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3인칭에서 2인칭에서 1인칭으로.
그래서 당신이 바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음. 우리는 절대 해를 입을 수 없는 존재가 된 것. 왜냐하면. 당신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지팡이와 막대기가 안위, 즉 몸을 편안하게 하고 마음을 위로하는 이미지인가? 보통 이미지는 그렇지 않음. 가르침과 교훈과 책망의 이미지가 강할 수 있다. 주의 쇠파이프와 야구 빠따로! 그러나 당시 목자의 모습으로 본다면 그 지팡이와 막대기는 양들을 보호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수단이다. 즉, 그 도구들이 있어야 양들은 목자를 따라 푸른 풀밭에 누울 수 있고, 쉴만한 물가에 갈 수 있는 것이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를 방종하지 않는다. 안전한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만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인도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그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겠다는 고백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면서(신이 피조물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신비!) 우리의 영혼을 극진히 돌보신다. 우리는 그가 우리를 지팡이와 막대기로 교훈하고 나무라며 바른 길로 오게끔 만든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여기에 하나님의 위대한 평안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여기 5절에서 비유의 이미지가 바뀜. 들판의 목자와 양의 이미지에서, 연회를 주관하는 주인과 손님의 이미지로. 요즘 비대면 배달. 문 앞에 배달. 주님이 우리에게 “저기 문 앞에 밀키트 갖다 놨으니까 먹어라잉”. 혹은 드라이브 스루로. 그렇지 않음. 주님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심. 우리를 대연회에 초대하심. 유대인들의 문화적으로 여기서 상이라는 단어의 표현은 제단을 의미하기도 함. 즉, 성소 안에 진설병이 있는 모습. 그곳은 어디인가? 주님을 만나는 곳.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연회에 초대하셨는데, 그런데 그 연회가 어디에서 벌어짐? 내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에서 주의 연회를 안전하게 먹고 마실 수 있음. 이로써 그의 축복과 보호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위험한 적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에게 우리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놓여있음을 보여줌.
즉 우리는 우리를 참소하고 좌절시키게 하는 어떠한 사람과 세력들 앞에서도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뜻임. 세상 속에 살지만, 그들과 구별된 자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 예를 들자면, 같은 어려운 상황이 왔어도, 예수 믿는 자들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안으로 그것들을 대한다. “주가 일하시네~” 찬양처럼. 주님이 일하실 것을 기대하는 것. 그것이 크리스천의 모습.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미지를 상상. 주의 연회에 초대되었다는 것은 어떤 집으로 들어갔다는 이미지. 그 공간에 VIP로 초대되어 들어갔더니 주인인 하나님께서 나를 극진히 환영하고 나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고 바깥에서 힘들었던 것, 고생했던 것 모두 위로하는 이미지. 그리고 그 환대와 축복이 자신의 잔, 즉 자신의 인생에 차고 넘치는 것을 깨닫는 것. 구약 세계에서 누군가의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상호 충성의 유대를 형성했으며 언약의 절정에 이르는 증거였다.
다시 말해서, 잔잔한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묘사되는 안식과 평안이, 대연회장에서 나를 주인공으로 한 큰 잔치로 묘사의 범위가 커졌다. 하나님은 나를 그렇게 주목하고 계신다.

6절

그런 우리가 이제 어떤 고백을 드려야 하는가?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는가?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선하심과 인자하심. 토브 바헤세드. 토브.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같은 단어. 주님이 보시기에 좋은 거면 얼마나 좋은걸까? 그래서 내 평생에 주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 나를 따라온다. 얼마나 큰 축복인가. 얼마나 큰 은혜인가? 얼마나 큰 확신인가. 인자하심은 헤세드. 번역하기 쉽지 않은 단어. 인자하심 자비하심 끊임없는 사랑 은혜 등등 모든 것을 포함. 근데 우리나라도 만만찮게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 있음. 한, 정. 나는 이것이라고 말하고 싶음. 이러한 감정들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다는 것은 도대체 하나님과 나 사이가 어떠한 관계란 말인가? 가족, 가족 같은 친구 사이. 정말 영혼을 공유하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 뭔가 거시기한. 그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관계. 하나님은 정말로 나와 끈적한/끈끈한/질척거리는(좋은 의미에서) 관계를 원하시는 것임. 그 하나님의 모든 돌보심이 내 평생에 반드시 나를 따른다.
그런데 단순히 나를 따라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히브리어 단어. 이르다포니. 라다프. 진짜 특이한 시적 허용의 표현. 실제로 토브와 헤세드가 이 단어와 함께 쓰인 곳이 성경에서 이 구절이 유일함. 의미는 chase, 쫓다. 경찰이 도둑을 쫓는 듯한 모습. 적을 쫓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어느 때든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주의 토브와 헤세드가 미친듯이 우리를 쫓아오고 추격하고 찾아낼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를 추격할 것임. 축복을 받기 싫어서 숨어도 반드시 우리를 쫓아와서 찾아낼 것이다. 도망치지 마라. 숨지 마라. 함께 합시다. 우리는! 하나님한테! 찍혔습니다!
그래서 그러니까 결론!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할렐루야! 아직 끝나지 않음. (ㅎ) ~
수지 고백. 교회가 내 집보다 편안함. 근데 나도 그랬음. 안정감을 누리는 곳. 이스라엘에서 한국에 왔는데, 사택이 교회 안에 있다고 함. 정말 좋았음. 어렸을 때, 교회 식당 안쪽이 사택이었음. 예수님이 어렸을 때, 예루살렘에서 부모님이 예수님을 잃어버린 줄 알고 막 찾았는데, 성전에 있었음. 어디 있었냐니깐,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 몰랐냐고 되물음. ㅎ. 나도 써먹어본 적 있음 ㅎ
살리로다 이 단어 3절에 나왔던 단어, 슈브 return 돌아간다의 의미. 이 동사 이어서 나오는 여호와의 집에랑 붙어서 쓰인 게 전체 성경에서 이 구절이 유일함. 보통은 이 단어와 비슷한 야샤브 앉다 살다라는 단어로 봐야 하지 않냐는 편집적인 제안이 있음. 그러면 여호와의 집에 살겠다라는 일반적인 문장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음. 그런데 원문 그대로의 해석이 더 깊은 묵상을 주는 것 같음.
먼저 여호와의 집이라는 단어의 전치사가 베가 쓰임. 레가 아님. 돌아가는 거니까 (~으로)라고 써야 될 것 같음. 그런데 여기서는 베가 쓰임. 베는 (~안에) 장소가 가진 더 깊은 의미를 표현. 레는 목적지로서의 장소, 방향성이 강조된다면, 베는 그 장소가 가진 영적인 의미, 바로 그곳 안에서 얻어지는 유익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음. 우리 한글로는 (장소)에 하면 방향성이나, 장소 그 자체나 둘 다 의미.
그렇다면, 다윗은 여기서 슈브 다시 돌아간다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 시를 쓰는 자신의 배경, 상황을 반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음. 무슨 배경이냐. 즉 여호와의 집. 성소.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영적인 유익에서부터 떨어져 나갔음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 그렇지 않은가? 광야를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돌아다니는데. 그런데 그곳에서 하나님이 나의 목자되심과 나의 길을 나선형의 계단처럼 인도하심과 그리고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신을 쫓아올 것이라는 은혜를 깨달으니, 다시 그 영적인 유익을 누릴 수 있는 그 곳,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돌아가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그곳, 주님과 깊은 교제가 이뤄지는 바로 그곳에 가야만 한다.
시편23편의 해석이 끝났다. 문학적으로 심도있게 깊이 있게 이해해 본 시편23편이 어떠한가? 단순히 아름다운 시, 단순히 나를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것보다 더 깊이 있는 묵상이 되지 않는가? 이것이 이제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어떤 부분, 어떤 구절, 어떤 해석이 자신의 현재의 상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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