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이 앉은 왕의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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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서론]
반지의 제왕을 아십니까?
원래 J.R.R 톨킨의 소설인데 영화로 나와 참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작품입니다.
반지의 제왕을 보면 절대 반지가 등장합니다.
그 반지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습니다.
“모든 반지를 지배하고 찾아내며, 모든 반지를 불러모아 암흑에 가두는 하나의 반지.”
이 작품에서 절대반지는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을 가질수 있는 절대적인 힘에 대한 인간의 집착입니다.
그 반지를 만든 인물은 악한 마법사 사우론입니다.
그는 그 반지로 온 세상을 가지려고 한 것입니다.
톨킨이 이러한 절대반지를 탄생시킨 배경은 이와 같습니다.
그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습니다.
거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런 전쟁의 참혹함을 통해 인간이 가진 욕망의 추악한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 욕망을 투영하여 만든 존재가 바로 절대반지입니다.
인간은 모두 절대반지를 갖고자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세상을 통제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고 싶은 집착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이 가진 죄의 본질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내 삶의 주인, 세상의 주인’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러다가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 죄는 여전히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죄에 대해 잘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너무 가볍게 다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매주 주일날 회개의 기도를 드리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나의 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습니다.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나의 죄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잊어버립니다.
오늘 우리는 죄가 우리의 삶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보려 합니다.
[본론]
예레미야 52장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예레미야서는 46장부터 51장까지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을 다룹니다.
그렇게 끝나도 별 문제가 없을거 같습니다.
그런데 52장이 하나 더 있습니다.
52장의 내용은 예루살렘 성전이 붕괴되고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만약 52장이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우리는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성취된 것인지 알수 없습니다.
물론 39장에서 예루살렘이 함락된 장면이 간단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더 자세한 내용은 52장에 등장합니다.
52장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뤄진 것인지 확인할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52장이 기록된 주된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이제 유다가 어떻게 비참하게 멸망했는지 보겠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약 1년 6개월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합니다.
그들은 이 기간동안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끊어 버립니다.
이로인해 성은 기근에 시달렸습니다.
결국 식량도 모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오랜 굶주림과 갈증에 고통스러워 합니다.
결국 배고픔을 견디다못해 자식까지 잡아먹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그곳이 얼마나 처절한 생지옥이었을지 감히 상상이 안됩니다.
바벨론은 계속해서 예루살렘을 공격합니다.
성 밖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어 예루살렘을 공격합니다.
예루살렘이 아무리 천연의 요새지만 이 공격만큼은 견뎌내지 못합니다.
성문이 뚫린 것입니다.
그러자 패배를 직감한 시드기야 왕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도망칩니다.
왕이 자기만 살겠다고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시드기야는 붙잡히고 맙니다.
왕이 붙잡히자 왕을 호위하던 군사들은 어떻게 할까요?
왕을 버려두고 도망칩니다.
왕이 백성을 버리자 군사들도 왕을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붙잡힌 시드기야왕은 바벨론 왕 앞에 끌려갑니다.
그는 신하들의 처형장면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들의 처형장면까지 두 눈으로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나자 바벨론 왕은 잔인하게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아버립니다.
그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두 눈으로 본 장면이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장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왕은 그를 쇠사슬로 묶어 바벨론에 포로로 끌고갑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러나 유다의 비참한 상황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바벨론 왕은 돌아갑니다.
대신 자신의 신하인 느부사라단을 보냅니다.
12절입니다.
첫마디에 시드기야 통치 몇년이라고 적혀있지 않습니다.
대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통치 몇년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유다가 이제 바벨론에 완전히 점령당해 주권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나라도 일제시대에 이런 비참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느부사라단은 성전과 왕궁같이 큰 건물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립니다.
예루살렘 성벽도 모두 헐어버립니다.
천연의 요새였던 도시가 이제는 누구에게도 보호받을수 없는 무방비 도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백성들도 포로로 잡아갑니다.
1차, 2차, 3차에 걸쳐 끌려갑니다.
30절은 그 합계가 총 4600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여자들과 아이들을 제외하고 장정숫자만 계수한 것입니다.
실제로는 수만명이 포로로 끌려간 것입니다.
목과 발에 차꼬를 차고 아빠, 엄마, 자녀들이 끌려가는 것입니다.
자유를 누리던 사람들이 이제 자유를 잃고 이방인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그곳에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일부 남겨둡니다.
그들이 그 땅에서 농사를 짓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낮고, 그들을 통해 조공도 얻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39장에도 나온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17절부터는 이곳에만 나오는 내용들이 등장합니다.
먼저 반복해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모두 가져가다’입니다.
바벨론은 가져가고, 가져가고 다 가져가 버립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 기구들을 모두 빼앗아 간 것입니다.
금과 은으로 된 것들도 모두 가져갑니다.
심지어 그것보다 값이 덜나가는 놋쇠 기구들까지 모두 가져갑니다.
이로써 27장에서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내용들이 모두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뿐입니까?
24-27절을 보십시오.
나라의 지도자들이 모두 바벨론에 끌려가 처형당합니다.
그 중에는 성전을 섬기던 제사장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이제 성전은 끝장났다는 말입니다.
더이상 예배를 드릴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럼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비참하게 만들었을까요?
바로 죄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끊임없이 우상숭배하고 끊임없이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수없이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죄의 유혹이 너무나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의 결과가 어떻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놓습니다.
인생에 쓰디쓴 맛을 보게 합니다.
고통과 죽음이 찾아옵니다.
포로로 끌려가는 유다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비참한 상태를 보십시오.
죄는 결국 우리를 영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파괴합니다.
사탄의 노예로 살다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죄는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죄는 지칠줄 모르는 바벨론과 같습니다.
가정도 파괴하고, 직장도 파괴하고, 사회도 파괴합니다.
심지어 교회도 파괴합니다.
죄에 빠진 목회자가 교회를 망가뜨려 놓는 사례가 얼마나 많습니까?
성도들 사이에 생긴 미움과 갈등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망가뜨리는 사례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습니다.
죄를 가볍게 무시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최종 결과가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죽이지 않으면 결국 죄가 우리를 죽일 것입니다.
그럼 유다 백성들은 처음부터 죄에 대해 이토록 무감각했을까요?
아닙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죄에 무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온탕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엄청 뜨겁게 느끼지만 좀 시간이 지나면 미지근하게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똑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다보니 어느 순간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기 스스로 죄를 합리화를 하게 됩니다.
유다백성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여러가지 제사를 통해 자신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수 있었습니다.
종교적 행위를 죄에 대한 해독제로 여긴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원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백성들이 제사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죄를 깨닫기 원하셨습니다.
죄를 깨닫고 다시는 그러한 죄를 짓지 않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은 제사행위를 자신들의 죄책감을 덜어내는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착각을 합니다.
예배, 말씀, 기도와 같은 종교행위를 죄에 대한 해독제로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느 순간 죄를 짓게하는 면죄부처럼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나는 꾸준히 예배드리니 괜찮아’
‘나는 말씀과 기도하니까 괜찮아’
‘나는 교회에서 봉사하니까 괜찮아’
뭐가 괜찮은가요?
스스로 그렇게 믿는 것일뿐 전혀 괜찮치 않습니다.
점점 양심은 굳어가고, 영혼은 메말라가는데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종교행위를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죄를 가리고, 죄책감을 덜어내라고 주신게 아닙니다.
이런 행위들을 통해 죄를 깨닫고 진정으로 회개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더이상 그러한 죄를 짓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것입니다.
죄가 짓지 않겠다고 결심한다고 죄를 짓지 않던가요?
한가지 죄를 이겨냈다 싶으면 또다른 죄가 우리를 괴롭히지 않습니까?
한가지를 죄를 이겨냈다 싶다가도 좀 지나면 또 똑같은 죄에 넘어지지 않습니까?
죄에 절망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여기에 해결책이 있습니다.
죄에 대한 절망을 경험한 사람만이 살길이 있습니다.
죄에 절망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31절부터 나오는 예레미야서의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오.
절망적인 어둠 속에서 작은 빛이 비추기 시작합니다.
37년동안 포로로 잡혀갔던 여호야긴왕이 사면되어 감옥에서 풀려납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33절입니다.
여호야긴 왕은 죄수복을 벗고 바벨론 왕과 함께 식사하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생계비도 지급받게 됩니다.
그것도 죽을때까지 말입니다.
하나님이 자격이 없는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회복을 약속했던 예레미야의 예언이 이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이를 통해 실낫같은 회복의 소망을 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완전히 포기하신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자격이 없는 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죄인의 운명은 하나님의 심판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받을 심판을 아들에게 돌리셨습니다.
십자가는 재앙과 심판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받을 심판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몸이 갈기갈기 찢겨 모든 고통과 죽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이로인해 우리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생명의 길이 열렸습니다.
죄로 절망하는 우리에게 왕의 식탁에 앉을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매주 하는 성찬식이 그 식탁의 자리입니다.
자격없는 우리에게 구원과 회복의 식탁을 차려주십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처음 말씀드렸던 반지의 제왕에 보면 유명한 캐릭터가 있습니다.
바로 골룸입니다.
골룸은 반지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자입니다.
반지는 그의 외모도 성격도 모두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결국 반지와 함께 불구덩이에 빠져 멸망하고 맙니다.
우리의 영혼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아도 내 영혼이 지금 일그러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내가 점점 골룸처럼 변해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영혼은 점점 깊이 곪아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내 영혼상태를 비춰달라고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내 영혼의 속살을 파고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죄는 겉을 잠시 잘라봤자 다시 자라 우리를 괴롭히는 내성발톱과 같습니다.
내가 하는 종교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속이지 마십시오.
진정으로 회개가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종교행위에 속지 않으십니다.
아직 씻지도 않은 더러운 손으로 하나님의 손을 잡을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묵상하는 만큼 내 죄를 묵상해야 합니다.
내 영혼의 상태를 진단해봐야 합니다.
그래서 해결되지 않는 나의 죄에 절망해봐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저와 우리 다카포 성도들 모두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