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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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1:1–2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요나 1:1–6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I. 말씀을 향하여 하는 일 마다 실패에 실패를 겪고 있던 허 아무개씨 그 마을에 이름 잘 짓기로 소문난 작명가를 찾아갔습니다. 자초지종을 고백하고 이름을 바꾸었으면 한다고 얘기했지요. 이름 석자 박힌 명함을 받아들더니 “이 이름 가지고는 거지 팔자야! 이 이름 가지고 되는 일이 없지.” 그리고 이름을 슥슥 지어 주었습니다. “이건 철학이야. 이제는 만사형통일게야. 가서 뭐든지 해봐.” 싱글벙글 허 아무개씨 와서 명함을 바꾸어 찍었습니다. 그동안 해 보고 싶은 일들을 계획했습니다. 그럴 듯하게 사업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이전보다 하던 일이 더 안되는 겁니다. 계획했던 일들이 아무 소용이 없었고 시작했던 사업은 무너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면 괜찮겠거니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났는데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 빈털털이가 되었습니다. 다시 3년전 그 작명가를 찾아갔습니다. 명함을 내밀었더니 3년전과 똑같은 얘기를 합니다. “이 이름 가지고는 쪽박이야. 이 이름 가지고 되는 일이 없을 게야. 이름 바꿔.” 화가난 허 아무개씨 작명가의 멱살을 붙들고 흔들었습니다. “야 이놈아! 이 이름 3년전 백만원받고 네가 지어준 이름이야. 이 이름가지고 사업시작하고 계획했다가 쫄딱 망했어.” 그러고는 두둘겨 패기 시작했습니다. 홧김에 방문을 걷어차고 나오는데 뒤에서 작명가란 양반은 그런 얘기를 하더랍니다. “이름이 중요한게 아니고 이름 값하고 사는게 중요하우.” 이 땅에 이름 값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서 이름 값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유익”이라는 이름을 가진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인의 재물을 탈취해서 도망가는 무익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성경의 순결, 깨끗하다는 이름을 가진 삭개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순결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조롱거리 삶을 살아갔습니다. 우리는 성도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우리의 삶은 거룩하지 못하고 신자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믿음없는 삶을 살 때가 하루 이틀이었습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걸맞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못된 한 인생이 나옵니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가 있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역사 또 하나의 시작」내일 아침부터 우리는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지게 되는데 매일 아침 요나서를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그 서론 「잠에서 깨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아밋대 - 아멘, 진실이라는 뜻입니다. 이 진실하다는 사람의 집에 아들이 한명 태어났는데 그 아들의 이름을 요나 - 비둘기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한 마리 비둘기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순종하여 이 땅 구석구석 주님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영광스러운 아들을 기대했던 아버지의 열망이 “요나”라는 이름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요나가 이 아름다운 이름에 걸맞게 살지 못했다고 하는 데에 있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바로 그 요나의 모습은 그 옛날 선지자의 이름이기 이전에 바로 요 나의 모습이라고 하는 데에 있습니다. 요나의 불순종은 나의 불순종이었고 요나가 사명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그 모습은 바로 나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교회의 모습이요. 한국교회의 모습이요.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요나는 잠을 자야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잠에서 깨어 외쳐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는 잠들어 있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깨어 일어나 외쳐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는 세상에 신음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아파 신음하는 세상에 고통의 소리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신구약 성경은 사람 찾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나를 부르는 하나님의 소리로 가득차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나무그늘 밑에 숨은 아담을 부르십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네가 있어야 할 자리는 그 자리가 아니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기 위해 채찍 휘두르며 다메섹 도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사울을 부르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부활하신 주님 마르다를 부르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주님 만나고 싶어서 엉금엉금 기어서 뽕나무에 올라갔던 삭개오의 마음을 굽어살피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너의 마음을 내가 알고 있느니라. 너의 고독을 내가 알고 있느니라. 너의 외로움을 내가 알고 있느니라. 냄새를 풍기며 무덤속에 갇혀있던 나사로를 부르십니다. “나사로야 나오거라.” 죽음의 자리에서 병든 자리에서 신음하는 성도들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요나가 받은 명령이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1절은 그렇게 문을 열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주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온 인류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민족은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백성은 살아있는 백성입니다. 그 말씀의 내용이 2절에 펼쳐지는데 세 가지 동사로 요약이 되어지고 있습니다. ① 일어나라 ② 가라 ③ 쳐서 외치라 첫째, 일어나라고 명령했습니다. 일어나라는 명령을 듣고 요나는 배 밑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순종이요 망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얘기하기를 유교는 엎드리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엎드리는 문화입니다. 불교는 앉아있는 문화, 좌상의 문화입니다. 은진미륵 정도를 제외하고 나면 우리 절간에 찾아가면 부처는 앉아 있습니다. 좌상의 문화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일어나는 문화입니다. 입상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쳐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피묻은 손으로 못자국 난 손으로 네 마음 문 닫고는 은혜를 받을 수가 없느니라. 네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느니라. 우리 예수님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양을 찾아 다니시는데 서서 다니십니다. 뛰어다니십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죽을 때만은 누워서 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만큼은 서서 십자가에 매달려 서신 채 돌아가셨습니다. 이 땅에 모든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는 땅 속에 편안히 누워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땅 속에 누워 계시지 아니하고 무덤 문을 열고 일어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요 입상의 종교요 일어나는 종교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합니다.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 문이 열려지더니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침대에 누워 계시지 않았습니다. 안락의자에 앉아 계시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제자가 피를 흘리고 있는 그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어 보좌 우편에 서서 계셨습니다. 이 땅에 고난받는 성도, 환난당하는 성도를 차마 그대로 지켜볼 수 없어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서 우리에게 용기를 더하여 주십니다. 우리를 위로하여 주십니다. 우리에게 권능을 내려 주십니다. 지금도 우리가 예비할 때에 하나님 보좌에 서서 우리를 내려다 보시고 지켜보고 기뻐하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기독교는 누워 절망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누워 앉아서 구경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게으름에 뒹구는 종교는 더더욱 아닙니다. 죄의 자리를 털고 있어 나는 종교입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종교입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종교입니다. 질병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종교입니다. 사명을 향하여 소명을 향하여 일어나는 종교입니다. 이 시간에 행여 불신앙의 자리에 앉아 계신 분 계십니까?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무관심의 자리에서 팔짱끼고 구경하듯이 신앙생활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나밖에 모르던 이기심의 자리에 앉아 계신 분이 계십니까?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사명을 손에 붙들고 일어나십시오. 영혼의 깊은 잠을 청하고 계신 분 계십니까? 냄새나는 죄악의 자리를 거닐고 계시는 분 계십니까? 툴툴 털고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명령은 가라는 명령입니다. 니느웨로 가라고 했습니다. 죄악의 도성으로 가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요나는 다시스로 가려 했습니다. 교회는 두 가지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는 모이는 교회가 있고 흩어지는 교회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흩어져 있다가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세상에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생명을 걸고 성전에 모이는 시간을 지켰습니다. 예배 시간을 위해서 순교를 각오하고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뿐만 아니고 저들은 가정으로 흩어졌습니다. 직장으로 흩어졌습니다. 작은 공동체가 흩어져 모였습니다. 세상을 전도했습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두 개의 구조가 잘 조화를 이루는 것이 교회의 능력입니다. 모이는 교회가 있을 뿐만 아니고 흩어지는 교회가 있습니다. 미국 이스트 할렘가에서 목회를 하는 혹켄케이크라는 사람이 쓴 책 가운데 「The church in side out」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흩어지는 교회” 그렇게 번역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안쪽이 바깥쪽으로 바뀌어 진다는 말입니다. 교회와서 받은 은혜가 뒤집어 져서 세상에 나누는 것입니다. 뒤집어 지는 교회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받은 능력이 복음을 전하는 현장으로 뒤집어 져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은혜가 가정의 행복으로 뒤집어 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 성령충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뒤집어 질 때에 거기에 참된 교회가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밀림에 삐릭 삐릭 소리를 내는 집바귀라는 한 마리의 풀벌레가 어느날 사자에게 내기를 청했습니다. “사자 임금님, 임금님의 목소리하고 내 목소리하고 누구의 목소리가 더 멀리 퍼지나 내기를 합시다.” 사자가 가소롭기 짝이 없어 콧방귀도 뀌지 않습니다. 집바귀가 하도 보채니까 “그럼 한번 하자.” 사자가 으르렁대며 쩌렁 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작은 풀벌레 집바귀도 삐릭 삐릭 소리를 냈습니다. 누구의 소리가 더 멀리 갔을까? 언덕 위에 올라가 달려가는 토끼를 세워놓고 물었습니다. “사자 소리 들었느냐구.” “잘 들었다구.” “집바귀 소리 들리느냐구.” “집바귀 소리 잘 들었다구.” 골짜기 하나를 지나 또 언덕 위에 올라가 나무위에 매달려있는 다람쥐에게 물었습니다. “사자 소리 들었느냐구.” “글쎄 사자 소리 들린 것 같기도 하고 안들린 것 같기도 하구.” “집바귀 소리 들었냐구.” “집바귀 소리 잘 들었다구.” 또 골짜기 지나 언덕 몇 개를 넘어 물었습니다. “사자 소리 들었냐구.” “못들었다구.” “집바귀 소리 들었느냐구.” “아 지금 삐릭 삐릭 울지 않았느냐구.” 한 마리 사자가 울면 다른 사자는 다 숨을 죽입니다. 그러나 집바귀란 놈은 한 마리가 울면 그 소리를 들었던 다른 집바귀가 울기 시작합니다. 이쪽 나무에서 집바귀가 울면 저쪽 나무에서 집바귀가 웁니다. 골짜기에서 집바귀 소리를 듣고 언덕위에 집바귀가 웁니다. 또 저 너머 골짜기에 집바귀가 웁니다. 순식간에 아프리카 밀림은 집바귀 소리로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한국교회 안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을 통하여 많은 영광을 거두셨습니다. 영광스러운 찬양을 통하여 영광스러운 예배를 통하여 몰려오는 한국교회에 수많은 영혼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거두셨습니다. 그러나 이 안에 영광이 이 벽을 뚫고 세상으로 외쳐지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이 달라지지 않은 것입니다. 성도는 늘어났는데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여기서 들었던 말씀이 집바귀처럼 우리가 울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받았던 은혜가 영광이 우리 가정과 세상속에 우리 직장속에 우리 학교속에 나누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은 여전히 썩어가고 있고 변화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 이 땅에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나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라! 죄악의 도성으로 가라. 썩어 냄새나는 멸망의 도성으로 가라. 기독교는 적극적인 종교입니다. 가는 종교입니다. 능동적인 종교입니다. 전진하는 종교입니다. 진취의 종교입니다. 창조의 종교입니다. 웅크리고 앉아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세 번째 쳐서 외치라고 말씀했습니다. 잠든 영혼을 깨우고 죽은 영혼을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자장가를 부르지 말고 크게 나팔을 불라.. 그런데 여기서 그냥 외치지 말고 쳐서 외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원문에 쳐서라는 말은 가로막고 반대편에서 거슬러 그런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멸망의 길로 향하여 치닫고 있습니다. 그 앞길 가로막고 외치라는 것입니다. 이 길로 가면 망합니다. 거슬러 외치라는 얘기입니다. 썩은 물결이 굽이치며 내려갈 때에 역사를 거슬러서 복음의 뜻을 외치라는 것입니다. 박수가 없어도 갈채가 없어도 때로는 조롱을 받아도 비웃음을 받아도 외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자장가를 부르는 일이 아닙니다. 잠든 영혼을 깨우는 나팔이 되고 죽은 심령을 살리는 외침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복음적인 설교를 해야되겠다 생각하고 또 복음적인 설교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끔은 하나님께서 쳐서 외치라고 내게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예언적인 설교를 강력하게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교인들에게 평안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선포합니다만은 가끔은 잠들은 영혼을 깨우는 설교, 죄악에 신음하는 성도를 쳐서 책망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가끔 내가 하나님 앞에 순종 할 것인가? 오늘도 상처받아서 외로워서 울며 나오는 성도들을 위로하는 설교를 해야 될 것인가? 하나님의 음성과 사람의 소리 가운데 갈등을 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나팔을 불어 제킵니다. 쳐서 깨우는 소리를 합니다. 그때마다 교인들이 아파합니다. 그 설교가 교인의 가슴에 부딪쳐서 되돌아 옵니다. 그것을 수용하지 못해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우리 무수한 교인들의 가슴속에서 피가 나오는 설교를 접할 때면 얼마나 외로운지 모릅니다. 설교가로서 얼마나 고독에 겨운지 모릅니다. 아무런 아픔도 도전도 없는 단지 당신을 위로해주고 축복해 주는 선포하는 설교만을 좋아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내 잠을 깨우는 메시지가 없다면 교회가 자장가와 거짓된 평안만을 선포한다면 그건 필시 하나님의 교회는 아닐 것입니다. 지옥으로 인도하는 파멸의 공동체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일어나라. 가라. 쳐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요나는 어떻게 했습니까? 3절에 그 응답이 나옵니다. “그러나”라는 말로 3절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 “그러나”라고 시작하는 시작의 첫 마디는 역적이라고 우리가 국어시간에 배웠습니다. 역적이라고 하는 얘기는 앞에 있는 얘기를 뒤집는 얘기입니다. 앞에 있는 모든 내용을 반대하는 내용입니다. 앞에 있는 모든 내용을 거부하는 내용입니다. 3절은 “그러나”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요나의 비극이 있고 오늘 우리의 불행이 있습니다. “그러나”라는 단어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반역할 때 항상 쓰는 단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순종하고 싶지만 형편이 형편이라서. “그러나”는 불행입니다. “그러나”는 유혹입니다. 주일마다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 그러나라고 응답하면 나는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펼칠 때마다 찬송할 때마다 엎드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을 들려주실 때마다 그러나 양심적인 삶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 그러나 세상이 양심대로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성결과 거룩을 요구하는 성령의 음성 앞에 썩어 문들어져 가는 세상 앞에 살아가려고 하면 그렇게 살아갈 수 없는 것이지요. 정도를 원하는 하나님의 분부 앞에 그러나 이 세상 어찌 타협없이 살 수 있습니까. 이 불순종이 오늘 우리의 모습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요나가 불순종은 바로 요, 나의 불순종이 아니었느냐 하는 얘기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러나”는 조건부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니느웨만은 안됩니다. 깨끗하고 진실한 순종이 아니면 순종일 수 없는 게지요. 일찍이 요나는 악독한 도성 니느웨는 회개할 필요도 없이 망해도 싸다는 도시였습니다. 요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니느웨 성이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악의 도성, 그건 망해도 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니느웨 성을 향하여 외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를 선언합니다. 용서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러나 내게 결정적인 상처를 주고 떠난 그 사람, 내게 배신의 칼을 뽑고 떠나간 그 사람, 나를 무시하고 내 자존심을 짓밟아 버린 그 사람, 그 사람만큼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부분적인 순종은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을 요구합니다. 다른 건 다 드리지만 하나님 내겐 시간을 낼 수 없어요. 하나님 내가 바빠서 죽겠어요. 내가 너를 쳐서 이제는 남은 건 시간 밖에 없다고 할만큼 편안히 침실에 누워있게 하랴. 하나님 시간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은 드릴 수가 없습니다. 가진 게 없습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다른 건 다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는 못합니다. 하나님 다른 건 다 합니다. 새벽기도는 죽어도 일어나지 못합니다. 새벽체질이 아닙니다. 부분적인 순종은 순종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 번째의 불행을 3절은 그렇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도망가려 했다. “내려가려 했더니” 그 길은 도망가는 길이요 내려가는 길이었다고 말합니다. 여기 내려갔다는 얘기는 단순히 지리적인 뜻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두더지처럼 내려가는 삶이 아니고 독수리처럼 올라가는 삶입니다. 요나는 욥바로 내려갔고 배밑에까지 내려갔다가 망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러나”의 길은 낭비한 길이지 절대로 행복의 길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불순종의 길은 망하는 길이지 절대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무엇을 낭비했습니까? 배 삯을 지불했습니다. 돈을 낭비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 앞에 돌아와 꼬꾸러졌습니다. 순종했습니다.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사명을 낭비했습니다. 인생을 낭비했습니다. 불순종의 길은 낭비하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면 내려갑니다. 사업이 안되고 직장생활이 어려워지고 몸과 마음이 병들고 있습니까? 재난과 불행이 겹치고 있습니까? 선을 행하다가 당하는 고난이라면 필시 연단입니다. 때를 기다리십시오. 주께서 반드시 채워 주실 것입니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승전가를 부르도록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다가 당하는 일이라면 돌아오십시오. 지금 돌아오십시오. 속히 돌아오십시오.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십시오. 3절에서 우리를 주목시키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마침”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내려가는데 유혹에 마침 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원하는대로 욕망대로 길이 열렸다고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타락의 길에도 준비된 배는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걸어가는 길에도 잘못된 욕망을 안고 살아가는 길에도 하나님의 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침 내 앞에 배가 준비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길은 나를 영원히 멸망의 길로 인도하려고 준비된 배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계속 읽어내려가다 보면 17절에 “이미 물고기를 준비했다.” 그렇게 마침이란 단어에 대해서 하나님이 대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침 길이 열려서 그 길을 달려갔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이미 큰 물고기들을 준비하고 입벌리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마침에 대해서 이미 물고기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요나서를 공부할 때에 만약에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도망갔다. 배를 탔다. 요 자리에서 요나의 인생을 문닫았다고 할지라도 요나의 인생이 1절 2절 3절에서 마감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있을까? 요나의 인생이 여기서 끝장났다고 마감되었다고 할지라도 할 말없는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허락해 주십니다. 요나를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요나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통하여 니느웨성을 회개시킬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에게 그 기회를 주지 아니하고 다시 요나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당신의 가족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당신의 이웃들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그 소중한 일들을 감당함에 있어서 그 연약한 성도들과 이웃들을 격려하는 일에 있어서 내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얼마든지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순종하지 않을 때 다시 기회를 주시고 또 기회를 주시고 또 들어서 이 시간에 나를 쓰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니라도 하나님은 이 도시를 얼마든지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교회를 통하여 바로 이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민족이 아니더라도 세계를 얼마든지 하나님이 구원하기를 원하고 또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통하여 더 큰 역사를 감당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 점에서 풍랑도 축복이었습니다. 대풍도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거친 파도소리는 요나를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이 시간 풍랑 만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오신 분 계십니까? 이 시간 내가 탄 배가 깨지는 고통으로 나오신 분 계십니까? 그것을 통해 당신을 진정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사랑의 음성입니다. 보십시오.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해 보려고 했습니다. 엉뚱한 곳으로 도망해 보려고 했습니다. 다시스로 가려고 안락의 길을 선택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의 이 세 가지 시도는 모두 낭패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달려가면 하나님이 앞에서 길을 막습니다. 뒤에서 당깁니다. 수많은 풍랑이 옆에서 나를 찌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가면 하나님이 앞장 서 길을 열어 주십니다. 내 곁에서 나와 동행해 주십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의 보증이 되어 주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피하여 도망가는 길은 낭패의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 붙들고 순종하여 가는 길은 승리의 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 피해 도망가기 위해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옵니다. 지중해엔 언제나 있었던 바람이니 그냥 그러다가 그치겠지 바람이 살랑살랑 불으니 시원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을 겝니다. 이것 봐라 바람이 세어집니다. 그럴 수 있지. 어제 오늘 있었던 일도 아니고 가끔 있을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이게 왠일입니까? 먹장 구름이 몰려옵니다. 대풍이 일어납니다. 배가 금방이라도 뒤집혀 질 듯 깨질 듯 요동을 칩니다. 조그만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늘 있던 인생의 어려움 아니겠는가? 그런데 바람이 점점 거세어 집니다. 여러분 죽도록 맞고 새벽에 얻어터진 다음에 돌아오지 말고 산들바람 불 때 주님 앞에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먹장구름 만나 만신창이가 된 다음에 돌아오지 말고 산들바람 불 때 주님 앞에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풍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선 요나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당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금도 지켜보고 계십니다. 요나를 포기하지 아니하는 하나님 당신을 절대로 포기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아니할 것입니다.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지 아니할 것입니다. 의미없는 삶을 살아가도록 절대로 여러분들을 내버려 두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고백해 놓고 신앙생활이 냉냉해져 싸늘한 고드름처럼 식어진 가슴을 안고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 계십니까? 하나님 섬기겠습니다. 헌신해야겠습니다. 작정해 놓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게으름 속에 빠져 있는 분 계십니까? 젊은 시절 서원을 잊어 버리고 살아계시는 분 계십니까? 하나님 이번 일을 잘 완성해 놓고 충성하겠습니다. 아이가 대학에 가면 내가 그 일 감당하지요. 약속을 미루고 포기하고 살아가시는 분은 아니 계십니까? 그때 일어나는 풍랑 이제 고집 부리지 마십시오. 흔들거리는 사업의 배 안에서 무릎을 꿇으십시오. 건강의 적신호가 오는 인생의 배 안에서 부르짖어 보십시오. 가정에 우환의 비바람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보십시오. 아버지 나를 살려주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보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성경은 요나가 탄 배가 깨어져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하나님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고통 때문에 대풍 때문에 풍랑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더 큰 축복으로 나아가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을 만나기만 하면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5절) 신하들은 처절히 피를 흘리며 전쟁터에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 임금은 낮잠을 즐기고 두 눈을 뜨고 보니 유혹의 그림이 앞에 왔다 갔다 합니다. 무서운 유혹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나라 살리라고 그에게 능력을 주었습니다. 긴머리에 힘을 주었습니다. 나실인으로 살았습니다. 성령이 감동해 주었습니다. 여인의 품에서 잠들어 있다가 삼손은 두 눈이 빠지고 멸망해 갔습니다. 나와 함께 기도하자구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곱을 데리고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한 시간쯤 기도하고 보니 제자들이 졸고 앉아 있습니다. 깨워놓고 또 기도하고 가보니 꾸벅꾸벅 졸고 앉아 있습니다. 자고 있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네가 한 시간도 깨어 기도하지 못하겠느냐. 그 베드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자리에 들고 말았습니다. 은혜로운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슴이 벅차기 시작했습니다. 저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지. 저 말씀이 능력이야. 저 말씀이 내게 구원을 주실 거야.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그 시간에 유두고는 창틀에 걸터앉아 졸고 있었습니다. 창틀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 기름을 준비하지 안은 채 졸며 자다가 버림을 받았습니다. 잠에서 깨십시오. 지금은 자다가 깰 때가 되었도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주인이 언제 올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선장이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 네 하나님께 구하라.” 선장이 요나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 네 하나님께 구하라. 잠자는 신자를 불신자들이 흔들어 깨우고 있습니다. 잠자는 세상을 깨워야 할 신자들이 졸고 있을 때 세상이 우리를 향하여 절규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야 너희들 왜 자고 있느냐. 너희들이 깨어나야 우리 민족이 사느니라. 성도야 깨어라. 하나님의 사람아 깨어라. 우리를 축복해 다오. 우리 대신 부르짖어 다오. 너희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래야 우리가 살 것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 가끔 민족 앞에 기도하도록 요청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온 민족이 기도해야 될 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끔은 한 공동체에 기도하도록 요청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그 공동체가 기도해야 될 때이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교회가 함께 기도하자고 선포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향하여 준비해 놓으신 신령한 은혜와 넘치는 풍성한 축복이 있기 때문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자리에 모이면 기도하는 자리에서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는 그 자리에서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는 그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심령이 여러분의 가정이 여러분의 사업이 새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기도를 요청할 때는 함께 기도를 해야 살아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자다가 깰 때가 되었도다. 사랑하는 자여 이제 잠에서 깨라. 영혼의 잠에서 깨십시오. 기도의 잠에서 깨십시오. 사명의 잠에서 깨십시오. 여러분의 축복의 잠이 깨어날 것입니다. 사업의 잠이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은혜의 잠이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잠에서 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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