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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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임마누엘
본문: 1:18-25
배경설명
마태복음은 누가복음과 달리 요셉을 강조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마태복음을 통하여 누가복음과 달리 전하실 복음의 모습이 있어서이다. 즉 지난번에 살펴봤던 요셉의 의는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시려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의이다. 오늘 함께 살필 내용은 이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루실, 혹은 가져오실 예수님에 대한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님의 이름 “예수”에 대한 것과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실 “임마누엘”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면, 오늘 다룰 주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직감할 것이다. 왜? 예수님께서 오셨어야만 했을까요? 아마 여러분들의 답은 여러분들의 각자 알고 있는 교리나 경험을 바탕으로 뇌리 속에서 번뜩일 것이다. 물론 대부분 맞다. 그런데, 성경적 답은 무엇일까? 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 부분은 신약 성경 앞에 신약 성경의 두배 분량이 되는 구약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반문이다. 그렇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구약과 연관되어 있다. 바로 구약에서 남겨둔 혹은 남겨진 것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구약이 뭐를 남겨뒀다구요? 그렇죠~, 지금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성경이 그걸 말하고 있다. 우리의 성경이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증거이다. 만약 구약에서 모든 것이 이루지거나 성취가 되었다면, 신약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인데, 신약이 지금 있는 것을 보면, 제가 드린 설명이 설득력이 있다.
이 또한 예수님이 오신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 함께 오늘 본문을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구원자 예수
우선 21절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를 볼 수 있다. 예수는 헬라식 이름이다. 히브리식으로는 두가지로 부를 수 있다. 하나는 여호수아, 다른 하나는 호세아이다. 이는 아마 시간적 간격 때문일 것이다. 우리말도 시간 간격을 100년 정도 벌여놓으면, 예수교도 야수교로 불렸었다.
예수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이다. 물론 21절에서 바로 이어 예수님의 하실 일에대하여 설명을 덧붙인다. 그럼 왜? 구원일까? 여기서 예수님의 이름의 뜻이 구원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우선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구원을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물론 맞다. 문제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전부라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천국으로 가야 가장 축복 받은 것이다. 그런데 예부터 지금까지 그런 케이스는 드물다. 거의 대부분 예수님을 믿고 평생을 크리스챤으로 살다가 가는 경우이다. 그러면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은 좁은 의미의 구원으로 명명한다면, 넓은 의미의 구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성경도 이런 생각을 지지하는가가 문제다. 그렇다~, 성경은 매우 지지한다. 오늘 나누고 있는 본문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즉, 예수님 이름의 뜻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이런 질문을 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구원 받았나요? 반대로, 광야에서 죽은 1세대는 구원받았나요? 아주 어려운 질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좁은 의미의 차원에서 구원을 물어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좁은 의미에서의 구원)는 개인적인 구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다. 주변 사람들은 그저 대략 추측을 할 뿐이다.
맞습니다. 바로 지금 여러분들의 머리속에서 떠오른 그 생각이다. 넓은 차원의 구원을 물어봐야 한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한 차원에서는 구원을 받은 것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출애굽으로 시작된 구원이 중간에 끊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으면, 모든 것이 마무리 된 것인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왜 불순종할 때마다 선지자를 보내시면서 경고를 외치게 하셨을까? 나아가서 끝내는 불순종을 지속하는 이스라엘을 포로로 끌려가게 한 것은 설명이 안된다. 물론 70년이 지난 후 포로로부터 돌아왔다. 그리고 소위 제2의 성전을 짓고 봉헌을 한다. 문제는 구약의 가장 마지막에 위치한 스가랴와 말라기는 제2성전 이후의 모습을 바탕으로 이야기 되어지는 내용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은 마치 구약에서 일어난 이 일련의 일을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확히 오늘 본문으로 표현해보자면, 구원하는 거죠. 그렇습니다. 구약에서 문제는 지리적 문제가 아니었다. 단순하게 가나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단 말이다.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죄의 문제는 우리도 잘 알듯이 지리적 이동이나, 종교적 외적인 의식으로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죄의 문제는 내적인 문제이며, 외적인 문제이며, 구조적 문제이기까지 하다. 사실 내적, 외적, 구조적은 유기적 모습을 하고 있다. 서로 생명체처럼 연결되어 있다.
이 말들을 요약하면,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가 된다. 그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왜 구원일까? 22-23절은 이를 이해시켜준다.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
22절을 보면, 구약에서 이미 예언 된 것들이라고 말한다. 22절을 같이 읽어보자. 그러면서 23절을 보여준다. 23절은 이사야 7:14절을 인용한 것이다.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여기서 잠깐 이사야 7:14절의 배경을 살펴보면, 아하스가 왕을 할 때이고, 이사야가 선지자로 사역할 때이다. 7:14에서 소개하는 분위기는 아람이 북 이스라엘과 동맹하여서 지금 유다를 치려는 상황이다. 이 소식을 접한 왕과 백성들의 마음은 이사야 7:2에서 확인 되는 것처럼, 난리가 났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들은 별거 아니며, 근심하지 말라고 하면서 정 못 믿겠으면, 징조를 구하라고 하셨는데, 그것까지도 거절하는 것을 12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하나님께서 얘기하신 내용이 바로 오늘 마태복음 1:23에서 인용한 이사야 7:14의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이사야 7:14의 내용과 마태복음 1:23의 내용이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이사야에서는 “젊은 여자”인데, 마태복음에서는 동정녀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마태복음은 어떻게 젊은 여자를 동정녀로 옮겼을까요? 여기서 계시의 점진성[1]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이다. 그러면 이사야에서 마태복음까지 오는 과정에서 70인역이라는 구약 성경을 번역한 헬라어 성경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서 이사야서를 번역할 때, 젊은 여자를 동정녀로 번역을 한다. 마태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마태복음을 기록할 때, 히브리 성경과 헬라어 번역본을 모두 고려하면서 마태복음을 기록하였다. 즉 기원전 7세기부터 3세기를 지나면서 어떻게 예수님에게로 향하고, 예수님에게서 성취(이루어지셨는지)되었는지를 보면서 감탄하면서 감격에 차서 기록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마태복음 1:23은 단지 이사야 7:14절만 인용한게 아니다. 이사야서를 계속 읽다보면, 6장에서부터 심판이 시작되고, 7장에서 아하스의 완고함이 더해지면서 심판은 기정 사실이 된다. 8장에서는 심판과 더불어 회복의 서광을 비추는데, 여기서 연속으로 2번(8:8, 10)이나 임마누엘이 등장한다. 여기서 임마누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기 때문에, 즉 하나님이 임마누엘하기 때문에 심판이 이루지는 것을 보게 된다.
결과 이들은 이로부터 대략 130년 후 포로가 된다. 하나님이 임마누엘 하셨기 때문에 이들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 났다. 성전은 파괴되고 무너졌다. 사람들은 왕으로부터 제사장, 관료에 이르기까지 모두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상징이다. 그래서 이들은 바벨론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성전이 건재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것을 볼 수 있다(예레미야서 25-29장). 그런데 성전이 파괴되고 무너졌으며, 이들은 약속의 땅으로부터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이들에게 있어서 이 모습들은 하나님이 떠나셨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더 이상 자신들과 임마누엘하지 않으신다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엄청 충격을 받았었다. 이런 충겨은 이들로 하여금 바벨론 땅에서 70년을 고민하고 울부짖게 했다. 무엇이라도 잡으려고 엄청 몸부림을 쳤다.
드디어 70년이 차서 이들은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아왔다. 하나님은 이들로 하여금 성전을 재건하라고 하셨다(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재건하는 과정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래도 완공하였다. 봉헌할 때 모습을 보면(에스라 6:13-22), 첫번째 성전을 봉헌할 때(왕상8:10-11; 대하 5:11-14)와 차이를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빽빽한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70년을 기다렸고, 우여곡절이였지만, 성전을 건축한 마당에 좀 더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 시간이 40년을 넘어가다보니, 지치기 시작했다(말라기). 사람이 기대하고 있었던 것들이 부응하지 못하게 되면, 실망하고 자포자기를 이어 불평불만을 하게 된다. 말라기를 읽어보면, 이 모습들을 잘 볼 수 있다.
어디 이뿐인가! 포로귀환이라고 알고 있지만,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음에도 여전히 페르시아 통치아래 있었다. 페르시아가 저물더니, 더욱 강력한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헬라 제국이 등장하고, 헬라 제국이 저무는가 했더니, 철의 통치를 보여주는 로마제국이 등장한다. 이렇게 계속된 시간이 무려 500백년이다. 500백은 조선왕조 전체 기간이다. 생각해보라, 지치고도 남을 시간 아니었을까요? 지금 우리는 잠깐 기다리는 것도 힘들어 한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이들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다릴 수 있도록, 선지자를 보내셨고, 경건한 사람들을 일으켰다. 예수님의 육신적 아버지인 요셉과 같은 사람이 그 좋은 예이다. 요셉과 같은 의인이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게 아니라고 지난번 설교때에 말씀드렸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메불망 한 세대 또 한 세대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 떠나셨던 하나님의 임재가 언제 다시 오실지를 기다리고 기다렸던 거다.
이때~~~,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메불망 고대했던 하나님의 임재가 아주 가시적으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긴장되는 순간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500년을 거의 침묵 속에서 기다렸는데, 드디어 깊은 밤이 지나고 동트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기대된다.
이 기대의 크기를 잠깐 재보면, 구약에서도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다윗, 이사야 등등과 언약을 맺으실 때, 그 언약의 은혜롭고, 공의로운 것들을 생각해보면, 이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임마누엘 하실 하나님의 새 언약은 얼마나 크고 넓고 깊고 높을까? 설레인다. 우리 하나님은 늘 최고의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아브라함에게도 그랬고, 다윗에게도 그랬다. 구약 내내 늘 최고로 주신 하나님께서 이제 독생자를 통하여 주실것을 생각만해도 너무너무 설레지 않나요?
이 자비롭고, 은혜롭고, 공의로운 멋있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어디가나, 시간만 나면 자랑하고 싶지 않으세요? 좌우를 보시죠. 표어나, 구호 모두가 이런 멋진 하나님을 둘러싸고 있잖아요. 어떻게든 들어내고 싶은 마음에…말이다.
결론
[1] 계시의 점진성은 예수님을 기점으로 생각하면, 시간대가 예수님에게로 점점 가까워지면서 계시가 점점 더 명료해 지는 것을 말한다. 이런 현상은 이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