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 2:1-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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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올라 멀리 바라보자

선배 목사님 그리고 동지 사역자 모두 반갑습니다. 저는 김포에서 양의문 교회를 지난 2월에 개척한 우효동강도사이고 남부노회에 속해 있습니다.
새벽 시간 주어진 본문으로 ‘높이 올라 멀리 바라보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당시 하박국 선지자는 남유다 왕국의 마지막 시기에 내부적으로는 불의와 우상숭배가 가득한 시기에 활동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앗시리아가 쇠퇴하면서 신 바벨론 제국이 등장하던 시기의 선지자입니다. 바벨론에 대해서 1장 6절에서 여호와께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6 사납고 성급한 백성” 이다. 그리고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한다’ 즉 전쟁을 일으켜 세력을 확장하는 호전적인 민족이었습니다. 전쟁은 역사의 이야기 같아도 지금 세계는 끝모를 전쟁 중이며 자기 이익에 따라 이편 저편으로 나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하박국 선지자는 특이하게 이스라엘을 향한 대언이나 이로인해 책망하거나 경고하지 않는 다는 독특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한 개인적인 갈등을 드러내고 있는데 저는 목회자 여러분께서 목회의 현장에서 그리고 세상 속에서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며 서고자 할 때 일어나는 목회적 갈등 개인적인 고통을 돌아보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박국서는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하박국 1:2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라고 자신의 심정을 강하게 토로합니다. 이런 마음은 당시에만 그것도 하박국 선지자만 가졌던 질문인가? 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확장된 질문은 악이 가득할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신가? 하는 것이죠
먼저, 생각할것은 선지자가 불만이나 불평을 토로하는 것인가? 선지자는 불의한 세상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논쟁이 시작됩니다. 논쟁의 이야기가 1장 2장에 기록되었고 간략히 보면, 내부적으로 토라를 등한시하고 폭력과 불의에도 부패한 지도자들을 고발하며 하나님께 무엇인가 해달라고 요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잘 알고 있고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 심판하시겠다는 것이죠. 이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수납하지 못하고 불만처럼 그럴 수 없다고 항변합니다. 이유는 이스라엘보다 더 악한 자들로 인해 심판하는 것이 1:17절에 ‘옳으니이까’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을 향하여 ‘옳으니이까’라고 선지자는 도전적으로 질문합니다. 불과 얼마전 코로나 시국으로 인터넷 방송 매체를 통해서 예배했던 때, 어떤 교회들은 이참에 온라인 교회를 세워 새로운 예배 형태를 만들어 전통적인 예배에서 벗어나 버렸습니다. 많은 목회자 그룹이 고민과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결정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여전히 우리 주변은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신 것들을 이런 저런 현실과 상황에 맞춰 바꾸려 하고 있을 때 불만과 불평을 토로하는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 애통하는 마음으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74:1 “1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 라고 시편 기자도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애통한 마음으로 기도했다면고 이어지는 선지자의 행동을 주목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이 그것인데 2:1절에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초소와 성루는 이스라엘의 외곽을 두른 성벽 중에서 보초를 서는 가장 높은 곳임을 잘 아실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내 파수하는 곳’ 즉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에서 ‘서며, 서리라’는 대차구조를 통해 ‘강한 의지’로 그렇게 하겠다는 자세를 취합니다. 이런 자세는 오늘 사역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서야 할 곳은 어디이며 말씀 사역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특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론 그 자리를 피하고 싶기도 합니다. 어떤 대는 목회자로 고립되는 상황을 피하고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런 의지의 표현은 1절 동사에서 살펴 볼수 있는데 ‘서고 서겠다. 기다리겠다, 바라보겠다’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선지자는 ‘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는 의지가 드러납니다. 여기 동사들은 미완료 형태로 계속적인 행동과 함께 부정사 연계형 구문을 취해 ‘그렇게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뭐라 하실지는 ‘꾸중’(알_토카 흐 티)을 의미하는 용어로 즉, 하나님의 질책을 받더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더 강한 의지적 표현입니다. 결국 답을 듣습니다. 3절에서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여기 구문은 부정사 절대형 구문으로 앞선 하박국의 의지를 드러내는 부정사 연계형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도 눈여겨 볼만 합니다. 그렇게 하겠다는 선지자의 마음, 기도, 행동과 반드시 응한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마치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장면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 집니다. 아멘, 물론 우리의 바람, 기다림도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마침이자, 기다림의 끝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는 오랜 시간동안 ‘자신이 맡은 바 자리에서’ 여전히 말씀을 연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성루에 선지자처럼 응답을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간구를 외면하지 않고 정하신 때를(정관사 하, 람모에드 + 하) 따라 응답하신다는 위로를 기억하십시오.
마지막으로, 그래서 우리는 ‘명백히 새겨며,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는 준비를 요구 받는 목회자입니다. 이런 요구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도(23:21) 스가랴 (2:4)에서도 나타납니다. 망루는 높은 곳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는 보초의 임무뿐만 아니라 언제든 전장으로 투입되어야 하는 자세입니다.
설교자는 언제든 설교라는 무기를 ‘명백히 새기며, 달려가면서도’ 시의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예리하게 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4절은 직역하면 ‘보라 그는 교만한 자라, 그의 심령은 그 중심에 정직하지 않다’ 이는 하박국 선지자가 말하는 1장 이하의 ‘그들’입니다. 왜 심판받지 않는가 했던 그들을 ‘교만한 자’라고 할 때 ‘바빌론은 하나님의 심판 도구임에도 그것을 모르고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이지만 의인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산다’라고 하는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인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선배 목사님 여러분! 이제 개척을 시작한 저의 성루에서는 건물주의 월세와 전도라는 녹록치 않는 상황 그리고 대부분 가족 구성원들이 성도들이고 설교가 길까봐 도끼눈으로 지켜보는 현장입니다.
선배 목사님들에게 올라야 하는 성루는 어디이며 그곳이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해 멀리 볼 수 있는 곳입니까? 다시 한 번 수련회를 통해 높이 올라 멀리 바라 봅시다. 그리고 이곳에 올라 왔으니 하박국 선지자의 애통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새벽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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