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불편함 넘어 주님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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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이른 감이 있지만, 날씨가 따뜻해지면 머지 않아 호주 시드니의 여름이 찾아 올 것입니다.
아마도 해변을 찾는 일이 많아 질 것입니다.
호주에 삶을 영유하기 위해서 수영은 배워두면 좋은 기술 입니다.
그런데, 수영 하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물은 무서움 이고 불편함 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거나 숨조차 쉽게 쉬지 못하게 하기 때문 입니다.
스키나 스노우 보드를 탈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눈은 어그적 어그적 걷거나 눈싸움을 하는 정도의 장소 입니다. 이 또한 어떤 면에서는 불편함을 줍니다.
행글라이더를 다룰줄 모르는 사람인 경우는 더 심각합니다.
절벽은 불편을 넘어 절체절명의 위협 입니다.
물이 됐건 설원이나 빙판이나 또는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각과 기술 그리고 도전이 필요 합니다.
이런것들을 대응 하는 일은 쉽지 않고 익숙치 않아서 불편합니다.
사도행전의 예루살렘과 안디옥의 초대교회들은 복음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됩니다.
새로운 선교지 사람들은 기존의 질서와 전혀 다른 복음이라는 질서를 만나자 불편함을 느끼고 더 나아가 저항하게 됩니다.
세상은 복음을 향해 끝없이 저항하고 방해 합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누군가와 대립해 가면서 까지 기독교인임을 주장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질서가 딱히 복음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세상이 복음 때문에 불편 하지 않게 하는 것이
복음 전파에 더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전도자들은 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리더 였고 교회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보내야 했다는 것부터가 불편한 사실 입니다.
또한 평온하고 풍요로운 사이프러스 섬과 비시디아 지역에 파장을 일키는 일은 많은 위협과 불편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독교인들은 어렵고 핍박 받는 삶을 자처해야 할까요?
왜냐하면, 복음을 전파하는 일 자체가 그런 불편함을 야기 시키기 때문 입니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세상의 저항과 맞닫드리는 일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법을 불편해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다가 세상의 저항을 만난다면 오히려 잘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을 불편하게 여기고 거스르고 어그러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세계를 누리며 자유와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도들의 삶을 살펴 보겠습니다.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기를 소망하고 그렇게 살아갈 믿음과 용기가 사랑하는 군우 여러분께 임하시길 축원 합니다.
복음의 불편함을 넘어 주님의 세계로…
1.신화와 마술의 세계
2.경외와 지혜의 세계

1.신화와 마술의 세계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여행, 또는 안디옥 교회의 최초의 선교사 파송 또는 안디옥 교회의 1차 선교사 파송이 시작 되었습니다.
그 첫번째 장소는 구브로 섬이었습니다.
지중해에 위치한 활발한 무역항을 지닌 풍요로운 섬입니다.
또한 이곳은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라 불리고 미의 여신 비너스가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을 가진 섬 입니다.
바나바와 사울 그리고 요한은 구브로 섬에 선교사로 파송 됩니다.
사도행전 13:4–5 NKRV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이 구브로 선교의 경로는 섬을 횡단 하는 것이었습니다.
구브로의 항구인 살라미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바보’라 하는 파포스 까지의 약 140km의 여정 이었습니다.
살라미 ‘Salamis’—> 바보 ’Paphos’
*살라미 전투가 있었던 섬은 아님, 살라미나스 섬은 아테네 옆에 있음.
첫 선교지가 물을 건너서 가는 섬이라는 것도 신학적으로 의미가 있지만 너무 깊히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각설하고
구브로 섬 전도는 복음 전파에서 만날 수 있는 적대적인 상황을 예시적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은 호사다마 라는 말이 있듯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저항이 있게 마련 입니다.
복음전파에는 대상이 있고
그 일을 방해하고 대적하는 세력이 있게 마련 입니다.
사도행전 13:6 NKRV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구브로에서의 복음 전도 대상은 총독인 “서기오 바울”
이를 방해하는 세력은 “바 예수,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 라고 소개 합니다.
복음 대상자 - “서기오 바울-구브로총독”(7절)
방해자 - “바 예수/엘루마-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 (6,8절)
방해세력이 정치세력도 아니고 군대도 아니며 그렇다고 민간의 종교세력도 아닙니다. 흥미롭게도 “마술사” 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분명 유대인 거짓 선지라고 했는데, 더 정확히는 마술사 라고 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실권은 로마제국이 가지고 있지만 그리스의 문화를 동경 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리스 하면 떠오는 것은 민주주의와 신화 입니다.
당시 그리스문화권에서는 정치인들이 전쟁이나 큰 결정을 할때 신전에 제사를 올리고 신탁의 메세지를 받아서 결정 했습니다. 특히 구브로 같은 섬에서는 점성가나 마술사를 곁에 두고 정치를 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향력이 막강하였다고 합니다.
거짓 선지자 이자 마술사가 점령한 세계 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당시의 구브로 였습니다.
신학자 톰 라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음은 반대 없이 전파되지 않는다.”
“복음은 원수가 점령한 영토를 침범했고, 원수는 싸울 의지가 분명했다.”
-톰 라이트-
본문의 반대자이자 해방꾼은 바예수 였습니다.

“바예수”(Bar-Jesus), 즉 ‘구원의 아들’

거짓 복음과 마술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 까지 탐하고 있던 종교 사기꾼이 바로 바 예수 였습니다.
거기다가 불경하게도 메시야임을 주장 하는 현대말로 예수호소인 이었습니다.
사이비 교주 같은 사람 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대상인 총독 서기오 바울은 바나바와 사울에 대해 호의적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3:7 NKRV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바예수와 밀접하게 결탁되어 있던 구브로의 정치 상황에서 서기오 바울이 바나바와 사울에게 호의적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바 예수라 하는 엘루마는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13:8 NKRV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복음의 현장, 선교의 현장에는 항상 이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복음의 현장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도 이런 반대와 비난은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의 기독교에 대한 비난은 이 시대와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 사회를 사는 현대 기독교인들은 움추러 들수 밖에 없고
전도대상자들은 더욱 더 복음에 대한 관심이나 혹시 있을 교회를 한번 가고 싶은 마음도 숨겨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의 전파는 그런 와중에도 일어납니다. 영혼구원은 환경이나 조건이 아닌 하나님 손에 달린 것이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복음에 관심도 없던 사람이 어느 날, 적합한 인물을 통해 말씀을 듣게 하시려고 그 마음을 변화 시키십니다. 마음밭을 준비 시키십니다.
구브로를 포함한 그 당시 세계는 사탄의 세계,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세계 였습니다.
사도행전 13:10 NKRV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들이 판을 치는 곳입니다.
불의가 왕노릇하며 생명을 갉아 먹는 세계 입니다.
주님의 바른 길을 굽게 하려고 부단히 도전 하는 세력 입니다.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야비한 세계 였습니다.
조금 이라도 약점을 보이면 금새 잡아 먹히고
태어나면서 부터 노예로 태어나 차별받고 억압 받으며 밑바닥을 기어야 하는 운명을 받아 들여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운을 믿고 불운을 두려워 하며 올림푸스의 신들에게 행운을 기도 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던 시대 입니다.
도시생활을 하면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한 청년 이었던
비온 나타코 린데블라드는 그의 책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순간도 마음이 진정으로 충만하다고 느껴 본적이 없습니다. 나의 삶은 분주하여 스케줄은 빈틈이 없지만, 내 마음 속은 뭔가 채워졌으면 하는 공간이 내 마음 속에 남아 돌고 있습니다.”
현대의 우리의 삶은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는 문명인으로서, 성인으로서,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통제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미래는 예측 가능합니까?
우리의 건강은? 우리의 노후는? 어떻게 될 것인지 정확히 예측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힘과 계획을 믿고
티비 광고에는 “나 자신을 믿어라” 라고 외치지만
정말 나 자신을 믿고 살아도 괜찮은 걸까요?
더 큰 꿈을 가져라!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라! 그러면 성공한다.
정말 그런가요?
모든 신에게라도 기도를 해서라도 운을 빌고 싶어 하는 것은 마찬 가지 일것입니다.
그런데, 일명 성공을 경험한 대부분의 사람들과 큰 사업을 일군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운이 좋았습니다" “재수가 좋았죠” “생각한 것보다 일이 잘풀려서 놀랐습니다” 입니다.
인생의 많은 부분을 우리가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는 것은 착각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복음을 불편해 합니다.
아니,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구원을 다른 곳에서 찾습니다.
아니, 구원 같은 것은 관심도 없고
그저 복을 준다면 그 신이 누구인지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신화 속의 복을 주는 신을 믿고 희망 없는 현실을 타계할 마술 같은 일을 바라고 살고 있는 것이 하나님 없는 삶입니다.
순간 주어지는 달콤한 행복으로 영원한 삶과 내세에 대해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고 믿지 못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예수와 같은 거짓 선지자 즉 세상의 계략 입니다.
여러분 마술에 현혹 되지 마십시오. 아무런 결정권이나 능력이 없는 헛된 신에게 믿음을 팔면 안됩니다.
세상의 초등학문과 철학과 지혜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모두 헛된 것들이기 때문 입니다.
시편 127:1 NKRV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헛된 세상의 성공, 행복은 허상 입니다.
결국 헛된 수고의 연속이 인생입니다.
밤새워 노력해도 여호와가 세우셔야 가정도 직장도 사업도 신앙도 올바로 설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다른 곳으로 가고 있다면 그 방향을 돌려 구브로로 가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으로 성령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십시오
교회의 구석진 곳, 우리 지역의 어두운 곳으로 복음의 빛을 들고 나아가십시오.
그곳에서 가치 있는 싸움에 동참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애타게 기다리는 영혼들에게 갈때, 진정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마술과 신화의 세계에서 주님의 세계로 변화 시키는 선한 싸움에 동참 하시기 바랍니다.

2.경외와 지혜의 세계

총독에 대해 누가는 “지혜 있는 사람”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을 깊히 있게 살펴보면,
성경에서의 “지혜”의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세속에서 말하는 지혜와 다르다는 것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경험이나 사고, 관찰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킨다. 이는,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탁월한 경륜과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창조주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를 가리키는 동시에 그분이 인생들에게 은사로 주시는 참된 지혜를 가리키기도 한다
성경에서의 지혜는 사람의 인품으로서 경험으로서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작용이고 은사 입니다.
즉, 서기오 바울이 바나바와 사울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이 사람의 개인적 기호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라는 것입니다.
또한 “지혜” 라는 단어를 언어학적으로 살펴보면 더 깊은 은혜가 있는데요.
이 단어는 지혜 라는 명사 이면서
“내적인 능숙함, 지혜, 현자” 를 향해 가다 “라는 동사 입니다.
지혜를 향해 신적 존재를 향해 가는 행위를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가는 마음을 품는 것.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오는 행위 이것 자체가 지혜 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선교팀과 서기오 바울은 본문 이전에 그 어떤 준비 단계가 있었거나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이 그저 전권적인 은혜를 통해 그에게 지혜로운 마음, 신심,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부어주시었다는 것입니다.

경외

또한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감사와 떨림을 우리는 “경외” 라고 부릅니다.
시편 2:11 NKRV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보통 부서운 아버지를 대하듯,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두려워 하고 떠는 모습을 경외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경외는 그를 영화롭게 여기고 평생토록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숨속에 계심 자체를 감사하고 기뻐하는 순수한 사랑의 마음을 경외라고합니다.
다윗이 죄를 짓고 느꼈던 감정은 죄책감과 함께 경외심에서 나오는 두려움 이었습니다.
그 두려움은 아기가 본능적으로 엄마가 곁에 없음을 알아채고 느끼는 두려움과 유사합니다.
시편 51:11 NKRV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하나님이 그의 악함과 죄악됨에도 불구하고 그의 악함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인생이 어그러졌는데 불구하고 그가 나의 마음에 합한 자라 말씀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순수한 마음을 보시고 용서하시고 그 모든 죄과를 책임져 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이렇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중에도 우리에게 하나님을 찾는 섭리적이고 근원적 갈망을 주시고 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로 항상 계셨습니다.
그 근거로 삼을만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 자체가 그렇습니다.

YHWH

이 단어를 읽어 보십시오
히브리어에는 자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야흐-훼에’ 라고 읽습니다.
한숨 같기도 하고 신비로운 뜻을 담고 있는 단어 같기도 한 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이름 입니다.
어떤 분이 이것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1.우리가 아무 언어를 모르고 있던 태중에서 처음으로 내뱉은 언어
2.우리가 인생을 살며 외롭고 힘들때 내뱉는 한숨
3.우리의 생의 마지막 순간 하나님께 돌아가며 부르는 이름
아흐-훼에 입니다.
하나님은 이름 자체가 우리의 호흡이고 생명 이십니다.
이 처럼 하나님은 서기오 바울을 구원 하기 위해 그에게 지혜를 주셨듯이,
우리가 태중에 있을때 부터 우리의 숨 소리 가운데 계셨던 분입니다.
또한 우리의 인생 속 어두운 밤 홀로 남겨진 그 시간 속에 내뱉는 한 숨 속에도 그분은 계셨습니다.
내가 생을 마감하는 절대 고독의 시간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부정한다 하여도 하나님은 우리의 숨소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지혜”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물질적인 것들과 추상적인 개념, 종교적인 것들을 모두 제거하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존재만으로 경외 하십니까?
그가 있으메 즐겁고 행복하십니까?
우리는 이런 순수한 믿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결론

이사야 52:7 NKRV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바나바와 사울의 선교여행은 아름답고 충만한 여정 이었습니다.
때론 세상의 마술과 권력에 의해 방해받고 핍박 받고 물질적으로 궁핍 하였지만 그들의 삶이 충만하고 기뻤던 이유는 뭘까요?
서기오 바울 같은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사람이 우리를 태중에서 부터 지금 까지 함께 하셨다는 것을 깨닫고 그 영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을 수없이 경험 했기 때문 입니다.
그 기쁨과 보람과 벅참은 그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충만 입니다. 나를 가장 가치 있게 느끼게 하는 일입니다.
바나바와 사울도 경험해보았던 아흐훼의 경험이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기를 갈망했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있는 사람은 구브로로 갑니다.
삶의 현장에서 야훼 하나님을 전파 합니다.
그 어떤 반대와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싸고 인도 하려고 애절하게 기도하고 전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지 전하고 싶었기에
불편함과 궁핍함 중에도 복음 들고 달려 갈 수 있었습니다.
여기 계신 우리 모두는
세상의 마술과 세상의 신화와 잘못된 지혜를 따르기 보다
하나님을 찾고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 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즐거워하며 그를 섬겨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호흡 가운데 함께 하시는 야흐훼이 의 하나님의 사랑을 순수한 마음으로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할줄로 믿습니다.
또한 그 사랑을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상에 전파하여
이 세상이 하나님의 법과 사랑이 넘쳐 흐르는 하나님의 세계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속한 교회와 가정과 직장과 사업과 우리의 지역 가운데
또 이 온 세계가 하나님의 세계가 되기를 소망 하는 마음으로 찬양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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