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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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파랑새라는 동화를 보셨나요?
이 동화는 벨기에 동화입니다.
주인공 틸틸과 미틸 남매가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파랑새를 찾아 다니다는 꿈을 꾸다가 문득 깨어나 자신들이 기르던 비둘기가 그 파랑새임을 깨닫는다는 내용입니다. 행복은 가까이에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틸틸과 미틸은 춥고 배고픈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꿈 속에서 한 할머니를 만납니다.
그 할머니는 자신의 딸이 아픈데 파랑새를 보면 나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틸틸과 미틸은 자신들이 파랑새를 찾아 주겠다고 하죠.
그 할머니는 고마움을 표현하며 다이아몬드가 박힌 모자를 주며 그것을 이용해 찾아보라고 하죠.
다이아몬드를 한 번 돌리니 요정들이 나타나 파랑새를 찾는 길을 안내합니다.
그렇게 추억의 나라, 밤의 궁전, 숲속, 공동묘지, 행복의 정원, 미래의 나라들을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파랑새를 찾지만 되돌아오면 색깔이 변하거나 날아가 버리거나 죽거나 하고 맙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집에서 기르는 비둘기가 파랑새라는 것을 깨닫고 이웃집 할머니의 아픈 딸에게 파랑새를 넘겨주지만 그 새마저 날아가 버립니다.
그리고 틸틸이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 그 새를 보면 우리에게 돌려주시겠어요? 우리는 그 새가 꼭 필요해요. 행복을 위해서...”
본론
본론
1. 그리스도인은 어떤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까?
인간은 본질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수(오래 사는 것), 부(부유한 것), 강녕(몸과 마음이 건강한 것), 유호덕(베푸는 것), 고종명(편안한 죽음)이라고 해서 “오복을 말합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행복을 정의하는 것이 다 다릅니다. 행복을 주관적으로 생각하면 진정한 행복을 찾기 어렵습니다.
인간이 우연히 생겼다면 행복을 말하는 것은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만일 인간을 만드시 창조주가 계시다면 진정한 행복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행복의 길을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복은 세상이 말하는 것과 다릅니다.
앞서 말씀 드린 오복은 인간 중심의 관점에서 복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팔복은 하나님 중심의 관점에서 복을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소유의 관점에서 행복을 말하지만 예수님은 존재의 관점에서 행복을 언급하십니다.
사람들은 행동의 관점에서 행복을 말하지만 예수님은 성품의 관점에서 행복을 언급하십니다.
예수님은 행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팔복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 보면 이것은 사람이 태어날 때 가지는 고유한 기질이나 천성이 아닙니다.
팔복은 영혼이 새롭게 태어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성품입니다.
팔복은 그리스도인이 가진 성품입니다.
팔복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성품으로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2. 팔복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시 1, 마11:29, 요15:5;8)?
팔복의 총체성
팔복은 8가지 보석이 하나의 목걸이로 연결된 것과 같습니다.
하나 하나 고유하고 소중하지만 따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팔복의 순차성
팔복은 순서가 중요합니다.
마치 8층 건물을 올라가기 위해서 1층부터 순서대로 올라가야 하듯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애통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면 온유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온유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못합니다.
팔복에서 전반부 4개의 복은 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팔복에서 후반부 4개의 복은 주로 사람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팔복의 병행성
전반부 4개의 복은 후반부 4개의 복과 상호 밀접한 병행 관계입니다.
첫 번째 심령이 가난한 복과 다섯 번째 긍휼히 여기는 복이 병행을 이룹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병행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이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다음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팔복이 있습니까?
구약의 시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세상을 따르지 않고 여호와의 말씀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풍성한 열매맺는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로 비유합니다.
팔복은 사실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과 행동에 이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이 예수님의 제자, 그리스도인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팔복입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샤이닝(자우림)
작사/작곡 : 김윤아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나를 받아줄 그곳이 있을까
가난한 나의 영혼을
숨기려 하지 않아도
나를 안아줄 사람이 있을까
목마른 가슴 위로 태양은 타오르네
내게도 날개가 있어 날아갈 수 있을까
별이 내리는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바보처럼 나는 그저 눈물을 흘리며 서 있네
이 가슴속의 폭풍은 언제 멎으려나
바람 부는 세상에 나 홀로 서있네
풀리지 않는 의문들 정답이 없는 질문들
나를 채워줄 그 무엇이 있을까
이유도 없는 외로움 살아 있다는 괴로움
나를 안아줄 사람이 있을까
목마른 가슴 위로 태양은 타오르네
내게도 날개가 있어 날아갈 수 있을까
별이 내리는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바보처럼 나는 그저 눈물을 흘리며 서 있네
이 가슴 속의 폭풍은 언제 멎으려나
바람 부는 세상에 나 홀로 서있네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나를 받아줄 그곳이 있을까..
3. 첫 번째 복은 구체적으로 어떤 복입니까(마5:3, 시40:17)?
심령이 가난한 것의 의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가난은 상대적인 가난(페네스)과 절대적인 가난(프토코스)이 있습니다.
상대적인 가난은 생필품은 있지만 사치품은 없는 가난입니다.
절대적인 가난은 완전히 파산한 사람, 거지와 같은 상태를 말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하는 가난입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가난입니다.
그렇다면 심령이 절대적으로 가난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하나님의 도움만을 바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부유한 사람입니다.
심령이 절대적인 가난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교되는 가난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무한하심을 알 때 자신의 초라함이 보이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함을 하나님을 만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비해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며, 무능력한지, 왜소하며, 가난한지를 아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다들 자신의 마음에서 절대적인 가난을 경험합니다.
심령의 가난한 사람의 특징
첫째로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인 것을 압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내가 존재하고 생각하고 살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가능함을 아는 것이지요.
둘째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압니다.
자신을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압니다.
나는 하나님의 관리인으로서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잘 관리해야 할 줄을 압니다.
셋째로 자신의 무지를 압니다.
하나님 없이 내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알 수 없음을 압니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인생의 지도와 표지로 삼고 성경의 빛 아래에서 살아갑니다.
심령이 가난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어지는 복은 무엇입니까? 천국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와 인도가 있는 곳입니다.
오늘 내가 천국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심령이 부유하게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기보다 내 힘으로 내 뜻대로 살아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천국과 지옥 생활, 행복과 불행은 심령의 가난함에 달려 있습니다.
한번 받아 고백합시다. “나는 참으로 가난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
4. 다섯 번째 복은 구체적으로 어떤 복입니까(마5:7, 호6:6, 미6:8, 마25, 눅23:28)?
다섯 번째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성도의 특성과 다르게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나타납니다.
이타적인 삶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적으로 되면 사람과의 관계가 되어 행복한 살을 살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여 천국을 소유한 자가 다섯 번째 복도 누릴 수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이란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긍휼은 불쌍한 사람, 어려운 사람, 불우한 사람을 실제로 돕는 행동이 결합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긍휼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구체적으로 도와 주는 행위를 했습니다.
이러한 긍휼의 모범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비참과 고통에서 해방되게 하셨습니다.
긍휼은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사랑에서 비롯된 긍휼은 비참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비해 절대적인 가난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백성, 천국 백성이 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긍휼의 사람
우리는 타락한 이후 우리의 본성은 악으로 물들었습니다.
잔인함과 무자비가 우리의 본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계산적이며, 이기적인 동기로 행동하는 야수와 같습니다.
우리가 긍휼을 베풀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긍휼을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모든 죄의 비참한 결과와 고통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긍휼을 구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또한 우리가 사람에게 나아갈 때의 태도는 “불쌍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동병상련, 불쌍히 여김을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긍휼은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
마 25장에서 긍휼에 대한 중요한 사례가 나타납니다.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마실 물이 없는 사람에게 마실 물을 주는 것,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주는 것, 잘 곳이 없는 사람에게 재워 주는 것, 병든 사람을 방문하는 것, 감옥에 갇힌 사람을 방문하는 것 등입니다.
내가 구체적으로 긍휼을 베풀고 있는 이웃은 누구입니까?
올해 나의 물질, 시간, 몸을 통해 긍휼을 베푼 사람들은 얼마나 됩니까?
우리는 영적으로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이 죄와 죽음과 사탄의 노예로서 영적이 비참 속에 사는 사람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불신자의 영혼을 얼마나 긍휼히 여깁니까?
사람의 죽음으로 몸에서 영혼이 떠나갈 때 얼마나 웁니까?
하나님을 떠나 버린 영혼을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웁니까?
내 주변에 잃어버린 영혼을 긍휼히 여깁시다. 그러면 당신이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론
결론
심령이 가난한 자를 위해 기도
긍휼히 여겨야 할 자를 위해 기도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