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속의 은혜를 통해 배우는 유형적 헌신의 즐거움 2024 0826 민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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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찬송가 430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 435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민수기 3:1–13 (NKRV)
1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와 말씀하실 때에 아론과 모세가 낳은 자는 이러하니라 2 아론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장자는 나답이요 다음은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니
3 이는 아론의 아들들의 이름이며 그들은 기름 부음을 받고 거룩하게 구별되어 제사장 직분을 위임 받은 제사장들이라 4 나답과 아비후는 시내 광야에서 여호와 앞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여호와 앞에서 죽어 자식이 없었으며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그의 아버지 아론 앞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였더라
5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6 레위 지파는 나아가 제사장 아론 앞에 서서 그에게 시종하게 하라
7 그들이 회막 앞에서 아론의 직무와 온 회중의 직무를 위하여 회막에서 시무하되 8 곧 회막의 모든 기구를 맡아 지키며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위하여 성막에서 시무할지니
9 너는 레위인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맡기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아론에게 온전히 맡겨진 자들이니라 10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세워 제사장 직무를 행하게 하라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맏이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13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하게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대속의 은혜를 통해 배우는 유형적 헌신의 즐거움
아론과 모세가 낳은 자
아론과 모세가 낳은 자
아론이 낳은 자식들만 이야기 중. 레위 가문 중에서도 아론의 지위를 인정하는 장면. 대제사장. 다른 레위인들과 다르게 아론 계열의 자녀들은 대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했음. 백성들의 리더로서의 모세 뿐만 아니라, 종교, 제의적인 차원에서 아론 계열이 받는 지지와 권위가 상당했을 것임.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종교적 권위와 특수한 직능과 다른 일들에 면제 받았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법 아래에 지켜야할 책임들이 무거웠다. 특히 아론의 장자인 나답과 차자인 아비후의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막을 가지고 함께 광야를 이동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위험한 것인가를 깨닫게 함.
나답과 아비후는 왜 죽었는가?
나답과 아비후는 왜 죽었는가?
다른 불. 에쉬 자라. 그냥 다른 불이 아님. 이상한 불. 불법적인 불.
민수기 1:51 “51 성막을 운반할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걷고 성막을 세울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세울 것이요 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일지며”
민수기 1:53 “53 레위인은 증거의 성막 사방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할 것이라 레위인은 증거의 성막에 대한 책임을 지킬지니라 하셨음이라”
레위인은 성막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책임은 목숨을 담보로 할만큼 위중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대제사장의 자리를 가벼이 여겼다. 그 은혜를 가벼이 여겼다. 그 축복을 진지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하나님을 모시고 다니는 일은 어찌보면 굉장히 위험한 일. 하나님의 거룩한 영역을 이스라엘 진 한 가운데에 두고, 부주의하게 그 영역을 침범할 때 결과는 죽음이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진영, 온 백성을 지켜주긴 하지만, 반대로 백성들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영역을 지켜야 했다. 상호 존중의 느낌.
대속의 은혜를 통해 배우는 유형적 헌신의 즐거움
대속의 은혜를 통해 배우는 유형적 헌신의 즐거움
하나님은 왜 대속을 강조하셨을까? 장자는 다 내것이라고 하시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선포.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장자를 바친다는 것, 그와 동등한 돈이나 제물, 땅들을 드린다는 것은, 그들의 생명이, 그 존재의 자유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또한 장자를 드린다는 약속과 그 이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노예의 역사에서 하나님에 의해 구속받았음을 상기하는, 기억하는 유형적인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을 관념적으로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유형적인 헌신이다. 헌금하는 것, 예배에 참여하는 것, 봉사하는 것, 헌신하는 것, 모든 우리가 유형적으로 할 수 있는 형태의 신앙적 표현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에 대한 기억하기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우리의 구원의 기쁨 역시 때로는 희미해져갈 때도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 어떻게 눈에 보이게 만들 수 있을까?
남녀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랑이 눈에 보이는가? 하늘의 저 별이라도 따다 줄게, 진짜로 별 따오나? 계속 상대방과 시간을 갖고, 밥을 먹고, 서로 선물을 하고,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헌신할 때, 우리는 사랑을 볼 수 있게 된다. 사랑이라는 관념이 우리의 현실세계에 유형적 헌신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내 신앙도 마찬가지다. 내 믿음도 마찬가지다. 관념적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있었다면, 이제 유형적 헌신을 통해 내 진짜 믿음과 신앙을 나의 현실 세계에, 눈에 보이게 만들어보자. 그것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있다고 계속해서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다시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우리의 유형적인 헌신은 우리 자신을 위한 기복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그저 감사하며 드리는 것이다. 그 때에 기복적인 기도에 응답이 늦어지거나 하나님께서 노!라고 이야기하실 때 실망하지 않을 수 있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헌신에는 즐거움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간의 헌신을 수고와 노력이라 여기지 않는다. 헤어지기 싫어서 왕복 2-3시간 걸리는 서로의 집을 몇번씩 왔다갔다하는 것을 연인들은 수고로 여기지 않는 것처럼.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고, 나의 물질을 드리고, 나의 시간을 드리고, 나의 몸을 드리며, 나는 주님의 것이라 고백할 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매일, 매주 주님께 감사로 드리는 유형적 헌신, 그 즐거운 헌신이 우리 가운데 충만히 있길.